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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호 감독은 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세련된 정서와 감각으로 동시대를 보여준 감독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의 새로운 작품 <길>은 오랜만에 영화 크레딧을 통해 만나게 된 그의 이름만큼이나 반갑고 낯설게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황진이> <꿈> <정> 같은 영화보다도 <기쁜 우리 젊은 날>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이 우리의 뇌리에 더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은, 자신은 언제나 전통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고 잊혀져가는 우리만의 어떤 것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 또 그는 한때는 자신도 선배 감독들이 옛것에 관심을 두는 것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날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대부분의 저예산영화들이 쉽게 선택하게 되는
인생과 용서에 대한 오래된 정서를 길 위에서 배우다,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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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가 한 여고생을 엘리베이터에서 유괴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행동거지가 어설프다. 클로로포름으로 적신 수건을 여고생의 입에 틀어막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약발이 잘 안 듣는 모양으로, 여고생이 몸부림을 칠 때마다 여고생을 가둔 상자가 꿈틀거린다. 코미디로도, 혹은 스릴러나 드라마로도 갈 수 있는 이 초반 대목부터 <잔혹한 출근>은 셋 모두를 잡으려고 한다. 그래서 개인기에 기반을 둔 폭소보다는 상황이 낳는 간헐적인 웃음과 이중유괴의 긴장이 낳는 스릴, 그리고 결국 가족애로 귀착되는 감동이 <잔혹한 출근>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코미디로 입지를 굳힌 김수로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영화지만 <잔혹한 출근>에서 코미디가 차지하는 비중은 낮은 편이다.
평범한 가장인 듯한 동철(김수로)은 주식투자 실패와 막대한 사채이자로 인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상황이다. 다정한 아내와 어린 딸 앞에 사실을 밝힐 수 없는 그는 대출조차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주변 사람
개인기가 스릴러와 만나 드라마로 풀린다, <잔혹한 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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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막 더블린 공항에 도착했다. 당나귀 마차에 오르면 감자술을 마시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운전사가 당신을 모실 것이다. 더블린 성에 들어서면 파이프 밴드의 ‘대니 보이’와 4리터들이 기네스 맥주로 환대를 받을 텐데 맥주는 3분 안에 비워야만 한다….”
영국 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아일랜드인에 관한 진실>(1999)에서 풍자한 아일랜드 인상은 IT 초강대국이 된 아일랜드와 거리가 있지만 왜곡된 아일랜드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른 새벽 내가 찾은 산골짜기 그곳으로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와 황금빛 보리를 흔들어놓았네”라는 로버트 조이스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일부 구절처럼 아일랜드 인상기는 푸른빛과 저개발, 전원 등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런데 로버트 조이스의 노래 가운데는 “우리를 묶은 침략의 족쇄는 견디기 어려웠네”라는 구절이 있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그 보리밭에 피냄새가 난다고 노래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199
당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보리밭의 물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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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주간 소년점프>, 한 젊은 만화가가 해적왕 되는 것이 목표인 소년의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인기가 높아진 만화는 일본 너머로까지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42권째 단행본 발행’이라는 대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혼자 망망대해를 떠돌던 소년은 6명의 동료를 얻는 한편, 고액의 현상금이 걸린 해적으로 성장했다. 이것이 오다 에이치로의 <원피스>다.
<원피스>는 <하록 선장>의 소년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화다.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이 꽂은 깃발 아래서라면 언제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해적. 그를 지탱하는 믿음직한 동료들. 그리고 모험. <하록 선장>의 모티브를 <원피스>는 더 밝고 단순하게 그린다. 신념과 동료애를 직설적으로 강조하고, 치열한 싸움이 끝나도 슬픈 죽음이 없는 밝은 세계를 만든 것이다. 모험 만화인데도 대규모 소녀팬이 형성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흔한 키스신도 없는
본편을 알수록 재미가 클 것, <원피스: 기계태엽성의 메카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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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는 어린 남매가 하염없이 기다리던 부모의 자리를 애완견으로 메운다. 주인공 찬이가 여동생 소이의 생일에 강아지를 훔쳐오는 행동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처음 생일선물로 훔쳐온 ‘마음이’는 소이의 어리광, 그리움, 눈물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찬이의 짐을 나눠지는 유사 가족의 역할을 수행한다. 가족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는 전반부는 빙판 위의 비극을 기점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선다. 드라마의 극적인 요소를 강화하려고 애견영화의 주인공 마음이(달이)에게 엄청난 죄의식을 부과하는 스토리는 비약으로 느껴진다. 마음이의 찬이를 향한 외로운 애정과 찬이의 외면으로 이루어진 후반부의 시선은 둘의 관계를 왜곡한다.
11살 찬이(류승호)는 어린 동생 소이(김향기)와 단둘이 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라져버린 어머니는 돌아올 기약이 없다. 찬이와 소이의 유일한 위안은 찬이가 훔친 리트리버 ‘마음이’다. 하교하는 찬이를 소이와 마음이가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며 그들의
세상 끝까지 함께 해준 친구,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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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게 아쉽지 않아요?” 우이도의 모래산 앞에서 생전의 민주(김지수)는 그렇게 말했다. 아직 몇 십년은 충분히 그 자리에 있을 자연을 두고 그녀는 조금은 오만하게, 벌써 그것의 사라짐을 슬퍼한다. 사라짐을 붙들기 위해 사진을 찍고 누군가와 함께 다시 돌아갈 것을 기약한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모래 알갱이가 다 흩어지기 전에, 그녀의 삶이 먼저 흩어졌다.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에 이어 <가을로>에서도 김대승 감독의 화두는 여전히 사라짐 혹은 상실이다. 민주는 그 사라짐을 그저 미리 안타까워했을 뿐이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랑하는 이를 잃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상실감은 그저 안타까움으로 그치지 않는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인우(이병헌)는 죽음처럼 살다 결국 절벽에서 떨어지는 길을 택했고 <혈의 누>에서 인권(박용우)은 비통함을 잔혹한 복수심으로 메웠다. 그의 영화는 살아남은 자가 그 끔찍한 상실
가을 단풍속에 녹아든 비극과 멜로, <가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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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아침이다. 여자들은 각반을 차듯 종아리에 스타킹을 말아올리고 속눈썹을 곧추세운다. 아직 침대에서 뭉개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키스를 날리고 반짝이는 구두에 발끝을 밀어넣는다. 지금 싱그러운 그녀들은 약 6시간 뒤면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는 자기 최면을 삼세번 중얼거리며 심호흡으로 무너지는 신경을 붙들 것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오프닝 시퀀스는 군장을 꾸리는 병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녀들은 전쟁 중이다. 학보사 편집장 이력서를 품고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앤드리아 삭스(앤 해서웨이)도 그 전장에 끼어들기 위해 면접에 나선다.
<보그> 편집장의 어시스턴트로 일했던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각색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언뜻 듣기에 낸시 마이어스 감독(<왓 위민 원트>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같은 현대 여성 풍속화가의 일감이다. 앤드리아가 도전한 언론계 첫 관문은 세계 패션산업을 쥐락펴락
여자친구끼리 볼 만한 데이트무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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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말고) ‘알트마네스크(Altmanesque) 벽화’라는 것이 있다. 로버트 알트먼(81) 감독의 영화 만드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알트먼의 재기작으로 통하는 <플레이어>(1992)와 <숏컷>(1993)에 이르러 정립된 이 스타일은 가히 ‘배우 하렘’이라 할 만한 대형 앙상블 연기, 에피소드적 서사, 상대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지 않고 겹치는 대사, 변두리를 맴돌다 치명적 행위를 저지르는 주변 인물이 특징이다. 알트먼 감독에게 필요한 재료는 적당한 공간과 배우가 전부다. 인물들은 잉글랜드 저택 파티의 손님이 되기도 하고(<고스포드 파크>), 산부인과 의사와 그의 여인들일 때도 있으며(<닥터 T>), 발레단(<더 컴패니>)이나 콘서트(<내슈빌>), 프레타 포르테 쇼의 참가자들(<패션쇼>)일 때도 있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한 장소에 인간 군상을 몰아넣고 가만히 기다리면 시추에이션은 저절로 ‘돋아난다
알트먼식 앙상블영화, <프레리 홈 컴패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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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배우들이 잔뜩 출연하는 성장영화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자의 능력이나 그들의 앙상블 연기 혹은 탄탄한 시나리오에서 나오는 안정적인 스토리 전개나 매혹적인 화면 구성 같은 것들이 아니다. 연기가 아직 몸에 익지 않았기에 다소 어색할 수는 있지만,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그 단점이 오히려 관습화된 연기로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키면서 날것 그대로의 생동감을 전해줄 때의 쾌감, 바로 그것이 이런 성장영화의 독자적인 매력이라 믿는다. <발레교습소>의 매력과 단점은 이러한 에너지들을 폭발시키며 놀 수 있는 판을 배우들에게 깔아주면서도, 이내 그것을 관습화된 서사 속에 가둬버리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폭력써클>은 이러한 면에서 더욱 아쉬운 작품이다. 영화는 관습화된 캐릭터와 서사 속에 젊은 배우들을 묶어두면서 그 에너지를 폭발시킬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하지 못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몇몇 고등학생이 있다. 육사 진학이
상투적인 폭력장면의 전시, <폭력서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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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실험으로 전세계가 시끄러운 요즘, 뒷북치는 영화가 하나 나왔다. ‘할리우드 최강 액션 스타’ 웨슬리 스나입스가 주연한 핵무기 소재 영화 <페인터>. 제아무리 픽션이 현실보다 스펙터클할 순 없다지만, 이건 뒷북도 너무 뒷북이다. 9시 뉴스 보도와 영화 <페인터>를 비교하면, 그야말로 월드컵 대표팀과 조기축구회의 차이를 실감케 할 정도다. 결과적으로 <페인터>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많고, 킬링타임용 영화로 즐기기엔 너무 엉성한 영화다.
<페인터>의 골칫거리는 크렘린궁에 반감을 갖고 있는 러시아 반군이다. 우두머리 격인 이고르 자이산 장군은 반란군을 이끌고 캄셰프 원자력발전소를 점령해 미국과 주변 국가를 위협할 계획을 세운다. 그의 전략은 북한의 못 쓰는 연료봉을 공급받아 원자로에 장착한 뒤, 핵분열을 일으키는 것. 미국 정부는 연료봉이 장착되기 전 공습을 통해 원자로를 없애려 하지만, 자칫하면 방사능 오염으로 10만
킬링타임용 영화로 즐기기엔 너무 엉성한 영화, <페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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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장커는 준비하던 단편 영화의 촬영 계획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설날이 되어 고향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마주친 고향 샨시성 펀양의 변해가는 풍경과 조짐을 보고 나서 계획을 바꿔 장편 <소무>를 찍었다. 샨시성에서의 촬영 경험은 지아장커의 의식을 과거로 돌렸고, 79년에서 90년까지 문공단의 유랑을 그려낸 <플랫폼>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는 두보의 싯구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던 것과 달리, 디지털 삼인삼색 <공공장소>를 찍기 위해 잠시 들어갔던 따퉁의 사람들과 풍경들을 잊지 못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신문에서 읽은 소년들의 절망적인 영웅극을 머리에 새기며 <임소요>를 찍었다.
지아장커는 착실하게 준비해온 축적물의 완성을 고집하기보다 자신을 가격하는 즉각적인 충동과 시급한 질문의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영화의 궤적을 만들어가는 편이다. 어느 날, 시골에 사는 그의 사촌동생(<플랫폼>에서 탄광촌 노동자로 등장하기도 했던 실
지아장커가 그려내는 베이징의 삶,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