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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회 칸의 한국영화들, 열띤 취재공세
2002-05-31

영화에 취하거나, 죽어도 좋거나

칸영화제가 열리는 칸 비치 일대에는 고급스런 호텔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마제스틱이라는 호텔은 역대로 경쟁부문에 초청된 감독과 배우들이 3박4일 동안 묵는 곳이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가 호텔 로비를 기웃거리다보면, 이브닝 드레스와 턱시도로 치장한 영화인들과 심심찮게 부딪힌다. 그런가 하면, 이 호텔의 바로 뒤편에는 프티 마제스틱이라는 호프가 있다. 이곳은 마제스틱 호텔에 묵을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이들, 즉 경쟁부문 진출이라는 화려한 훈장을 달지 못한 영화제의 ‘아웃사이더’ 혹은 ‘앵그리 영맨’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의미에서 그 이름을 ‘프티 마제스틱’이라 붙였다는데, 그런 갸륵한 작명의 유래 때문에 칸의 명소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프티 마제스틱 일대의 하루 평균 유동 인구는 무려 1천명. 올해의 풍경도 다르지 않다. 매일 밤 심야 상영과 각종 파티가 끝나는 자정 무렵부터 각지의 영화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거나 못다한 ‘업무’를 보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바 앞 도로까지 점거하고 선 채로 밤새 맥주를 들면서 말이다.

한국을 주시하라- <취화선> <죽어도 좋아>

마제스틱과 프티 마제스틱. 칸영화제의 두 얼굴 속에서 올해의 한국을 만날 수 있다. 19일 칸에 여장을 푼 <취화선> 팀이 ‘공식’ 일정에 쫓기고 ‘격식’을 차려야 하는 ‘마제스틱’ 일파라면(경쟁부문 진출팀은 몇해 전부터 마제스틱과 마르테니즈에 나눠 묵고 있고, <취화선> 팀의 숙소는 마르티네즈다), 비평가 주간에 초대된 <죽어도 좋아> 팀과 시네파운데이션의 단편 감독팀은 비교적 자유롭고 분방한 ‘프티 마제스틱’파다. 이런 구분은 어쩌면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올 칸영화제에 모인 많은 이들이 한국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 경쟁부문과 비공식부문에 고루 작품을 내놓은 한국영화는 이곳의 각 언론들의 주요 관심사로 다뤄지고 있으며, 한국영화 마켓부스들은 구체적인 조건을 들고 찾아온 세계 각국의 필름 비지니스맨들로 붐볐다.

칸 비치를 거닐다보면, 영화제의 공식 포스터와 부문별 포스터 사이로, 지붕 위에 올라가 술을 마시는 최민식씨의 모습을 담은 <취화선>의 대형 포스터를 발견하게 된다. “그림과 여자에 취한”이라는 뜻의 불어로 부제가 붙은 <취화선>은 22편의 경쟁부문 진출작 중에서 가장 마지막인 22번째로 상영된다. 기자시사는 5월24일에, 공식시사는 25일에 예정돼 있어서, 23일 현재 아직 작품에 대한 이렇다 할 반응은 접수된 바 없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은 23일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서서히 프랑스 현지 언론과 만남을 가졌다. 한편 <취화선>은 공식시사 이전에 이미 프리세일에 성공했다. 프랑스 최대 규모의 배급사인 파테에 프랑스 판권을 넘긴 것. 계약 규모는 14만유로 정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평가 주간에 초청된 <죽어도 좋아>는 이미 6회에 걸친 영화제 상영과 1회의 마켓 상영을 마친 상태. 데뷔작에 주어지는 황금카메라상 수상 후보에 올라 있는 이 영화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이다. <버라이어티>의 칸영화제 특별판이 올 출품작의 경향을 짚는 프리뷰 기사에서 ‘충격적인 영화’(shock movie)라고 소개하는 등 적잖은 파장을 예고했던 이 작품에 가장 먼저 자발적이고도 열렬한 지지를 보낸 매체는 <리베라시옹>으로, 문화면의 머릿기사로 2/3페이지 정도를 할애해 <죽어도 좋아>의 리뷰를 실었다. 또한 프랑스 TV의 국영 채널 는 올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감독 중 하나로 박진표 감독을 지목, 긴 인터뷰를 녹화방영하기도 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 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박진표 감독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노인의 성과 사랑이라는 소재 때문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관객 대부분이 영화에 정서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 <죽어도 좋아>의 해외 세일즈를 맡고 있는 미로비젼의 설명이다. 관객 반응은 연령대별로 크게 달라서, 노년 관객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반면, 청장년층은 웃고 즐기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 유럽과 일본, 홍콩 등지에서 이 영화의 수입 여부를 타진하며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심의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요소가 있어, 아직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새로운 프론티어로서의 한국영화

마틴 스코시즈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심사위원으로 있는 학생단편 경쟁부문 시네파운데이션에는 올해 총 16편이 선보이고 있는데, 그중 3편이 한국감독의 작품이다. 호주 작품이 2편이고, 나머지 국가 대표는 모두 1편씩이라는 사실을 두고 보면, 학생작품 부문에서도 한국의 강세를 읽을 수 있다. 단국대 박성진 감독의 <허니문>, 영상원 강병화 감독의 <초겨울 점심>, 미국 뉴욕대 박진오 감독(<죽어도 좋아>의 박진표 감독이 친형이다)의 <리퀘스트>로, 이들 작품은 23일과 24일에 걸쳐 1회씩 상영된다. 이 밖에 감독 주간에는 미국에서 활동중인 손수범 감독의 단편 <물고기는 목마르지 않다>가 초청상영됐다.

칸에는 영화제 상영뿐 아니라 마켓 상영을 위해 물 건너온 한국영화들도 꽤 많다. 이즈음 한국영화가 국내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에 올랐기 때문인지, 영화제 기간 동안 각 영화제와 영화사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곤 했다. 칸에서 만난 토론토영화제의 아시아영화 프로그래머 지오반나 펄비는 오는 9월에 열리는 토론토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특별전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낙타>와 <나쁜 남자>를 비롯한 15편가량의 한국영화를 신작 중심으로 소개한다는 구상. 지오반나 펄비에 따르면, “지금 여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올 토론토영화제의 컨셉에 “새로운 프론티어로서의 한국영화”가 잘 들어맞는다는 것. “이즈음의 한국영화계에는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의 영화들이 동시다발로 쏟아져 나오고 있고, 또 새로운 작가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으며, 완성도가 높으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들로 충만하다.” 토론토뿐 아니라 토리노영화제에서도 김기덕 감독 특별전이나 한국영화 특별전을 기획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영화산업쪽은 더 유난하다. <버라이어티> <스크린> <무빙 픽처스> 등에서 펴내는 영화제 데일리에 한국 작품 리뷰가 충실히 실린 것은 물론, 산업 뉴스까지 매일 비중있게 다뤄졌다. <스크린> 데일리는 칸영화제 공식 상영과 마켓 상영을 통해 소개되는 올해의 다양한 한국영화들을 통해 ‘대안적인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비교적 상업성이 덜한 <집으로…>나 <나쁜 남자> <생활의 발견> 등이 한국영화 시장에서 선전했고, 또 저예산영화 <죽어도 좋아>와 단편 <허니문> <초겨울 점심> 등이 영화제에 초청된 사실을 근거로 들고 있다. <칸 마켓 뉴스> 데일리도 ‘영화산업의 헤비급 플레이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영화계를 집중 소개하는 피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 기사에서는 <쉬리>로부터 <집으로…>로 이어진 최근 한국영화 흥행 열풍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호러, 무협, 갱스터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배출해 할리우드와 홍콩영화의 틈새를 집중 공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양이를 부탁해> <공공의 적> 등 수출실적도 좋아

실제로 마켓에 부스를 차린 5개 영화사의 판매실적이 만만치 않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마켓에서는 운을 띄우고 다음 시즌을 기약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올해는 바이어들간에 경쟁이 치열해져 협상과 계약 진행에 가속이 붙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시네마서비스는 영화제 기간 동안 <고양이를 부탁해>를 영국의 갈라필름과 미국의 키노인터내셔널에, <화산고>를 프랑스와 이스라엘에 각각 팔았다. 타이에는 <공공의 적>을 비롯한 6편의 최근작을 한번에 팔았다. 시네마서비스의 영화들 중에서 마켓시사 반응이 가장 좋았던 작품은 <피도 눈물도 없이>로, 가이 리치와 쿠엔틴 타란티노풍의 영화를 좋아하는 유럽의 영화사들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또한 <생활의 발견>에는 일본쪽에서 호감을 보이고 있고,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도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려줄 것 같다고 한다.

미로비전의 <죽어도 좋아>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지역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중국 감독 류빙지엔이 연출하고 한국에서 제작한 <크라이 우먼>은 미국을 비롯, 유럽과 아시아 등지에서 경쟁적으로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배급한 바 있는 프랑스의 ASC는 <생활의 발견>을 제외한 홍상수 감독의 전작 3편을 일괄 구매했다. 이 밖에 <원더풀 데이즈>는 현재 미국의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어, ‘큰 계약’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클래식> <청풍명월> <스턴트맨> <하나에>의 프리세일 가능성 또한 높다는 것이 미로비전의 설명이다.

시네클릭 아시아는 최근 한국 내에서 개봉한 코미디 작품들과 현재 제작 진행중인 프로젝트를 들고왔다. 이중에서 가장 먼저 바이어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던 프로젝트는 <챔피언>으로, 미라맥스 등의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도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 <일단 뛰어>가 홍콩의 팀웍모션스픽쳐스에, <아이언 팜>과 <울랄라 씨스터즈>가 홍콩의 블루스톤에 팔렸다. 홍콩의 차이나스타는 <달마야 놀자> <조폭 마누라> <와니와 준하> 등의 중국 대륙 판권을 샀다. 한편 CJ엔터테인먼트는 <집으로…>의 영어권 국가배급권을 파라마운트 클래식에 판매한 데 이어, <복수는 나의 것> 도 시사 반응이 좋아, 현재 조건이 맞는 상대를 찾고 있는 중이다.

올해 처음 칸에 부스를 차린 E픽쳐스의 성과도 크다. <후아유> <욕망> <낙타들>과 지아장커의 신작을 들고온 E픽쳐스는 “기대한 것만큼”의 성과를 올렸다고 자평했다. 우선 <후아유>는 한국 젊은이들의 문화와 감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권 영화사들의 관심을 모았는데, 타이와 베트남과는 계약을 마친 상태고 홍콩과 일본, 대만 등지와도 협상중이다. 칸 마켓시사가 ‘월드 프리미어’가 된 <욕망>은 유럽과 아시아, 특히 영화제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다. 토리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초청을 받았지만, 베니스와 로카르노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 결정을 미뤄둔 상태다. <질투는 나의 힘>도 산 세바스찬, 베니스 등 영화제에서 호감을 표시하는 작품. <왕조의 눈> <아리랑> 등 프리세일즈 품목으로 들고온 작품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라고, E픽쳐스는 전했다.

영화제는 늘 거장 확보만큼 신예 발굴에도 목말라한다. 최근 2,3년간 이들에게 한국영화는 가장 각광받는 뉴페이스였지만, 지난해엔 부문을 막론하고 단 하나의 장편 한국영화도 오지 않았다. 올해 칸의 한국영화인들은 이들의 깊어진 갈증에 화답하느라, 해변의 정취도 잊은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칸=글 박은영 cinpark@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취재지원 성지혜

사진설명

1. 칸 경쟁부문에 진출한 <취화선>팀. 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배우 안성기와 최민식, 임권택 감독, 이태원 사장, 정성일 촬영감독

2. 경쟁부문에 초청된 감독과 배우들이 묵는 마제스틱 호텔

3. 칸으로 간 단편영화 감독들. 박진오, 박성진, 강병화 감독.

4. 각국의 영화판매를 위한 부스가 모여있다. 씨네클릭 아시아는 <챔피언><일단뛰어><아이언 팜> 등의 작품들을 판매한다. CJ엔터테인먼트는 <집으로..>의 영어권 국가 배급권을 파라마운트 클래식에 판매했다.

5. 레드 카펫을 오르는 배우들과 감독들을 보기 위해 몰려나온 관객

▶ 제55회 칸의 한국영화들, 열띤 취재공세

▶ 전세계 주요 언론들의 경쟁부문 상영작들에 대한 별점

▶ <죽어도 좋아> 리뷰 - 올리비에 세그레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1)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2)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