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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택 감독의 신작 <챔피언>과 전작 <친구>의 비극성 해부
2002-07-19

링 위에서 맞아 죽은 (반)영웅의 伸寃說話

80년대를 기억하는가? 영화 속의 삼양라면 봉지로 혹은 포니자동차로 ‘묘사’되는 80년대를 말함이 아니다. 80년대를 ‘서술’하는 시대정신을 말하고자 함이다. 문화사적 80년대는 연대기로 치자면 79년 YH여공 사건부터 91년 유서대필사건까지로 구획된다. 그 시대의 정점에 6월항쟁이 있었고, 그 시대의 마지막은 축포처럼 분신(焚身)이 이어지다 자기분열을 맞았다. 이 13년간 사람들은 길바닥을 전전했고, 시대적 공포와 자기 연민을 내면화하였으며, 극단적인 광장과 밀실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산화하거나 절멸해갔다. 문화사적 섬(island)이라 일컬을 만한 이 13년간을 대표하는 문예사조는 아마도 ‘(과잉된) 리얼리즘, 혹은 비장미학’로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비극의 시대, 모든 것에 목숨을 걸어라

그랬다. 어디나 유장한 비극성이 넘쳐났다. 비단 김정환의 시나, 조정래의 <태백산맥>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조용필의 노래와 공연(기억하는가, 해운대 3만 관객 앞에서 혼자 3시간 동안 노래하던 그 처절한 목소리를)도 그러하였고, 영화 <깊고 푸른밤>이나 <겨울 나그네>도 그러했다. 드라마 <사랑과 야망>도 그러하였고,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도 그러하였다. <가요무대>와 <전국노래자랑>은 노래 하나에도 절절한 사연과 구구한 애환이 서려 있음을 눈물로 웃음으로 보여주었으며, 그러한 비장미에 맞서는 이주일의 코미디 역시 결코 가볍지 않은 혐오로 응수하였다. 어느 것 하나 진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인생을, 목숨을 걸지 않으면 사랑도, 감동도, 웃음도 없었다.

이러한 80년대는 그 이후 부정된다. 92년은 여야로 이합집산한 3김(三金)에 재벌 정주영까지 가세한 대선 정국에서, YS가 마장마술로 대권을 거머쥐는 해이자, 서태지가 출현한 해이고, 마광수 필화사건이 있던 해이다. 그해에 영화 <경마장 가는 길>과 소설 <너에게 나를 보낸다>가 나왔다. 사람들은 맥빠진 후일담으로, 혹은 키치로, 혹은 그 모든 것들이 속물적이라고 의도적으로 경박하게 깐죽거리면서 80년대를 잊고자 하였다.

비장미의 시대를 부정하기 위해, 열정을 냉소로 치환하기 위해 짐짓 애써오다 어느덧 그로부터 10년이 지났고, 우리는 마침내 잊었다. 잊고자 하였다는 것도 잊었다. 이제 경박하고자 애쓰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경쾌해졌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2002년 6월, 이데올로기적 섬으로 고립되어버린 386들이 방구석에 앉아 TV로 시청 앞 광장을 본다. 전설의 ‘붉은 광장’(?)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비장함도 없이 나부끼는 태극기, 아무런 정치적 긴장도 없이 터져나오는 ‘대∼한민국’ 앞에서, 그들은 레드 콤플렉스에 사로잡혀왔다던 전후세대들보다도 더욱 큰 문화사적 혼란에 빠지고 만다. 열광해야 할 것인가, 냉소해야 할 것인가? 왜 우리는 아직도 이따위 고민을 칙칙하게 하고 있나. 왜 저들처럼 쾌도난마(快刀亂麻)로 즐기지 못하고 여전히 강박적인가. 왜 지적(知的) 자아와 성적(性的) 자아 사이에서 여전히 괴로워하는가.

월드컵의 열기 뒷자락에 이어 영화 <챔피언>이 개봉되었다. 곽경택 감독과 유오성 주연. 영화 <친구>의 명실상부한 후속작임을 과시하면서.

중제 : 친구현상 키워드-부산, 386세대, 남자

<친구>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나? <친구>의 경이적인 흥행성적은 그 영화의 내부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내부적으로’ 영화 <친구>는 2인자의 이야기이다. 오랜 친구이면서 2인자였던 장동건이 다른 조직으로 옮겨가서 맞서다가 친구이자 1인자의 칼에 맞아 죽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주제가 ‘의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명백한 오독이다. 조직 때문에 친구를 죽이는 비정함은 사전적 의미의 의리가 아니며, 그런 친구를 감싸주는 것도 의리와 거리가 멀다. 단, 죽는 장동건이 끝까지 건달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며 ‘가우 잡고’ 죽는 장면을 비롯한, ‘의리와 비슷한 마초적 이미지’가 영화 곳곳에 퍼져 있기에 그러한 착시는 의도된 것이라는 혐의가 짙다. 이 영화의 영상미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보다 뛰어나지 않으며, 1인자와 2인자간의 애증적 양가 감정이 치밀하게 그려져 있지도 않다.

그러면 대체 뭔가? 이 영화의 주제인 ‘2인자성’은 기실 영화 바깥에 있다. 이 영화의 중요한 공간적 배경은 전 인구의 4분의 1이 모여 사는 서울, 전 인구의 반이 모여 사는 수도권인 아니라,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이다. 서울 사람들이 서울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에 비해 부산 사람들이 부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특별하다(당연하다. 가령 이성애자가 느끼는 성적 정체성에 비해 동성애자가 느끼는 성적 정체성은 특별하다. 일반성은 스스로를 반성할 필요가 없다. 오직 특수성만이 일반성과의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더구나 DJ정권 이후, 이전에 광주 사람들이 느끼던 소외감이 전이되면서 부산이라는 지역성은 더욱 "특별하게" 인지된다.

친구현상 키워드-부산, 386세대, 남자

또한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80년대이다. 이전 영화에서 유년의 회고담으로 추억되는 시간은 50년대이거나(<아름다운 시절> 등), 60년대였지(<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 그 이후가 아니었다. 이는 문화사적 주체가 전후세대이거나, 4·19세대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80년대를 <박하사탕> <모래시계>에서와 같이 성인으로서 겪은 ‘정치, 사회적 연대기’가 아니라, 청소년기의 ‘사생활의 역사’로 보여주는 시도는 일찍이 없었다. 이 영화의 독특한 시대적 배경은, 80년대를 자신의 연대기로 회고하는 386관객에게 이제 이들 세대가 주류 문화에서 창작의 주체가 되었음을 알리는 징표로 작용하였으며, 영화가 건네는 ‘2인자 정서’는 우리 사회의 2인자 세대인 386관객과 뜨겁게 조우하였다(이 영화 이후에 80년대를 그린 영화 <해적, 디스코 왕이 되다>나 <묻지마 패밀리>가 ‘아류처럼’ 나왔다. 아쉽게도 둘 다 보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 영화는, (여성 관객의 수적 우세를 반영함인지, 아니면 페미니즘의 진척 때문인지는 불확실하지만) 2000년에 개봉된 <공동경비구역 JSA>와 같은 병영영화에서조차도 여성의 역할이 균형있게 다루어지고, 몇해 전 개봉된 <편지>를 필두로 한 일련의 여성취향의 감상적 멜로물들이 넘쳐나던 개봉 당시에, 영화/연극/드라마 등에서 상대적으로 소외감, 또는 박탈감을 느끼던 남성 관객에게 ‘사나이들만이 아는 의협심’을 화두로 던짐으로써, 사나이 가슴에 불을 댕겼고, ‘2인자성’을 극적으로 공명시켰다.

이와 같이 영화 <친구>는 ‘부산’(PK), ‘386세대’, ‘남자’라는 정확한 인구학적 특성을 통하여, 개봉 초부터 무시할 수 없는 수의 확고부동한 관객층을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었고, 이 세 가지 종류의 특수성, 혹은 ‘차이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정체성’은 한데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내었으며, 이러한 외적 요소가 영화 속의 ‘2인자성’이라는 동일 파장을 만나 증폭되고 폭발하였다. 일단 불이 붙으면 그 이후는 연쇄적이다. 이것이 영화 <친구>가 기획한 전략이었고, 나름대로 소외되어 있던 관객의 욕구에 정확하게 부응하였다(‘2인자성’은 정말 좋은 아이템이다. 스스로를 차이로 인식하는 인구군 중 가장 크고 공고한 인구군을 가질 수 있다. <넘버.3>에서는 2, 3위 싸움을 하다, 결국은 모두가 3류는 영리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3위, 혹은 3류는 하나의 독립된 인구군을 형성하기 어렵다).

이처럼 대상 관객의 인구학적 특성을 정확하게 추출해내고, 그들의 욕구에 최적으로 부합하는 전략을 취하여 (작품성과 상관없이) 성공한 사례는 또 있다. <주유소 습격사건>이 그 예이다. 중고생을 표적으로 겨냥한 이 영화는 철저하게 ‘그들’만의 욕망에 부합한다. 이 영화에서 응징되는 악인은 사회악과 관계없이 단지 ‘그들’이 응징하고 싶어하는 대상일 뿐이며(도대체 주유소 사장이 무슨 큰 잘못을 하였나? 또는 스포츠카를 타고 조금 잘난 척한 여자가 무에 그리 악인인가?), 그들 행동에 대한 면죄부 역시 ‘그들’식으로 유치하고, 무책임하게 부여한다(이들의 폭력성은 단지 그들의 폭력 선생이나, 무심한 부모로부터 왔노라고 말하면 그뿐인 방식으로). 이 영화는 오로지 10대를 위한 영화일 뿐이다.

전작의 영화 <친구>는 이처럼 관객을 구획짓는 도구로, 또 영화적 형식미를 담아내는 소품으로 부산을, 80년대를, 그리고 남자들의 세계(?)를 훌륭히 묘사해내고 있다. 사실 이러한 제작상의 노력은 매우 높이 평가할 만하다(왜냐하면 세상에는 영화 <동감>처럼 99년식의 화장과 머리모양을 한 김하늘이 95년식 옷을 입고, 92년식 방에 앉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지금은 1979년이에요” 하며 하늘하늘 이야기하는 영화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79년을 보여주는 것은 10·26 뉴스가 나오던 흑백TV가 유일하다). 그러나 <친구>의 시대성은 단지 ‘모방적 묘사’일 뿐, 그 안을 관통하는 것은 90년대 이후 폭력영화 속에서 (오락적으로) 계속되어왔던 잔혹함과 비정함뿐이다. 8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인 결연한 비장미, 유장한 비극성은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비장미, 혹은 비극성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의하면 비극성이란 ‘공포와 연민’, 또는 ‘공포를 통하여 연민에 도달하기’이다. 그러나 그 많은 폭력영화에는 공포는 있으되 연민이 결여돼 있다. 폭력영화의 주인공은 지나친 야비함 등 관객이 자신과 동일시하기 어려운 속성을 지닌다. 영화 <친구>가 그나마 비극성을 지닌다면, 유년이 묘사되어 있는 주인공과 관객이 향수를 통해 동년배적 정서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길바닥에서 칼맞아죽는 깡패에게서도 일말의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주는 공포는 그보다 훨씬 크다. 이 영화는 어떤 폭력영화보다도 더 큰 섬뜩함을 주는데, 그것은 깡패들의 폭력세계가 그들만의 언더그라운드에 있고, 그 근원을 알 수 없거나 나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자라온 우리의 ‘친구’들이 바로 그 비정한 세계에 속해 있고, 그러한 폭력이 바로 우리 옆에서 일어나고 있으며(학교 패싸움은 차치하고, 장동건이 무려 30번이나 칼을 맞는 장면은 행인이 제법 다니던 길이었다), 온정을 나눈 친구 사이까지도 그 비정함은 예외없이, 깊숙하게 파고든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극의 이유, 비장한 헝그리 정신

이제, 우리 앞에 새로 놓인 <챔피언> 이야기를 해보자. <챔피언>은 다 알다시피 “링 위에서 맞아죽은 김득구” 이야기다. 80년대 어느 시인은 “나는 목이 터져라 감격해서 노래불렀다는 놈들 속에서 진짜 목이 터진 놈은 한 놈도 못 봤다”라고 노래했는데, 이거야말로 죽어라 싸우다 진짜로 죽은 사람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불우했던 한 사나이의 일대기요, <넘버.3>에서 송강호가 역설하던 ‘헝그리 정신’의 화신(“왜 한국 프로권투가 잘 나가다가 요즘 빌빌대는 줄 아나?”)이 시궁창에서 자신을 딛고 세상 한복판으로 올라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팬티 한장 달랑 입고 보란 듯이 매맞아죽은 진짜 실화이다(<친구>도 실화라고 하지만 이렇게 만천하에 고증된 실화가 아니다).

김득구의 인구학적 특성은 무엇인가? 그의 출생과 유년은 2인자가 아니라 최하위자(最下位者)였다. 그는 고성(최북단 마을)의 두 ‘二父之子’ (‘개득구’라고 표현된다)로 국민학교만 겨우 다녔고, 그뒤 무작정 상경하여 앵벌이로, 부랑자로 청소년기를 보내며, 성인이 된 첫 장면이 매혈자였다(부랑의 백과사전격인 김신용의 소설 <고백>을 보면, 이른바 밑바닥 세계에서도 매혈자의 심급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그의 불우함을 설명하는 데 더이상의 극단적인 설정이 있을 수 있는지, 밑바닥에 살아보지 않은 이로서는 그 참담함을 알지 못하겠다(지금껏 한국영화에서 주인공이 다리 밑의 거지 출신이었던 것은 <장군의 아들>과 <취화선>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중 김두환은 제목이 그러하듯 비록 거지일망정 안동 김씨이자, 장군의 아들이었고, 장승업은 신분제 사회의 ‘천민’으로, 현대 산업사회의 ‘거지’보다 비교적 흔한 신분이었다).

그는 최변방 고성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천신만고 끝에 동양 챔피언이 되고, 마침내 라스베이거스에서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는 일생일대 최고의 행운을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제3세계 기층민이 몸뚱이 하나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였던 세계 챔피언의 꿈은 처참하게 무산되며, 그 절정의 자리에서 그의 생도 절멸한다. 우리는 그가 놓일 최후의 자리를 이미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알고 있기에, 그가 그 마지막 영광의 지점을 향해 차곡차곡 올라올 때, 공포와 동시에 연민을 느끼며, 그가 지닌 지역적 최변방성(最邊方性)과 계급적 최하위성(最下位性)과 가정적 최미결성(最未決性)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중심성(最中心性), 최상위성(最上位性), 최완결성(最完決性)과 대비되어 극적 슬픔을 자아낸다.

왜 김득구인가?

그런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최하위성(最下位性)은 차상위성(次上位性)과는 달리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난감한 요인이다. 우리 중 누가 과연 그의 끔찍한 불행을 공감할 수 있는가?(그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주인공은 ‘우리 자신과 닮은 인물’이라야 한다는 신분규정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에는 어찌 보면 관객이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며, 동양 챔피언이 되는 과정이나 사랑을 얻는 과정에 갈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아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피상적인 서사만이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공감의 지점은 바로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이 참혹한 ‘특수성’이, 관장의 입을 통해 교설(敎說)되는 “자기를 이기는 힘”이라는 ‘보편성’을 통과하면서 하나의 ‘개별성’으로 화하는 곳에 있다. 그의 링 위에서의 싸움과 죽음이 비장함을 넘어 숭고함을 지닐 수 있는 것은, 흔히 하는 말로 상대에 대한 불굴의 투지를 발현해서이거나, 대한민국의 영예를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해서가 아니라, “자기와의 처절한 사투”였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와, 또는 날아오는 주먹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맞닥뜨려 있는 비천한 현실의 제조건과 싸우고 있는 것이며, 내재된 절망과 싸우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갈등구조는 피상적이라기보다는 너무도 명료하여 묘사가 불필요한 지경이며,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보편적 지점에서 관객(그가 ‘어떤 일을 하든!’)과의 교우가 가능하다.

이 영화에서 서술되고 있는 ‘링 위에서 맞아죽은 그의 죽음’이 <친구>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길바닥에서 칼맞아죽은 깡패의 죽음과 다른 것은 바로 그러한 ‘초극의 의지’ 때문이요, 삶과 죽음에 대한 명징한 자의식 때문이다. 다만 너무나도 아쉬운 것은 이러한 모든 주제의식이 화면 속에 깊숙이 삼투하고 있지 못하고, 다만 관장의 입을 통해 구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주제의 내레이터로서 무게가 실려야 하는 관장의 역할이 그에 상응하는 카리스마를 풍겨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감독이자 작가인 이가 무슨 마음으로, 혹은 뜬금없이 20년 전에 죽은 이토록 비극적인 김득구 이야기를 꺼내는 가이다. 왜 그를 신원(伸寃)하고자 하는가. <친구>를 통해 80년대를 사적 연대기로 집어낸 그가, 풍경으로서의 80년대가 아닌, 80년대 시대정신의 결정판인 ‘유장한 비장미가 흐르는 과잉된 리얼리즘’의 정수를 맛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는 정말 80년대에는 생생한 실화였던 김득구 이야기를 2000년대에 복원시켜놓으면 고답적 판타지로 변질된다는 역사적 진실을 전혀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그 판타지를 즐기고 싶었던 것일까?

울어라 그대, 80년대를

영화 <챔피언>은 전작의 ‘부담스러운’ 흥행과 ‘스포츠 영웅담 실화’가 범람하는 월드컵 열기의 아우라 속에서 개봉되었다. 어쩌면 이 후광은 초기 홍보효과로는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후광은 관객이 정작 이 영화 자체에 몰입하는 것은 저해하게 마련인데,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 영화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비극왕 김득구의 재림’ 이상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전작을 뛰어넘는 장치적 묘미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몰입하더라도 이 이상을 얻을 것은 없다.

다만 전형적 ‘모방 비극’이 지니는 최대의 기능인 ‘카타르시스’를 차고 넘치게 주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보다보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난다. 고도로 절제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아니라, <성웅 이순신>이나 <단종애사>에 가깝다. 도무지 절제가 없는 과잉의 카타르시스이다. 울자고 만든 영화, 잘 울면 그만이다. 그런데 한참을 울다보면, “어째서 종생토록 우리의 그 모든 이야기는 무용담이냐”는 비장한 시구가 떠오른다.황진미/ 영화 칼럼니스트ㆍ임상병리 전문의 chingmee@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