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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슬금슬금 영업법
김겨울(유튜버) 2022-04-14

‘인플루언서’라는 호칭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호칭을 피해갈 수 없는 당사자로 살고 있다. 팔로워 규모가 작은 편이라 그중에서도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라는 세부 장르로 분류되고, 출판계로 한정하면 ‘마이크로’는 뗄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 소셜 미디어를 종횡무진하는 인플루언서들이 주로 하는 일은 자신의 외양이나 취향, 라이프스타일 등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말 그대로 ‘영향을 주는’(influence) 일이다. 나는 그중 책과 신념, 그리고 라이프스타일을 맡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영향을 주려고 작정하고 영상을 만들거나 글을 올리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걸 당신도 좋아하면 좋겠다는 영업의 목표가 생길 때가 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영업 방법 중 하나를 오늘 공개하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하지 말라고 하지 않기’다. 말 그대로 뭘 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그냥 다른 옵션을 제시하는 것이다.

뇌는 부정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만 생각나고, 케이크를 먹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 케이크만 생각난다. 그러니까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면 고기가 생각나고 여성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면 여성을 멸시하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 테다. 그래서 나는 고기를 먹지 말라는 영상을 만드는 대신 두부와 카레, 팔라펠이 포함된 맛있는 비건 식단을 추천하고, 여성을 물화시킨 책을 비판하는 영상을 만들지 않고 페미니즘이 자연스럽게 기저에 깔린 책을 추천한다. 이것은 나의 ‘슬금슬금 영업법’이다.

물론 제대로 비판하는 일은 중요하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영업법에 한정한다면 ‘하지 말라’는 영업보다 ‘이렇게 해보면 좋다’고 말하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경계선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인 방향의 영업이 효과적일 수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삶을 변화시켜온 원리도 거의 같았기 때문에 나는 이 ‘슬금슬금 영업법’에 꽤 희망을 걸고 있다. 맛있는 비건 옵션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모르고 무조건 동물성 식품 없이 살아야 해, 라고 소거법으로만 생각했다면 나는 비건이 되기를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릴 때의 경험으로 쇼트커트의 편리함을 모르고 그저 사회적 여성성을 거부하겠어, 라고만 생각했다면 머리를 자르는 일을 부담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분노와 저항의 에너지를 보조하는 수단으로서라도 ‘좋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늘 중요하다. 부정은 새로운 긍정으로 이어져야 달성되는 것이니까. 뭔가를 영업해야 한다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스며드는 즐거움을 나누며 더 즐거워지면 좋겠다. 슬금슬금, 꿈꾸는 곳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