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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리쉬 피자' '더 배트맨', 미국영화에 새겨진 70년대의 흔적에 관하여

미치광이들의 영화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21살에 죽는다. 그들은 21살에, 어쩌면 더 어린 나이에 정서적으로 죽는다.” - 존 카사베츠, [The Films of John Cassavetes: Pragmatism, Modernism, and the Movies]

<리코리쉬 피자>

<리코리쉬 피자>

1. <리코리쉬 피자>, ‘홈 무비’의 소실

1970년생인 폴 토마스 앤더슨은 <리코리쉬 피자>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1973년의 산 페르난도 밸리로 되돌아간다. 그의 아홉 번째 장편영화는 10대 소년과 스물다섯 살의 성인 여성이 커플로 결합하는 70년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유년기의 흔적에 관한 개인적 기록이 반영된 배경일 테고, 영화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균질한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하고 60년대를 관통하던 정치적 이상이 사라진 뒤의 시기다. 텔레비전에서는 전쟁을 알리는 뉴스와 소비상품을 광고하는 문구가 동시에 송출되고, 포르노그래피와 약물이 주류 문화에 침범하던 때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다시 한번 선택한 70년대 할리우드 변방의 작은 도시(산 페르난도 밸리는 그의 초기작들의 배경이다)는 좌절된 유토피아를 표상한다. 그곳은 할리우드의 미국적 꿈이 조각난 파편으로 버려져 있다.

<리코리쉬 피자>가 지극히 불안정한 물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화장실 변기가 폭발해 물줄기가 솟구치는 모습이다. 견고하고 단단한 물체의 폭발과 역류하는 물은 화면을 난폭하게 변형시키는 영화의 무질서한 운동을 예고한다. <리코리쉬 피자>에 나오는 건축적 공간과 사물들은 소비상품이 약속하는 안정적인 내구성과 영구적인 시간을 갖추지 않는다. 언제 부서지고 파괴될지 모르는 잠정적인 시간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화장실은 이유 없이 폭발한다. 쏟아지는 물줄기는 카메라가 야외로 나간 다음 장면에서 공원 잔디를 적시는 스프링클러로 연결된다. 이러한 사물의 불안정성과 자유로운 결합이 <리코리쉬 피자>의 연인들을 움직이게 한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영화의 한 사례라 말하지만, 여기엔 이야기를 파열시키는 폭발과 구멍이 여전히 스크린에 드리워져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 있다. 청소년 박람회 현장에 들이닥친 경찰이 갑작스럽게 개리를 체포한다. 그들은 총기를 소지한 16살 백인 남성의 살해 혐의를 고지하는데, 정작 경찰서에서 개리는 용의자가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허무하게 끝나는 에피소드다. 실없는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이 장면에는 다른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개리가 아역배우로 성공하고, 사업가로 부피를 키워가는 동안 그와 비슷한 나이에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은 소년은 총기 살인사건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0년대의 산 페르난도 밸리는 두 사건이 같이 벌어지는 곳이다. 소년과 성인 여성의 로맨스가 펼쳐지는 이 영화의 배경은 소년의 살인사건과 성인 여성의 포르노그래피가(알라나와 미팅을 하는 배우 에이전시는 그녀에게 가슴 노출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만들어질 수도 있는 세계다. 이 영화에서 주의 깊게 반복되는 거울의 이미지는 벌어진 것과 벌어지지 않은 것이 한몸을 이루는 두 세계의 이중적 가능성을 표시한다. 커플의 격렬한 감정적 충동은 영화에 언급되는 살인과 마약, 베트남전의 상흔과 더불어 발생한 결과다. 우리는 그들만큼 정신이상적인 행동을 보이고, 그들은 우리만큼 충동적이다. 서사를 잠시 진동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사라지는 이런 미세한 파열은 세계의 감춰진 긴장을 영화에 덧붙인다. 이 작은 충돌에서 영화 속 인물들에게 불가피한 균열이 적힌다.

게리와 알라나는 연인처럼 동행하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리고 질투하기를 반복한다. 그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처럼, 이 영화는 하나의 인물과 공간에 안정적으로 머무르는 대신 계속해서 다른 사물과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전개된다. 수많은 인물이 개리와 알라나의 시선에 스쳐 지나가고 화면에 돌아오지 않은 채 사라져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로를 찾는 개리와 알라나는 함께 머물렀던 장소들을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그들과 마주쳤던 인물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대표적인 장면인 <매그놀리아>의 개구리 비처럼 도시를 점유하는 서로 다른 유형의 인물들을 하나로 묶는 픽션적 장치는 여기에 없다. <리코리쉬 피자>는 경계를 넘어선 공통의 매개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리코리쉬 피자>가 강박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영화의 장소들이다. 구체적으로 어느 공간을 집어서 특별한 영화의 장소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가 만들어지거나 상영되거나 영화 자체를 지시하는 통속적인 장소들이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리만큼 배제되어 있다. 개리가 아역배우로 활동하고, 영화 문화와 비즈니스의 단면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데도 영화와 그 형상이 머무는 장소를 직접 비추는 것만큼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개리가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가 나오는 텔레비전 쇼이고, 잭 홀든의 출연작이 아니라 그가 술에 취해 영화의 한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재연하는 순간이다. 영화를 촬영하는 도구(필름카메라와 마이크)들은 왝스의 선거용 홍보 영상을 찍는 장비로 실질적인 기능이 바뀌어 있다. <리코리쉬 피자>는 20세기의 자취를 돌아보면서 영화 문화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되짚기보다는 텔레비전 쇼와 프로파간다 뉴스를, 인접 매체와 경합하고 장소를 내어주던 영화의 변형된 역사를 비춘다.

개리가 포르노 영화를 선전하는 신문 기사를 들여다보는 동안, 알라나는 석유 파동을 보도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본다. 기름값이 폭등해 LA의 거리에 늘어선 자동차들이 멈춰 있는 장면이 나온다. 장 보드리야르가 관찰한 대로 사막과 사막을 잇는 미국의 도시에서 문화를 일으키는 두 요소가 자동차와 영화라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미국의 두 가지 문화적 질료가 총체적인 위기와 중단에 이르는 최초의 순간에 도착한다. 앤더슨이 보여주는 세계는 영화의 장소가 지워지고 자동차 시동이 꺼져버린 곳이다. 비유적인 뜻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는 연료가 고갈되어버린 시대가 스크린에 전시되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를 멈추게 한 석유 파동이 벌어진 1973년은 (하스미 시게히코가 지적하는 것처럼) 존 포드가 사망한 해이자 니콜라스 레이의 마지막 영화인 <우린 집에 돌아갈 수 없어>가 공개된 연도이다. 시력을 잃은 한쪽 눈에 안대를 끼고, 나머지 한쪽 눈으로 허구적 공동체의 역량을 관객의 삶에 기입하던 작가들의 시간이 끝났다. 도시의 인간 공동체를 관통하던 영화의 시대가 끝났다. 소비상품과 정치의 이해관계가 앞서는 팻 버니의 사업장과 왝스의 선거사무소는 도덕적 인간 공동체를 구획하는 장소가 아니다. 이제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작은 행동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세계를 종합할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없다. 레이의 영화 제목처럼 그들은 이전과 같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연료가 떨어진 채 LA의 밤거리를 거꾸로 주행하는 알라나와 개리의 대형 트럭은 귀환할 수 없어진 시대의 한 표식이다.

개리와 알라나는 이름이 비어 있는 자들이다. 소속될 수 있는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알라나는 개리를 당대의 위대한 스타들인 ‘로버트 굴렛’과 ‘딘 마틴’의 이름으로 부르고, 잭 홀든과의 오디션을 끝내고 나서 “그레이스 켈리”처럼 보인다는 말을 듣고 기뻐한다(그러나 정작 알라나가 본명을 말하려고 하자 홀든은 그녀를 땅에 처박고 질주한다). 그들은 원래의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 스크린에 등장하는 스타의 이름을 대입한다. 하지만 반복건대, <리코리쉬 피자>에는 영화의 장소가 손실되어 있다. 그들은 스크린에 출연하는 대신 거울과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것들에 붙잡힌다. 개리는 쇼윈도를 통해 바라본 물침대에 매혹되고, 팻 버니 가게에 구경 온 여자친구를 유리창으로 보고 시선을 빼앗긴다. 알라나를 처음 마주할 때도 화면에는 현실의 얼굴과 더불어 나타난 거울 속의 얼굴이 보인다. 영화가 없는 세계에서 그들이 꿈꿀 수 있는 이미지의 변형은 거울과 유리창의 표면에 시선을 던지는 것뿐이다.

<리코리쉬 피자>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만든 유년기의 ‘홈 무비’이다(실제로 알라나 하임의 가족이 모두 출연하고 그들의 집 내부 공간이 장면으로 다뤄진다). 이제는 아벨 페라라 같은 소수의 언더그라운드만이 고수하는 홈 무비의 속성을 산업과 시스템의 영역에서 보여주는 것은 무척 대담한 일이다. 이야기가 불균질하다거나 인물들의 거듭되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이 영화의 홈 무비적 성질을 고려한다면 부자연스러운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홈 무비의 형식과 리듬을 따라 어린 시절의 친밀한 장소들을 비추고 그 장소를 오가는 작은 공동체를 관측한다. 이는 차츰 영화가 진행되면서 소멸하기 직전의 기록으로 변모한다. 시간은 멈춰버린 것처럼 조금도 흘러가지 않으며, 눈앞에 나타났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이 영화의 불균질한 서사는 영화에 나오는 모든 장소와 인물에 변형을 일으킨다. 세계는 미세한 단위로 쪼개지고 군중을 묶는 공동의 표식은 부재한다. 그러니 정확히 고쳐 말하면, <리코리쉬 피자>는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자들의 곧 붕괴할 ‘(노) 홈 무비’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1970년대의 유토피아적 매혹이면서, 그 시대의 끝이다. 신원을 모르는 상대에게 걸려온 전화벨 소리가 전하는 궁금증과 흥분을 담아낼 수 있는 마지막 시기가 사라져가고 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익명의 군중들을 무작위로 배치하는 영화의 장소 또한 사라지고 있다. 개리와 알라나는 마침내 도시의 밤거리에서 재회하고 끌어안는다. <리코리쉬 피자>는 갑작스러운 재회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데, 스탠리 카벨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위기에 놓인 커플의 재결합을 추구하는 할리우드 재혼 코미디에 속한다. 거리를 달려오는 두 사람의 발걸음으로 재회하는 마지막 순간은 돌이킬 수 없이 멀어져 버린 것들을, 더 이상 마주치지 않는 것들을 다시 결합하는 매혹적인 영화의 순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포옹하는 두 사람의 배경으로 자리 잡은 영화관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영화가 머무는 시간에 속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해피엔딩’은 영화의 주변부를 맴도는 연인들의 행복한 시간을 끝내는 역설적 의미의 ‘엔딩’이기도 하다.

<더 배트맨>

<더 배트맨>

2. <더 배트맨>, 패닉

흥분과 도취가 지나간 자리에 파괴된 잔해가 남겨진다. 배트맨 시리즈의 새로운 책임자인 맷 리브스는 다시 만들어진 <더 배트맨>이 197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를 적극적으로 참조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프렌치 커넥션>,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가 주로 언급되는데,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적 공허와 편집증적 증상이 뒤섞여 분출되는 폭력의 세계를 그린 필름누아르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개인의 병리적 증상이 국가의 환부이자 시대의 얼룩으로 치환되는 남성서사의 거대한 삼위일체를 이루던(혹은 그렇다고 여겨지던) 마지막 시기의 영화들. 리브스는 개인과 국가 간의 밀접한 접속이 끊어진 시대에 여전히 국가의 붕괴를 꿈꾸는 시대착오적 기획을 <더 배트맨>의 고담시에 투영한다.

영화 속에서 리들러는 말한다. 토마스 웨인이 약속한 재개발 기금은 거짓이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자본가의 공약과 정치 언어는 실천되지 않았고, 눈먼 기금은 정치인들과 결탁한 도시의 지하 세계로 흘러 들어갔다. 그는 도시 기획의 원죄를 자본의 상속자인 브루스 웨인에게 덧씌운다. 리들러의 계획을 가속하는 것은 브루스 웨인과의 계급차다. 그들은 같은 장소에서 희망의 언어를 듣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살아남아 주목받은 것은 버림받고 자라난 수많은 고아들이 아니라 단 한 명의 브루스 웨인이다. 리들러는 공동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은 도시 공간을 범죄적 폐허로 전환하려 한다.

리브스의 <더 배트맨>이 주의 깊게 묘사하는 부분은 도시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조직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기관처럼 작동하는 면모다. 도시 공간의 규칙을 실행하는 감춰진 논리가 기계적으로 유통되는 범죄의 절차를 통해 긴 시간에 걸쳐 드러난다. 실마리를 아는 자들은 진실이 밝혀지면 그들을 지탱하는 도시 전체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며 입을 닫는다. 이 과정에서 ‘날개 달린 쥐’를 찾는 탐정의 추론은 ‘펭귄’에서 ‘박쥐’로 종래에는 ‘매’로 그 정체를 옮겨 간다. 불확실한 판단과 추론의 혼동이 배트맨의 시야에 비친 고담시의 표상에 새겨진다. 마찬가지로 배트맨과 리들러는 망원경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벽에 영사되는 영상을 마주하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러한 시각의 등치성이 최종적으로 불러오는 것은 그들이 머무는 공동의 지반을 무너뜨리는 자기파괴적 집단행동이다.

그래서 배트맨이 자처하는 탐정의 역할은 이중적이다. 그는 리들러가 꾸며놓은 퍼즐에 접근하면서, 서로 다른 트라우마의 기원이 되는 아버지(들)의 흔적에 가까이 다가선다. 도시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면서 탐정과 가해자를 결부 짓는 공통된 과거와 연결되는 것이다. 브루스 웨인은 아버지의 행적에 고통받고, ‘캣우먼’ 셀리나는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 아버지 세대의 거짓말을 발견하는 허구적 서사에서 비참한 삶의 의미를 찾은 리들러의 편집증은 도시를 수몰시키려는 과대망상으로 번진다. 원인 없는 도시의 밑바닥에서 분노와 증오의 행위만이 연쇄적으로 나타난다. 영화의 마지막에 배트맨은 희망을 말하지만, 개인의 역량으로 통제할 수 없는 파괴에의 열망과 그 원인을 해소하지 못하는 공동체적 무기력이 또한 감지된다. 리브스는 이름 없는 자들의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도시 공동체의 뒤늦은 반응을, 70년대 미국영화가 발산한 시대적 불안과 과잉된 행동을 뒤늦게 가져온 영화의 형식과 연결한다. 다층적인 의미에서 <더 배트맨>은 후발주자의 영화다.

LA와 뉴욕.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는 망상적 연인들과 오랜 증오 끝에 서로를 마주하는 영웅과 악당. 아버지가 부재한 소년은 덧없이 사라져가는 유년기의 충동에 사로잡히고, 박쥐 복장을 두른 남자는 죽은 아버지가 남긴 유년기의 고통에 접근한다. 두 편의 영화는 상반된 장르와 분위기로 차이를 드러내지만, 적지 않은 요소들을 공유하면서 비대칭적으로 접합해 있다. 1970년대의 병리적인 충동을 빌려오는 두 영화에서 미국은 꿈과 미래를 약속하는 신화 속의 아메리카가 아니다. 그곳은 연료가 고갈되어버린 차들이 방치되고, 거짓으로 파산한 도시의 잔해로 부서져 있다. 모든 것이 소진된 지대에 70년대적 미치광이들의 기획이 접속하는 <리코리쉬 피자>와 <더 배트맨>은 유사한 열망을 분출하는 서로 다른 비전이다. 아버지의 압력에서 벗어나 유년기적 열망을 찾으려는 충동은 아름다운 스크루볼 코미디로 한번, 어둡고 경직된 블록버스터 탐정 서사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서두에 인용한 문장에 덧붙여 존 카사베츠는 이 나라의 사람들이 21살을 넘도록 돕는 것에 영화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는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제공하는 감성적이고 지적인 로드맵이다. 그렇다면 연료 없는 자동차를 주행하는 운전자와 도시 전체를 보지 못하는 눈먼 탐정에게 필요한 지도는 어디에 있을까. 극장의 어둠 속에서,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왔다. 불균질한 질서와 비전이 허용되던 마지막 시기인 197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의 흔적은 오늘날의 미국영화에 주어진 육중한 족쇄를 푸는 단서일까? 아니면 동시대 영화가 직면한 또 다른 막다른 길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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