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이경희의 SF를 좋아해
[이경희의 SF를 좋아해] 넷플릭스 기원합니다
이경희(SF 작가) 2022-02-24

명절을 쇠고 돌아와 덕담 이야기. 여느 일터와 마찬가지로 출판업계 역시 새해나 명절이 되면 다정한 덕담을 주고받곤 한다. 심지어 아리따운 엽서에 정성스러운 손글씨로 귀한 진심을 전하는 작가님이나 편집자님도 종종 계신다.

내가 소속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에서는 매년 익명으로 덕담 엽서를 교환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SF 작가들이 전하는 덕담이라고 딱히 특별할 것은 없다. 물론 37세기까지 장수하거나 우주 정복에 성공하길 기원하는 멘트도 간간이 눈에 띄지만, 역시나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덕담은 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글 노동자에게 운동 부족은 책에 붙은 띠지 같은 것이니까. 그다음은 꾸준히 쓰자는 이야기. 여러 사정으로 글쓰기를 포기하거나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올해도 함께 생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마지막으로 자주 듣는 덕담은 금전 운을 비는 것이다. 그 스케일은 ‘10쇄’부터 ‘만쇄’까지 다양한데, 최근에는 좋은 계약을 기원한다는 메시지도 자주 보인다. 여기서 ‘좋은 계약’이란 대개 웹툰과 영상물을 비롯한 2차 저작물 계약을 의미한다.

한동안 작가들 사이에서 ‘넷플릭스 기원합니다’라는 덕담이 유행처럼 돌았다. 참 듣기 좋은 말이다. 내 소설을 원작으로 <오징어 게임> 같은 글로벌 히트작이 탄생할지 모른다고 상상하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꽤 오래전부터 영상화는 이 업계에서 성공의 척도로 여겨지곤 했다. 유명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가 방영되자 한달 만에 억 단위의 수익이 원작자의 통장에 꽂히더라는 도시전설 같은 일화도 종종 들려온다. 유튜브와 OTT가 합세한 최근의 영상물 시장은 소설가인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돈이 오가는 곳이 되었고, 코로나19 이후로 이 흐름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에 반해, 부끄럽지만 내 책은 정말 조금밖에 팔리지 않는다. 솔직히 웬만큼 인기 없는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도 내 소설을 읽는 사람보다는 많은 것 같다. 그만큼 단위 자체가 다른 시장인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소설가로 먹고살 수 있는 이유 역시 그나마 가끔 찾아오는 ‘좋은 계약’들 덕분이라는 거다. 시각성 강한 소설을 쓰는 덕분에 내 작품들은 감사하게도 ‘영화 같다’는 평을 종종 듣는 편이고, 이와 관련된 판권 판매나 내 원작이 아닌 작품의 각색 등 이런저런 작업에 참여하는 행운이 종종 찾아오곤 한다.

그런데 ‘한편의 영화 같다’는 말은 칭찬일까? 비난일까? 내 소설에 이런 평이 붙을 때면 상대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가늠하기가 참 쉽지 않다. 어떤 이들에게 이 표현은 부족한 문학성을 돌려까는 수사다. ‘소설 같지 않다’거나 ‘이건 소설이 아니다’라는 기분 나쁜 표현이 함께 세트로 따라다니는. 그런 반면, 칭찬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소설이 인기를 얻어 영화가 되길, 혹은 드라마가 되길, 궁극적으로 OTT 서비스를 통해 글로벌 히트작이 되길 염원하는 희망 섞인 칭찬. 하지만 칭찬인 경우에도 100%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마치 콘텐츠의 계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다.

나만의 자격지심일지도 모르지만, 업계의 일부 사람들은 소설을 마치 영상 시장 아래에 종속된 원천 스토리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들에게 소설은 소설이 아니다. 그저 가공되지 않은 원재료일 뿐이다. IP라는 이상한 비즈니스 용어가 이러한 의도를 더욱 아름답게 포장한다. 우리 회사는 몇개의 IP를 보유하고 있다, 는 식의 계량화된 수사를 마주할 때면 내 작품이 진열장 속 101번째 트로피로 박제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진다. 더욱이 일로 마주한 상대가 내 작품을 소설로 대하고 있지 않다고 느껴질 때는 솔직히 조금 슬퍼지는 것이다. (오해를 방지하자면, 이는 극히 드문 경험이었고, 절대다수의 담당자 분들께는 충분한 신뢰와 존중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영화 같아 보여도 소설은 소설이고, 영상을 목적으로 소설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럴 거면 그냥 트리트먼트를 쓰는 편이 경제적이니까. 한권의 소설책 안에는 분명 소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즐거움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 소설이 가진 재미의 진정한 정수가 담겨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모두를 파괴할 힘>이라는 제목의 초능력 소설을 쓰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텔레파시 능력자다. 소설 속에서 텔레파시 능력자들은 <엑스맨>의 자비에 교수처럼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조종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감정 자체를 던지거나 빼앗는 식으로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관념적인 심리 공간에서 추상적인 개념들이 문자화된 힘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장면들은 글로 읽으면 정말 재미있지만 영상이나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동시에,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그 이야기에 강한 힘이 있다면, 굳이 다른 매체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매체를 옮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때때로 ‘영상향’(映像向) 소설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을 때에도 나는 오히려 소설로서의 재미와 완성도에 배로 공을 들인다. 좋은 이야기는 작가가 원치 않더라도 알아서 생명을 얻어 이곳저곳으로 뻗어나가는 법이니까. 소설가는 훌륭한 소설을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게 아닐까.다만 내가 이런저런 각색의 과정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며 깨달은 것은, 원작을 그 모습 그대로 타 매체에 옮겨담을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출판 소설은 어디에든 담기는 원천 스토리가 아니라 책이라는 매체에 조율된 완성품이다. 소설, 만화, 영상은 각각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도, 서스펜스를 풀었다 조이는 리듬도 전혀 다르다. 단숨에 감상하는 매체와 연재식으로 감상하는 매체의 특성에 따라 이 리듬감은 또 한번 틀어진다. 각색에는 해체의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해체와 재구성 없이 옮겨담을 경우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일본의 만화 원작 영화들을 통해 몇번이고 확인해왔다.

원작이 가진 재미의 핵심은 보존하되 그외 모든 영역을 해체할 각오가 되어야 한다. 이야기의 순서도, 사건과 배경도, 심지어 주인공마저 바꿔버릴 수 있어야 한다. 소설적 재미가 삭제된 빈 공간에 새로운 매체만의 유니크한 재미를 채워넣어야만 한다. 제작자뿐 아니라 원작의 팬들 역시 이런 변화를 받아들일 각오가 필요하다. 당신이 애정하는 작품을 새로운 매체에서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말이다. 혹자는 과도한 변형을 원작에 대한 모독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것이 원작을 제대로 각색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물론 그 이전에 원작에 대한 충분한 존중이 전제되어야겠지만, 솔직히 그거야 완성된 결과물을 슬쩍 보기만 해도 선수끼리는 다 알아챌 수 있는 문제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