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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진실의 반동을 붙잡는다는 것, <노 베어스>
김예솔비 2024-01-11

카메라는 북적거리는 한 시장 거리를 천천히 가로지른다. 수레를 끄는 상인과 거리의 악사를 따라가다가, 불현듯 한 술집 앞에 멈춰 선 카메라는 한 여성에게 이끌리듯 다가간다. 자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은 남편 밥티아르와 함께 튀르키예를 떠나 유럽으로 망명을 가려 한다. 그녀를 찾아온 밥티아르는 자라에게 프랑스 여자가 분실한 여권을 건넨다. 하지만 밥티아르 없이 홀로 국경을 건너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라는 화를 내며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이윽고 카메라가 천천히 뒤로 빠져나오면 원격 촬영을 지시하고 있는 자파르 파나히의 노트북 화면이 나타난다. 화면은 순식간에 국경을 가로지르는 동시에 픽션의 밀실을 깨뜨리고 픽션과 자전적 다큐멘터리가 뒤섞인 낯선 시공간에 도착한다. 그와 동시에 인터넷 연결이 끊어진다. 화면에 남은 것은 촬영장 밖으로 튕겨나온 채 인터넷 신호를 잡기 위해 애쓰는 영화감독 파나히의 적적해 보이는 모습이다.

이란 정부로부터 출국 금지령을 받은 파나히는 튀르키예와 이란 국경 근처의 작은 마을 자반에 머물며 원격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이것은 영화의 설정일 뿐 아니라 실제로 파나히가 처한 고립의 상황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계속해서 현실과 엉킨다. 그가 방을 얻어 지내고 있는 집주인 간바르는 정중하지만, 별다른 연고 없이 국경 지대에 찾아온 외지인을 어딘가 적대하는 듯하다. 간바르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파나히를 향해 어렴풋한 반동을 보인다. 파나히는 국경을 넘어오라는 조감독 레자의 말을 듣고 밀수꾼의 도로를 따라 국경 가까이 차를 몰고 간다. 그러나 자신이 국경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안 파나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을 친다. 그는 왜 경계선을 건너지 못할까. 그러면서도 왜 여전히 국경 지대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걸까. 파나히는 촬영지에 가까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단지 그뿐인 걸까. 사실상 출국이 금지된 파나히가 국경을 밟고 있던 장면은 그가 처한 실제 현실의 위험이 날카롭게 침범하는 순간이다. 그가 현실에서 국경을 넘을 수 없다는 상황은 화면에 무의식적인 공포의 리액션을 드리운다. 영화는 현실과 영화,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넘나들며 그 사이의 지대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경계가 노출될 때마다 예민하게 동요한다. 영화가 요동칠 때마다 두드러지는 것은 현실을 탄압하고 있는 권력의 존재감이다.

진실을 포착할 수 없다는 영화의 무력함

파나히 자신의 이야기면서 영화 속 영화이기도 한 동시에 영화라는 활동에 대한 자기 반영적 픽션이기도 한 <노 베어스>의 중첩적인 속성은 파나히를 비롯해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이란영화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경계가 드러나며 영화에 파열을 일으키는 순간, 영화는 그러한 반동을 기록하는 매체라는 듯. 영화는 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결코 그것을 다룰 수는 없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그것의 가장 깊은 원죄로 두고 있다. 이러한 역설을 단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파나히가 간바르에게 카메라를 빌려주는 에피소드다. 간바르가 정지 버튼과 녹화 버튼을 헷갈린 탓에 촬영하려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뒤바뀌어버린다. 촬영된 영상에는 카메라가 켜진 줄 모른 채 파나히에 대해 험담하는 간바르와 주민들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녹화되어 있다. 반대로 대상을 촬영하겠다는 욕망은 언제나 대상을 놓치거나 의도로부터 빠져나가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파나히의 <거울>에서 길을 잃은 소녀를 연기하던 아이가 돌연 영화를 더이상 찍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카메라를 이탈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영화는 카메라를 숨긴 채 소녀를 몰래 뒤따라가는 밀수의 여정으로 둔갑한다. 파나히의 영화에서 영화 제작의 현장은 누군가의 삶을 대상화한다는 욕망에 대한 반동과 불신으로 끊임없이 중단의 위기를 맞는 연약한 시공간이다. 그렇기에 국경을 넘지 못하고 뒷걸음질치는 파나히의 공포 서린 반응은 영화라는 활동의 무력감을 무의식중에 내비친 것은 아닐까. 촬영지에 가까이 가고 싶다는 마음과 경계 안쪽에 단단히 붙잡힌 몸 사이의 간극은 은연중에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는 진실을 포착할 수 없다는 영화의 무력함을 선취하고 있다.

<노 베어스>에서 영화 활동은 단순히 무력감을 내비치는 것에서 나아가 운명의 파국을 일으키는 잔인한 손길로 화한다. 국경 너머에 파나히가 촬영하는 영화 속 영화에 등장하는 자라와 밥티아르라는 연인의 이야기가 있다면, 국경 안쪽에는 파나히가 의도치 않게 헤집어놓은 또 다른 연인의 사연이 있다. 튀르키예로 도피를 계획하고 있던 연인의 비극을 불러들인 것은 파나히의 손에 든 카메라다. 인터넷 신호가 끊겨 더이상 원격 촬영을 할 수 없게 된 파나히는 자신의 주변을 향해 카메라를 돌린다. 이때 그가 촬영한 사진들 가운데 솔두즈와 고잘의 모습이 찍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마을에 머무는 내내 그를 괴롭힌다. 이 마을에는 여자가 태어날 때 탯줄을 자른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전통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고잘은 솔두즈가 아닌 야곱이라는 남자와 혼인을 치러야 한다. 밀회의 증거를 손에 넣기 위해 야곱과 마을 장로들이 파나히를 찾아와 사진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들의 요구를 파나히가 계속해서 거부하자, 정중하던 부탁은 점차 무거운 협박으로 바뀌어간다. 그들은 파나히의 메모리카드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으며 마을의 오랜 전통을 이유로 파나히에게 진실을 맹세할 것을 강요한다. 맹세의 방으로 가는 길에 한 장로가 파나히를 붙잡고 말한다. “사진이 없다고 말하세요. 그럼 평화로워질 거예요.”

카메라의 증언이 가진 힘

실제로 파나히의 카메라가 연인의 모습을 찍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마을의 질서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인 미신이라는 권력 앞에서 카메라는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포착하는 일의 무능력을 드러낸다. 비슷한 일이 파나히가 촬영하는 영화 속 영화에서도 일어난다. 이란 바깥으로 망명을 시도하는 부부의 이야기는 사실 두 사람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재가공한 것이다. 촬영 도중 밥티아르는 자라와 상의하지 않은 채 밀수업자를 만나려 한다. 카메라는 두 사람이 접촉하는 장면을 촬영하려 하지만 밀수업자는 카메라를 남겨둔 채 밥티아르와 사라져버린다. 영화의 비극은 촬영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거짓을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짓은 자라와 밥티아르 사이를 갈라놓는다. 카메라를 향해 가발을 벗어던지고 밥티아르의 위조된 여권을 가리키면서 모든 게 다 가짜이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자라의 절망은 얄팍한 픽션의 위장술을 폭로한다. 파나히의 두발이 국경을 건너갈 수 없었던 것처럼, 영화는 현실의 역습을 제어할 수 없고 현실의 빈칸을 채울 수 없다. 이토록 무력하기 짝이 없는 매체가 어떻게 권력에 맞서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걸까. 물론 영화 제작을 금지당한 감독이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으켜지는 희망의 기미가 있지만, 그것이 가능한 저항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노 베어스>는 권력 앞에서 스러지는 존재들을 카메라가 구할 수 없다는 고해성사로 순교하지도 않는다. <노 베어스>는, 영화는 현실을 초과할 수 없지만 현실의 틈새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기에 여전히 믿어봄 직하다고 말한다. 키아로스타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은 어둠 속의 또 다른 진실이 사라지는 것인데, 영화란 그런 것이다. 모두가 진실을 향해 투신할 때 세계 반대편에서 조용히 저무는 진실의 반동을 좇는 것. 그 미약해 보이는 일에도 여전히 힘이 있다.

<자파르 파니히가 겪은 탄압의 역사>

이란 정부의 정치적 탄압이 심상치 않다. 2022년 9월,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금되어 사망에 이른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이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번졌고, 수많은 활동가가 죽거나 구금되었다.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세일즈맨>의 주연인 배우 타라네흐 알리두스티 또한 이 시위를 지지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오랜 시간 권력에 맞서온 파나히가 이란 정부로부터 받은 탄압의 역사는 그의 필모그래피의 대부분을 관통하고 있다. 파나히는 2009년 시위 도중 사망한 네다 솔탄의 추모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2010년에 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후 20년간 출국과 영화 제작, 국제 행사 참여를 제한당했다. 그는 <노 베어스>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무렵에도 여전히 감옥에 수감 중이었고, 단식투쟁을 벌인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의 영화가 급진적인 것은 단순히 권력을 비판하는 내용을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영화 제작이라는 활동이 정부의 탄압에 맞서는 정치적 저항이 되는 극단적인 투혼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파나히가 직접 스스로 모습을 연기하는 자전적 다큐멘터리의 스타일은 망명 초기에 만든 영화인 <닫힌 커튼>과 <택시>를 거치며 이어져왔다. 이것은 독자적인 형식은 아니지만 고립과 폐쇄라는 조건을 급진적으로 전유한 결과물이다. 그의 영화에서 권력은 늘 시급하고 핵심적인 화두다. <노 베어스>에서 그가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집요하게 추궁받는 것은 파나히에게 가해진 정부의 탄압에 대한 직설적인 은유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이 강요하는 전통과 미신은 가부장적인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사실상 마을의 오랜 풍습이라는 형태로 위장해 여성들의 일방적 희생을 종용하며 권력처럼 작동한다. 권력은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곰이 나타난다는 소문과도 같다. “세상에 두려움을 만들면 권력을 휘두르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곰이 없다’고 선언하며 권력을 허구화하는 것은 억압된 존재들을 향해 휘둘러지는 폭력의 구조라는 진실과 마주치기 위한 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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