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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심판'이 지적한 사법제도의 모순과 한계에 대하여
이성탄(법률가) 2022-03-23

진실은 가닿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재판은 계속된다

<소년심판>의 판사는 기록 뒤에 숨겨진 진실을 위해 현장을 뛰어다닌다. 이는 분명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훼손하는 월권 행위이지만, 그 속에서 <소년심판>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소년심판>의 홍보 문구이자 주인공의 대사,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는 명백히 관객에 대한 도발이다. 사전 홍보만 보면 해당 대사가 마치 심은석(김혜수)이라는 인물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실제 그가 보여주는 행동은 소년범 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곧 자세히 보겠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소년범이 저지른 행동의 진실을 밝혀내고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 최선의 처분을 고민하는, 차라리 ‘소년범을 사랑하는 판사’에 더 가깝다. 이렇게 <소년심판>측은 실제 인물과 맞지 않는 자극적인 대사로 드라마를 홍보했지만 그것을 넷플릭스 재생 건수를 올리기 위한 상술이라고만 하면 불공평하리라. 소년범을 혐오한다는 대사는 단순한 홍보 외에도 또 한 가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바로 관객에게서 ‘어떻게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할 판사가 소년범을 혐오한다고 할 수가 있나? 자기는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라는 태도를 끌어내는 것이다.

소년범 사건의 특수성

과연 우리의 주인공은 이렇게 잔뜩 관객을 도발해놓고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 제1화에서 보호처분 중인 소년범들과 밥을 먹다가 그중 한명의 절도 현장을 목격하고 훔친 지갑을 내놓게 만드는 장면은 이후 심은석이 작품 내내 벌일 수사극의 예고편이다. 심은석은 판사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사건마다 현장을 들쑤시고 다닌다. 심은석의 이러한 행위는 진짜 판사들의 업무관행은 물론 법의 이념에도 어긋난다. 사실 드라마에서만 봐도 심은석은 수사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서투른 방법으로 관계자들의 민원을 일으키기도 하고, 현장에서 살해당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항상 2명이 조를 이뤄 움직이고 사람을 무력으로 제압하기도 하는 경찰관들이었다면 백도현(김균하)의 칼에 찔리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판사가 수사를 함에 있어 이와 같은 문제들은 어디까지나 재판 외적인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것이 재판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형사소송법과 그 부속법령들은 증거자료를 수집하고 법정에 제출하는 절차를 엄격하게 규정해두었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한으로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그 힘을 남용하여 사람을 함부로 범죄자로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엄격한 증거조사 절차의 기본은 수사·기소기관과 재판기관의 분리다. 극중 심은석이 얼마나 양심적이었는지와 별개로, 혼자 수사와 재판을 일괄하는 판사는 자기 판단을 과신하고 권한을 남용할 위험이 크다.

그러므로 심은석의 상사 강원중(이성민)과 나근희(이정은)는 계속해서 심은석의 월권을 지적하고 사건 처리에 집중할 것을 주문한다. 특히 나근희는 대놓고 자신의 철학이 속도전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도 일리가 있다. 한명의 소년범에 집중하느라 나머지 수십명을 몇달이고 방치하는 것보다는, 기존에 수집된 자료를 가지고 빨리빨리 판단을 내리는 게 더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심은석은 계속해서 상사들과 싸우며 현장을 뛰어다니고 기록 뒤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낸다. <소년심판>이 심은석의 이러한 행동들을 무조건 옳다고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심은석은 마지막 징계위원회에서 자신이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훼손했다고 인정한다. 그의 성격상 대법원의 권위에 눌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드라마에서 심은석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선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 모든 월권 행위가 잘못한 이에게 책임을 지우고, 재판으로 가능한 한도 내에서 피해자를 구제하며, 교화의 여지가 있는 소년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곧 <소년심판>의 핵심적 메시지다. 소년 재판을 할 때는 마땅히 피해자의 입장과 가해자의 책임을 묻고, 그러면서도 아직 미성년인 가해자들을 교화해야 하지만, 판사가 월권하여 현장까지 뛰어다니지 않고서는 그러한 재판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이는 곧 현실의 사법자원 부족 현상에 대한 지적이다.

두 자리 햇수 동안, 소년 범죄를 포함한 여러 사건을 다룬 법률가로서 볼 때 <소년심판>의 지적은 대체로 옳다. 원래 판사들은 다 전담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미제 속에 허덕인다. 하지만 소년범 사건에는 소년의 교화에 최선의 처분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특수성이 있다(성인의 형사재판에도 교화의 이념은 반영되어 있지만 그 수단은 기본적으로 벌금과 징역이라는 두 종류의 형벌인 데 반해 소년 보호 재판을 할 때는 교화를 위한 처분의 종류가 10가지나 된다). 그리고 판사에게는 시간이 없다. 그들이 주어진 기록과 법정에서의 짧은 시간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비교적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절대적 자원 부족은 분명한 현상이다.

소년들을 교화하기 위한 시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성인 수용시설도 그렇지만 언제 어떤 자료를 보아도 소년교도소, 소년원과 각종 보호시설은 언제나 정원 초과 상태이고 관련 종사자들은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지나치게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소년심판>의 강원중이 꿈꾸던 대로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의 자원 투입과 소년 재판 절차 강화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이는 역시 드라마의 지적대로 소년범은 취약한 주변 환경에서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소년심판>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사법제도에 대한 것만도 아니다. 아래에서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건들에 관해 생각해보자.

범행의 사회적 맥락

<소년심판>에서 다루는 사건들이 모두 현실의 유명 사건들을 모티브로 한다는 점도 ‘현실을 직시하라’라는 메시지를 강화해주지만(다만 이에 대해서는 실제 피해자들과 합의된 것인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 것으로 안다), 나는 오히려 현실과 다르게 각색된 부분에 더 주목하고 싶다.

먼저 볼 것은 고등학교 시험 답안지 유출 사건이다. 우리가 아는 현실의 사건은 교사가 자신의 딸들에게 답안지를 준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심판>에서의 답안지 유출은 자기 가족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학교 전체의 이른바 ‘명문대’ 입학률을 높이기 위해 여러 상위권 학생을 대상으로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로 나타난다. 뚜렷한 현실 사건을 모티브로 삼으면서도 이렇게 눈에 띄는 각색을 한 덕에 관객은 새로운 반성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먼저 그것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의 원인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현실에서의 답안지 유출 사건은 분명 대학 합격증이 너무나도 많은 것을 결정해버리는 승자독식체제와 학벌주의가 빚어낸 사회적 현상임에도, 재판이 진행될 당시 언론과 국민들의 이목은 범인들의 사적인 부도덕에만 집중되었다. 이에 <소년심판>은 아예 범행을 사적 차원에서 공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그 사회적 맥락을 더욱 선명하게 가시화했다.

어떤 일의 원인을 다시 보게 되었다면 다음 순서는 결과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답안지를 유출하고 유출받은 자의 뻔뻔함을 욕할 때 피해자들은 잊히고 있었다. 기껏해야 ‘안 그래도 경쟁이 치열한 학교라는데 거기서 부정행위를 하다니’ 하고 다시 한번 범인을 비난할 뿐이다. 이 드라마는 그 피해자들이 원래부터 비정상적인 입시경쟁의 한계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청소년들이었음을 새삼 드러내 보여준다.

소년 재판을 포함한 형사 사법절차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구체적인 행위를 다룬다. 사회적인 맥락은 그 행위의 평가인자 중 하나(형사재판에서의 ‘양형요소’)로 작용할 뿐 그 자체가 판단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재판을 주된 소재로 다루면서도 그 제도적 한계를 지적하는 <소년심판>은 이처럼 현실 사건을 특정한 방법으로 각색함으로써 목표를 더욱 효과적으로 달성한다.

벽돌 투척 사건에 대한 각색 또한 소년 사법제도의 한계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아파트 옥상에서 벽돌을 던져 사람을 죽게 한 초등학생들이 더 악질적인 범죄자로 성장했다는 뉴스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장난으로 사람을 죽게 만든 아이들은, 적정한 교화를 받지 못한 탓에 그 성정이 더욱 악화되어 ‘n번방’ 일당을 연상케 하는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된다. 이로써 <소년심판>은 부실한 소년 재판이 얼마나 파국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강조한다.

그러나 한편 법률가의 관점에서 이 부분의 메시지는 다소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이 드라마에서 촉법소년(만 10살 이상 14살 미만으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고 최대 소년원 2년의 보호처분만이 가능한 나이)은 두번 등장하는데 둘 다 사람을 죽인 사건(초등생 살인 사건과 벽돌 투척 사건)이다. 여기서 <소년심판>은 명시적으로 ‘14살 미만에게도 형사처벌이 필요하다’라고 외치지는 않지만 현재의 보호처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강한 뉘앙스를 풍긴다.

살인이 결코 그 피해를 회복할 수 없고 한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모두 없애는 극악한 범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뉴스에 나온 해당 사건들 외에는 거의 발생하지도 않는 ‘촉법소년이 사람을 죽인’ 사건만을 소재로 삼은 것, 그것도 관객이 가장 이입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직접 겪은 사건으로 만든 것은 조금 편파적이지 않은가. <소년심판>이 다른 소년 범죄를 다룰 때 보여준 다양한 관점과 깊이 있는 고찰에 비할 때 촉법소년을 다룬 방식에 관해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사법제도를 넘어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이제는 드라마의 결말에 대해 얘기해보자. 심은석은 징계위원회에서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훼손했음을 인정하고, 다시 이를 훼손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하지만 심은석이 직접 수사까지 하게 된 것은 현 제도하에서 판사의 역할만 수행해서는 사건의 진실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는 어떻게 자기가 맡은 소년범의 현실에 맞는 처분을 할 거라는 말인가? 그래서인지 징계위원회 이후 심은석의 소년 재판에 대한 묘사는 약간 어물쩍 넘어가는 느낌이다. 소년범제도에 대한 두꺼운 책을 쓰고, 소년들을 하나하나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법정에서 법의 엄중함을 보여주기도 하는 모습이 몽타주 형식으로 지나갈 뿐이다. 이런 어정쩡한 결말에 대해서는 뭐라고 해야 할까?

헌법재판소가 사형제도를 합헌으로 결정할 때 사용하는 ‘오판 가능성은 사법제도의 숙명적 한계’라는 표현이 있다. 다시 말해 잘못된 재판으로 엉뚱한 사람이 사형당하더라도 그건 숙명적 한계이니 그 이유로 사형제도가 위헌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법학도 시절에는 어이없을 정도로 비겁한 도피라고만 생각했으나, 지금은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법관은 증거를 통해 듬성듬성 사실을 재구성한다. 양편 당사자는 나머지 모든 부분에 대해 서로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판결은 어떻게든 내려야 한다. 그래서 민사는 원고에게, 형사는 검사에게 입증책임을 지우고 증거가 없는 주장은 기각한다는 원칙이 세워져 있으나 이런 형식을 넘어 진실에 닿고 싶은 욕심은 대부분의 법률가에게 있는 것 같다. 이런 가닿을 수 없는 진실의 존재, 그럼에도 재판을 해야 하는 책임이 바로 사법제도의 숙명적 한계가 아닐까 한다. 심은석이 더이상 현장수사를 하지 않고 제한된 기록으로 재판할 때도 비슷한 것을 느끼리라.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법제도’의 한계라는 점이다. 소년범의 예방과 진정한 교화는 어차피 사법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이는 명백히 우리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만약 당신이 <소년심판>을 보고 무언가 느꼈다면, 혹은 전부터 소년범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들을 위해 드라마 시청 이상의 공부와 실천을 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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