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2)
2002-06-07

내년엔 당신의 영화를 보고싶다, 이곳에서

<펀치 드렁크 러브>, 알차구나, 폴 토머스 앤더슨!

폴 토머스 앤더슨은 2년 전 베를린에서 <매그놀리아>로 찾아왔을 때 다음 영화는 아주 짧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설마, 라고 그냥 웃었다. 왜냐하면 <부기 나이트>를 만들고 난 다음에도 그런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칸에 온 <펀치 드렁크 러브>(Punch-drunk love, 경쟁부문)는 정말 짧고 간결하다. 91분 동안 주인공 브라이언 이건(애덤 샌들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사랑을 찾아 말 그대로 일직선으로 달려간다. 일곱 자매에 둘러싸여 그녀들의 간섭과 잔소리와 과잉보호 속에 브라이언 이건은 연애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시간만 보낸다. 그 자신도 어찌할 줄을 몰라 그저 속만 태우면서 고민 끝에 폰섹스 전화를 걸기도 한다. 그러나 불러준 신용카드 번호가 문제를 일으키고, ‘삐끼’(!)들이 찾아와 괴롭힌다. 브라이언은 괴로울 따름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앞에 이상한 영국여인 레나(에밀리 왓슨)가 나타난다. 브라이언은 모든 수모를 이겨내고 마침내 그녀를 향한 고백에 성공한다.

로맨티스즘? 물론이다. 해피엔딩? 두말하면 잔소리. 할리우드 스타일? 그럼. 하지만 넌 폴 토머스 앤더슨이잖아! 아, 그게 문제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는 <매그놀리아>의 마지막 개구리 우박장면처럼 기겁할 만한 예언자적인 비전이 없다.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형이상학적인 알레고리에 이르려는 화해할 수 없는 불안의 의식이 있다. 또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안에서 화해를 찾으려는 위기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아니면 <부기 나이트>의 마지막 15분의 시퀀스처럼 드라마의 덫에 걸려든 인간군상의 지옥과도 같은 그 절망의 추락 속에서 결국 마주칠 수밖에 없는 비극을 거의 고전극처럼 끌어올리는 순간이 없다. 그러나 <펀치 드렁크 러브>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새로운 걸작이다. 조용한 아침에 브라이언의 눈앞에서 갑자기 전속력으로 달려가다가 뒤집혀 박살나는 자동차 전복으로 시작하자마자 마지막 장면까지 그냥 말 그대로 한 호흡에 끝낸다. 그 순간 헉(!) 하고 들이마신 숨을 다시 내쉬는 것은 무려 91분 만에 브라이언이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니 영화가 더 길면 관객은 펀치 드렁크 현상에 빠질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자유자재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고, 카메라와 음악의 이중주는 레이브 파티에 온 것 같으며, 하와이에서의 연애장면에 이르러 그림자 놀이와도 같은 엑스트라들의 이동은 50년대 빈센트 미넬리 영화의 재현이다. 아마도 지금 이만큼 영화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마틴 스코시즈 정도일 것이다. 또는 이 영화는 2002년의 (하워드 혹스의) <그의 소녀, 프라이데이>이다. 시종일관 쿵쿵거리는 비트와 달콤한 발라드풍의 연주, 그리고 코믹한 선율 이 세 가지 음악을 변주하면서 달려가는 숏들의 간결함과 동화 같은 시추에이션, 그리고 애덤 샌들러의 생애의 명연과 에밀리 왓슨이 아니면 해낼 수 없을 그 불가사의한 미소는 누구라도 마지막 순간 웃게 만든다. 소품이지만, 이 영화가 갖춘 유머와 센스는 단숨에 그의 동세대의 누구라도 따돌릴 만한 것이다. 아, 알차구나, 토머스 앤더슨! (장나라 버전)

고다르의 <옛 장소>, 우주를 다시 사색하기

칸은 소비의 가속도가 질주하는 장소이다. 여기서는 한편의 영화가 끝나면 다음 영화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다. 종종 그런 이유로 본 영화는 볼 영화들과 서로 겹치거나 장면들은 뒤섞인다. 그걸 불러 멈춰 세우면서, 예술에 관한 애도의 시간을 마련한 장 뤽 고다르의 <옛 장소>는 여전히 보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이 영화는 뉴욕현대미술박물관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예술과 역사 속에서의 그 장소”라는 테마를 갖고 만들어진 40분 분량의 비디오 콜라주이다. 그러나 그 물리적인 시간은 고다르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고다르의 이미지를 보는 순간은 우리에게 무한정한 길이의 명상이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여기서 <영화의 역사-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인용과 수많은 이미지들을 골라내서 다시 연결한다. 앙리 베르그송과 도스토예프스키와 모리스 블랑쇼, 니체의 문장들 또는 베토벤과 쇼스타코비치, 그리고 현대음악들의 선율들이 우리를 이끄는 곳에서 고다르는 세상의 질서를 다시 돌아보고 그 안에서 다시 우주를 만든다. 고다르의 우주, 그렇다. 그는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생각하는 윤곽을 다시 구성한다. 그는 이미 <그녀에 관해 알고 있는 두세가지의 것들>에서 어느 오후 카페에 앉아 시켜놓은 커피잔 속에서 데카르트의 우주를 발견하는 것처럼 여기서는 사진의 기억 안에서, 지나가버린 필름의 기록 안에서, 역사의 질서를 본다. 인상적인 장면. 여기는 칸이다. 그리고 올해 칸는 샤론 스톤을 심사위원으로 초대하였다. 그 샤론 스톤이 칸의 붉은 크로와제트를 밟는 순간 영화팬들이 환호하는 장면이 나치의 히틀러에 열광하는 독일인들과 서로 교차된다. 또는 월드컵을 보여주면서 고다르는 탄식한다. “지금 월드컵을 보는 사람은 백만에 백만을 곱한 숫자이다. 그러나 <햄릿>을 최초로 본 사람은 1800명이다.”

고다르는 예술의 시대가 떠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이제 더이상 옛 장소는 남아 있지 않다. 그 장소는 오직 지나간 시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장소에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곳은 어디인가? 우리에게 남겨진 예술들을 통해서이다. 고다르는 우리에게 애도가 예술의 몫임을 여기서 일깨워준다.

<곡(哭)하는 여자>, 현실에 낀 애매한 중국인들

이상하게도 잘 이야기되지 않는 류빙지안은 중국영화의 새로운 이름으로 기억해둘 만하다. 그가 처음 발견된 곳은 로카르노영화제에서였는데, 그때 거기서 만난 <남남녀녀>는 중국 퀴어영화의 새로운 전망이라는 평가를 얻어냈다. 류빙지안은 중국의 근대화와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나가는 새로운 세대의 풍속을 담는 데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3년 만에 만나는 그의 세 번째 영화 <곡(哭)하는 여자>(哭粒的女人, Ku qi de nu ren, 주목할 만한 시선)는 중국의 새로운 풍속과 함께 그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전통의 풍경 안으로 들어간다.

왕구이시앙은 베이징에서의 오늘을 바닥에서 살아가는 젊은 여자이다. 그녀는 남편이 있지만 다른 남자와 종종 불륜의 섹스를 나누고, 천안문 앞에서 불법 DVD와 포르노를 팔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때로는 거칠고 팔짱을 걷어붙이고 벌이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옆집에서 아이를 보아달라는 부탁을 거절 못해서 애를 업고 천안문으로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백수건달 남편은 마작을 하다가 싸움이 벌어져서 그만 상대의 한쪽 눈을 장님으로 만들고, 게다가 옆집 부부는 아이를 맡긴 채 다른 데로 이사가버린다. 남편은 감옥에 가고, 남의 집 아이는 울고 왕구이시앙은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어디 그뿐인가. 남편 때문에 한쪽 눈이 먼 남자와 그의 아내가 찾아와 합의금을 주지 않으면 크게 다칠 줄 알라고 협박까지 한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여자에게 그녀의 불륜 상대인 애인은 당신이 우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니 제삿집에 가서 대신 곡을 하는 일을 해보라는 기상천외한 제안을 한다. 먹고살자고 시작한 곡하는 일은 소문이 나서 날로 번창하고, 그녀는 남의 제삿집에 가서 돈 버는 일에 신이 난다. 그러나 결국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감옥에서 그녀의 남편이 탈옥했다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그녀는 남의 제삿집에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한다.

시종일관 유머에 찬 이 영화를 이끌고 가는 것은 능청맞은 왕구이시앙의 수다와 자칫 구태의연해질 수 있는 이야기의 구조를 피해가는 류빙지안의 솜씨이다. 왕구이시앙을 연기하는 리아오친은 베이징 경극배우인 그녀의 곡하는 솜씨(!)를 뽐내면서 화면을 끌어가고, 그녀를 중심으로 류빙지안은 전통 안에서 모든 것이 돈이 되어가고 불륜이 판을 치며, 그러면서도 결국 나쁜 관습을 버리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국인들의 저 애매한 세대들의 풍속도를 펼친다. 류빙지안은 베이징전영학원을 나왔지만, 그는 그 어떤 세대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 <남남녀녀>는 중국 당국에서 상영이 금지되었고, 이번 영화도 역시 시나리오가 검열에서 불합격되었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결국 바깥을 떠돌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영화는 캐나다와 한국의 미로비전이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새로운 글로벌 시대의 한국영화?

<스위트 16>, 여전한 켄 로치의 진정성

켄 로치는 보는 사람을 움직인다. 또는 나는 아직도(그리고 앞으로도) 켄 로치의 팬클럽을 탈퇴할 생각이 없다. 그의 <스위트 16>(Sweet Sixteen, 경쟁부문)은 <나의 이름은 조>에 이어지는(켄 로치의 말에 의하면) 글래스고 삼부작 중 두 번째 영화이다. 글래스고 출신의 작가인 폴 래버티와 함께 작업한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성장영화이지만, 동시에 복지사회국가에서조차 버림받은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리프-래프>의 시절로 돌아왔고(브릿 팝 그룹 오아시스가 뽑은 최고의 영국영화), 또는 주제의 면에서는 <케스>(켄 로치의 최고 걸작)와 겹친다. 중요한 점. <스위트 16>은 여전히 켄 로치의 세계관이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영화이며, 더 나아가 그 안에서 희망을 갖기 위해 거의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따뜻한 마음이 결코 감상주의나 도그마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를 응원하는 영화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영어권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사투리 억양 때문에) 영어자막이 따로 나온다.

소년 리암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서 산다. 그는 학교 공부는 집어치운 지 오래이고, 게다가 말썽꾸러기이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그가 16살이 되는 생일날 엄마가 감옥에서 출소하는 것이다. 그는 정말 못마땅한 엄마의 젊은 애인과 엄마를 면회하기도 하지만, 출소하면 가족들이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돈벌이에 나선다. 마침내 마약에도 손을 대고, 그러자 동네 깡패들은 돈을 빌려주면서 자기 구역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니까 우리 말을 잘 들어라’는 위협도 한다. 리암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한다. 그건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가족들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어머니가 출소하는 날, 리암은 가족들과 모여 생일파티를 한다. 그러나 다음날 엄마는 젊은 애인의 집에 가버렸고, 가족들과 함께 사는 자기의 꿈은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리암은 아침 새벽에 바닷가에 사서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때 전화가 걸려온다. “16살 생일을 축하한다.” 하지만 리암은 그냥 그렇게 서 있는다. 리암은 17살 생일을 맞을 때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이건 정말 끔찍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관점에 따라서) <블루 벨벳>같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켄 로치는 그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결코 교활하게 글래스고의 서브 컬처를 말하는 척하면서 십대 스펙터클을 펼치는 <트레인스포팅> 같은 역겨운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나는 <트레인스포팅>이 정말 싫다). 그의 관심은 리암의 악전고투이다. 리암의 잘못은 그가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잘못된 선택을 할 때, 그의 엄마도, 그의 누이도, 그의 가장 친한 친구조차 모두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 리암은 되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든다. 그렇기 때문에 리암이 가족을 얻으려는 따뜻한 마음씨를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주려는 켄 로치의 일관된 입장은 그가 마약 딜러가 될 때까지 추락하더라도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싶어한다. 켄 로치가 별다른 영화적 기교를 활용하거나, 새로운 미학을 담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를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여기서 밑바닥 세상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을 ‘하여튼’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당연한 이야기를, 한치의 흔들림 없이, 매번, 그리고 더욱 확신을 갖고 해내는 시네아스트는 지금 켄 로치밖에 없다. 다시 한번 일보전진!

추신: 리암 역의 마틴 컴스톤은 이구동성으로 올해 칸이 발견한 배우이다. 올해 18살의 리암 스톤은 단 한번의 연기경험도 없는 축구선수이다. 켄 로치는 그를 오디션 없이 뽑았으며, 그가 보여주는 리얼리티는 압도적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 김홍준 선배와 내가 (심심풀이로 뽑은) 올해의 남우주연상.

과 <러시아 방주> 디지털영화의 양가적 비전

디지털은 정말 희망이 있는 것일까? 결국 영화가 디지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1927년 사운드가 처음 영화를 찾아왔을 때처럼 어리둥절해 있는 중이다. 디지털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정반대의 방식으로 물어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과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는 결국 새로운 영화는 이제 이야기나 주제나 인물이나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개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바람이 우리를 실어가리라> ‘이후’ 경쟁부문에는 오지 않겠다는 생각을 왜 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12번째 극영화 (Ten, 경쟁부문)은 말 그대로 원맨밴드 시네마다. 또는 인터뷰에서 한 키아로스타미의 말을 빌리면 “나의 두 번째 데뷔작”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여기서 ‘직업’ 소형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시나리오, 연출, 촬영, 조명, 녹음, 편집까지 일체를 혼자서(!) 해결한다. 그래서 일부 장면의 녹음은 주변의 소음 때문에 ‘씹힌 채’ 잘 안 들린다. 영화는 숫자 10을 보여주는 자막을 시작으로 12분에 이르는 기나긴 롱테이크로 시작한다. 차에 올라탄 아이는 옆에 앉은 엄마에게 항의한다(그런데 이 장면이 끝날 때까지 엄마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자기가 왜 이혼한 엄마와 살지 않으며, 새엄마가 더 좋은 점이 무엇이며, 아빠랑 같이 살지 않는 엄마가 싫다고 시종일관 궁시렁거린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모두 10개의 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그러나 10개의 숏은 아니다), 카메라는 단 한번도 차에서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아들과 여섯 명의 여자를 번갈아 태우면서 그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서(이 영화는 모두 동시녹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로덕션 노트를 보면 엔지 없이 모두 단 한번의 촬영으로 끝냈다고 한다) 이란에서 여자들이 살아가는 불평등과 억압, 그리고 좌절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불안, 무엇보다도 왜 이란에서 여자는 독립할 수 없는지를 그녀들의 입을 통해서 듣는다. 마지막 에피소드 1. 길을 사이에 두고 이혼한 남편과 저녁에 몇시까지 아들을 데려다주어야 하는지를 물어보며 끝내 길을 건너가지 않으면서, 서로 반대의 방향에 차를 대놓고 서서,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이야기를 끝내면서 영화는 결코 새로운 삶을 위해서 타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하면서 끝난다. 그러면 이 영화의 유일한 음악인 하워드 브레이크의 노래 <공기 속의 산책>이 흘러나오며 끝난다.

문제는 간단하다. 옳은 이야기이며, 세계관도 동의할 수 있다. 자기의 주제를 붙드는 개념은 효과적이고, 형식적으로도 일관성이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여기서도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백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알고 있으며,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뿌리로 다시 돌아온 영화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개념과 형식만이 있다. 간결하기보다는 단순하고, 분명하기보다는 뻔하다. 물론 이 영화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아무도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뤼미에르의 시대에로 다시 돌아온 듯한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시작하는 두 번째 세기의 영화가 나를 이상하게 쓸쓸하게 만든다.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Russki kovcheg, 경쟁부문)는 그 반대의 영화이다. HD 디지털 카메라로 작업한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은 1시간36분 동안 단 한컷의 롱테이크영화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아날로그 시대의 첫 번째 원컷영화가(뤼미에르 형제의 단편 무성영화를 제외하면) 앨프리드 히치콕의 <로프>라면 디지털 시대의 첫 번째 원컷영화는 소쿠로프가 차지한 것이다. 점점 더 소쿠로프의 영화가 이야기를 잃어가는 것처럼 이 영화에는 이야기가 없다. 페테스부르크의 겨울궁전을 무대로 이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18세기 러시아에 온 프랑스 외교관 마르키즈 드 퀴스틴의 안내에 따라 홀린 듯이 돌아다닌다. 그리고 스테디캠을 장착한 카메라는 35개의 서로 다른 방을 돌아다니면서 897명의 연기자들과 500명의 단역들이 이야기하고 춤추는 무대를 공기 속을 유영하듯이 부유한다. 소쿠로프의 연출 플랜도 놀랍지만, 이 영화를 촬영한 틸만 부트너의 미학적 완성도는 탄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소쿠로프는 틸만 부트너가 촬영한 (톰 티그베어의) <롤라 런>을 보고 만나서 이 작품을 함께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마지막 자막을 따라가면 조감독 22명, 촬영 16명, 조명에 48명의 이름과 함께 조명 이동에 21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들은 18세기의 풍속을 거의 완전하게 재현한다, 그리고 그 안을 돌아다니는 이 놀라운 한 테이크의 영화는 디지털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놀라움 뒤를 자리잡는 것은 의심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어쩌면 알렉산더 소쿠로프는 우리 시대의 레니 리펜슈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리펜슈탈의 저 매혹적인 스펙터클의 이미지들. 또는 파시즘에의 열광. 소쿠로프는 점점 더 이상한 대상을 선택하고, 그 대상을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을 통해 물신화시킨다. 그는 <몰로흐>에서 히틀러를 받들고, <타우리스>에서는 스탈린을 다시 끌어들인다. 그리고 여기서는 18세기 귀족들의 삶을 찬양한다. 그에게서 볼셰비키의 그 어떤 역사적 흔적도 증발해버린 지 오래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페테스부르크는 어떤 곳인가? 그 이름은 레닌그라드였다.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도시. 지구상에서 최초의 노동자국가의 탄생을 알린 도시. 소쿠로프는 그걸 잊고 싶어한다. 그리고 귀족들의 삶, 그들의 더없이 아름다운 세계, 낭만주의 음악, 매너리즘의 그림들, 겨울 궁전의 눈 덮인 아름다운 풍경들, 소쿠로프의 주인공 마르키즈는 그것들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쉬워서 탄식한다. 그 슬픔을 달래듯 멀리서 아련하게 들리는 피아노 선율은 쇼팽의 마주르카이다. 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은 슬픔이다. HD 디지털 카메라의 방주에 몸을 싣고 타임머신처럼 오가던 그 여행길은 귀족들의 파티와 함께 끝난다. 나는 키아로스타미 영화와는 반대의 이유로,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마음으로, 디지털영화의 이러한 미래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1)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2)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