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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미리 망가져 고맙다
송길영(Mind Miner) 2022-01-06

연식이 꽤 된 집에 살고 있으면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곤 한다. 관리소로부터 공용 파이프가 낡아 누수가 발생해 이를 교체한다며 각 가정의 배관은 알아서 고치라는 통고를 받았다. 수리 전까지 난방이 안된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부랴부랴 업체를 알아보니 일이 밀려 일주일 이상 기다려야 한단다. 집 떠나길 두려워하는 고양이 두 마리를 힘들게 켄넬에 넣어 어머니 댁에 맡기고 임시 숙소를 찾아나섰다. 열흘 만에 간신히 집을 고친 후 돌아오니 고양이들은 훌쭉해졌고 사람들은 집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 뒤 일주일 만에 전국을 강타한 한파 속 따뜻한 집 안에서 이 글을 쓰며 미리 고장난 난방이 고맙게 느껴졌다. 어차피 고장날 것이라면, 본격적으로 추운 겨울이 오기 전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란 생각에서다. 이처럼 일어날 일이라면 빨리 일어나는 것이 고마울 때가 있다. 집 떠나 있는 동안 식구들끼리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색다르게 지내보고, 그중 며칠은 호텔에서 호사도 부렸기에 나름의 기쁨도 있었다. 매일 보던 고양이들과 오랜만에 조우하며 이종의 생명체들 역시 서로의 존재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주에는 자동차의 엔진 경고등이 불현듯 켜졌다. 다른 경고야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엔진의 경우엔 설명서에 운행을 조심하라 겁을 준 것이 기억나 정비 서비스를 부탁했다. 다행히 소프트웨어 패치로 해결되는 문제였지만 수리센터에 들어간 김에 엔진오일부터 정기점검까지 필요한 검사들을 받고 완전무결한 상태로 돌려받았다. 구매한 지 얼마 안되었기에 직접 차를 가져가고 다시 집 앞까지 가져다주는 황송한 서비스를 받았기에 고마움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수리 후 바로 주말 폭설이 내린 강원도에 다녀올 스케줄이 잡혔다. 경고등이 조금만 늦게 켜졌어도 하마터면 낯선 곳에서 허둥대며 휴일에 열지도 않을 정비센터를 찾아 헤맸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고장날 것이라면, 원거리 악천후에 길 떠나기 전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타이밍을 맞추어 미리 고장나주어 감사하단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달 2년 만에 받은 종합건강검진에서 팬데믹 중 늘어난 체지방률과 몇몇 기준을 넘어선 수치들 역시 고마운 고장이라 보아야 하겠다. 지금의 생활 태도와 습관을 가지고 산다면 후일 더 큰 고장이 나야 마땅할 것임을 나 역시 알고 있었음에도 애써 모른 체하던 중 미리 경고해주는 신호들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진다. 문제는 집은 설비업체에서, 차는 정비소에서 고쳐주었지만 내 몸은 스스로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진행되다 지난가을 날씨 좋은 한달 정도 부지런히 자전거를 탔던 기억이 떠올랐다. 계절이 바뀌는 시원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땀 흘린 후 얻은 것은 오랜만에 느낀 뿌듯함이었다. 새해엔 그 누구나 시도하는 자기 몸을 위한 정비를 나 역시 각오하리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