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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세컨드', 필름의 의미에 대하여

영화는 어디로 가는가

<원 세컨드>를 ‘장이머우의 <시네마 천국>’쯤으로 생각한다면 아쉬운 일이다. 오랜 시간 필름으로 작업해온 장이머우가 필름과 영화를 소재로 작품을 만든 이유를 생각해봤다.

오지 혹은 고립된 공간에 대한 장이머우 감독의 관심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는 공간 속에 운명처럼 갇힌 인간에게 극단의 정서를 입혀놓는다. 그들은 고립돼 외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건강하고 질기다. 장이머우의 카메라는 오지의 정서를 깊이 있게 표현해내기로 유명한데,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랜 지점은 그가 카메라맨으로 참여한 천카이거의 <황토지>(1984)다. 영화의 엔딩에서 황하의 누런 격류가 도저하게 흐른다. 격류는 (믿음을 저버린) 팔로군 병사에 대한 그리움을 하얗게 태운 시골 소녀의 슬픔을 대신 품는다. 다시 오지로 카메라를 들이댄 <원 세컨드>의 주인공은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오지의 삶에 내몰린 자들이다. 문화대혁명 시기를 다루는 태도는 별반다르지 않지만, 그가 이번에 남달리 주목한 대상은 필름이라는 물질이다. 거의 40년 전에 누런 격류를 담아냈던 필름, 그에게 그것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한다. 그렇다고 해서 장이머우가 사뮈엘 베케트의 <필름>(1965)처럼 철학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아방가르드와 거리가 먼 장이머우의 대중영화다. 그에게 예술은 예술 자체에 봉사하는 유의 것이 아니라 삶에 관한, 삶에 말을 거는 어떤 것이다.

삶보다 거대한 예술은 없다

<원 세컨드>는 영화와 민중에 대한 애정을 담은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장이머우 자신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그런 평가에 국한하면 <원 세컨드>의 시선은 심심해진다. 이미 여러 차례 천착했던 주제를 반복하는 거라면 <원 세컨드>에 각별한 평가를 남길 이유로 모자란다. <원 세컨드>는 <시네마 천국>의 오리엔탈 버전에 머물지 않는다. 대중이 극장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던 옛 시간에 대한 향수는 <원 세컨드>의 한 부분만을 차지할 뿐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별다른 설명을 생략한 채 남자와 소녀가 필름이 담긴 통을 서로 뺏고, 빼앗긴다. 거의 20분 가까이 이어지는 도입부는, 중국의 황량한 서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중국식 웨스턴 스타일을 따른다. 서부의 총잡이들이 황금을 놓고 다투는 것처럼, 남자와 소녀는 필름통이 뭔가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인 양 붙잡고 늘어진다.

이어지는 장면에 농장 극장의 영화 상영원이 등장하면서 통에 담긴 필름은 더욱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두달에 한번 영화를 보는 마을에서 ‘판 기사’라 불리는 상영원은 극장의 제왕으로 행세하는데, 그는 훼손된 필름을 구조하는 작업을 지휘하면서 민중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그는 필름을 보배라고 호칭한다. 필름을 이동하고 줄에 걸고 세척하고 증류수로 닦고 건조시키고 마침내 감는 작업을 영화는 무려 20여분에 걸쳐 꼬박 담아놓는다. 이윽고 불이 꺼지고 스크린 위로 관객의 몸짓이 울렁거리는 장면에서 ‘과연 예술은 삶보다 큰 것인가’라고 묻게 된다. 거의 축제만큼의 환호로 영화를 대하던 관객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문제적 두 인물과 필름의 관계가 재론된다. 그런데 필름통에 그토록 집착하던 두 인물은 정작 상영되는 영화- <영웅아녀>(1964)에는 별 관심이 없다.

사연은 이러하다. 노동교화소에 갇혀 지낸 장주성은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딸의 모습이 ‘<중화뉴스> 22호’에 잠깐이나마 나온다는 말에 탈출했다. 부모 없이 사는 류가녀는 동생의 공부에 도움을 주려고 빌린 전등갓이 타버리자 그것을 새로 만들기 위해 12.5m 길이의 필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장주성과 류가녀는 애초부터 영화와 그것이 담긴 필름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삶보다 거대한 예술’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두 인물이 끈에 묶여 스크린을 올려다보는 장면에서 영화는 다시금 존재의 위계를 질문받는다. 그들을 포박한 보안과 사람들은 <영웅아녀>의 주인공 아팡이 친부와 재회하는 순간 눈물을 훔친다. 그들은 포박당한 남자와 소녀에게 더 기구한 사연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딸이 보고 싶은 장주성과 아빠를 만날 수 없는 류가녀가 흘리는 눈물은 스크린 속에서 주인공이 흘리는 눈물보다 훨씬 뜨겁다.

기억의 소유

이렇듯 현실적 가치에 더 무게를 두는 듯한 장이머우가 장주성의 공간으로 세팅한 곳이 사막– 끝없이 변하는 불멸의 공간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세번에 걸쳐 그는 사막이라는 공간 위를 통과한다. 영화는 교화소를 탈출한 장주성이 사막 위를 걷는 장면으로 시작해, 포박당한 그가 사막을 지나 교화소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리고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장면에서 그는 새로이 그 사막을 찾는다. 도입부의 장주성은 ‘<중화뉴스> 22호’에서 딸의 모습을 보겠다는 목적 하나로 사막을 횡단한다. 엔딩에서 그는 교화소로 다시 끌려가지만, 적어도 그는 원하는 바를 이루었기에 비극적인 인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런데 그가 에필로그에서 사막을 재차 방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화소로 끌려가기 전, 그는 판 기사로부터 딸의 모습이 담긴 필름 두컷을 선물받았다가 사막에서 잃어버린다. 사진을 찾겠다는 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2년이 지난 후 그 자리에 필름이 있을 리 만무하다. 복제된 이미지로나마 딸을 봄으로써 딸의 존재 확인하기를 완수한 그는 왜 기억을 물질로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장이머우는 2010년 전후에 필름에서 디지털 작업으로 전환했다. 그러므로 2005년 작품 <천리주단기>는 필름으로 작업한 거의 끝무렵의 작품이라 하겠다. 영화의 주인공인 일본인은 비디오 촬영을 위해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중국을 방문한다. 이 영화에도 감옥에 갇힌 남자와 자식의 안타까운 사연이 삽입되는데, 일본인은 오지를 찾아 찍어온 아들의 사진을 감옥의 아버지에게 보여준다. 물론 디지털 사진기로 찍은 사진이다. 2005년에 디지털 사진으로 부자간의 슬픔과 소통을 표현했던 장이머우가, 2019년에 시간을 거슬러가 필름에 목을 매는 남자를 그린 사연이 궁금하다. <원 세컨드>를 보다 빔 벤더스의 <시간의 흐름 속으로>(1976)를 떠올렸다. 국경과 시골을 떠도는 두 인물의 여정이 비슷하고, 필름과 영사기를 끌어들여 영화를 반추한다는 점도 두 영화를 연결하게끔 만든다. 나는 영화의 엔딩에서 한 남자가 떠나면서 남긴 메시지– 모든 것은 변해야만 한다– 를 기억했다.

필름과 극장의 쇠퇴를 일찌감치 예감했던 벤더스의 노트가 장이머우의 손으로 전달된 것일까. 필름이라는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기억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장주성의 바람은 부질없다기보다 미래의 기시감 같은 인상을 준다. <원 세컨드>의 배경인 1970년대 중국은 현재 같은 개인적 기록 매체가 부재하던 곳이다. 비디오카메라나 디지털카메라는 꿈도 못 꾸던 때,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필름의 존재가 어떤 것이었을지, 세대마다 상상하는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다. 판 기사는 상영 도중 필름이 불타는 사고가 일어나자 별일 아니라는 듯이 영사기를 열어 금방 해결한다. 1970년대라면 필름이 불타는 이미지로 끝을 맺는 몬테 헬만의 <자유의 2차선>(1971)이 나오던 때다. 필름의 물성을 체화했던 자들이 존재 선언처럼 필름을 다루던 시간이었다. 필름과 극장 없이 영화가 존재할 수 있는 지금, <원 세컨드>는 필름과 디지털이 바통을 교환하던 21세기의 초입을 기억하게 한다. 오랜 시간 필름으로 작업해온 장이머우이기에 가능했고, 더 아름답게 전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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