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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수상할 정도로 금욕적인 사람들, 린치 영화엔 있고 빌뇌브 영화엔 없는 것

슬슬 데이비드 린치의 <사구>(Dune, 1984)를 재평가할 때가 된 것 같다. 반대가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드니 빌뇌브의 <듄: 파트2>는 개봉과 함께 엄청난 흥행 성적과 압도적인 비평적 성과 모두를 거두고 있으니까. SNS에 린치의 <사구> 클립이 올라가면 빌뇌브의 영화를 보고 온 관객들의 조롱과 댓글이 인용으로 붙는다. 린치의 <사구>에 대한 괜찮은 말이 올라간 것 같아 가보면 그건 또 빌뇌브 영화의 다인종 캐스팅에 불만인 인종차별주의자가 쓴 글이다.

여러분이 프랭크 허버트의 <> 시리즈를 소설로 먼저 접하고 소설에 나오는 재미있고 멋지고 이상한 것들을 영화에서 보고 싶다고 치자. 의외로 그것들을 제공해주는 영화는 린치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주인공 폴의 동생 알리아다. 소설에 나오는 어른의 정신을 가진 3살 여자아이가 아버지의 원수를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걸 보고 싶은가? 빌뇌브의 영화에는 그런 것이 없다. 하지만 린치의 영화에는 있다. 인간의 형체를 잃어버린 길드 네비게이터는? 빌뇌브의 영화에는 없지만 린치의 영화에는 있다. 호모에로틱한 묘사는? 빌뇌브의 <>에는 비이성애자 자체가 보이지도 않는다.

빌뇌브의 <>이 성취한 것과 놓친 것

이유야 설명할 수 있다. 육체가 변형된 길드 네비게이터는 원작 1권에도 안 나온다. 블라디미르 하코넨의 묘사는 여러모로 호모포빅하다. 성인 알리아를 환상 속에서 등장시키는 빌뇌브의 방식도 나쁘지 않고, 아마 이후 영화의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빌뇌브의 영화는 ‘검열된’ 버전이다. 1980년대 영화에도 나왔던 동성애자 캐릭터가 2024년 영화엔 이성애자 캐릭터가 되었다면 호모포비아와 상관없이 뭔가 좀 이상하다고 봐야 한다. 그 때문에 종종 검열되지 않은 것도 검열된 것처럼 보인다. 폴이 챠니 대신 이룰란 공주를 왕비로 맞는 결말은 원작을 충실하게 따랐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검열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 전개는 백인 남성이 비백인 여성과 결혼하는 걸 금지하는 헤이즈 규약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빌뇌브는 자신만의 <>을 만들 권리가 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미 데이비드 린치가 ‘원작에 충실한’ 버전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게 정당화된다. 지금까지 나온 세편의 각색물 중 빌뇌브의 영화는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자체를 뭐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 때문에 조악하고 천박할 수는 있어도 그 세계 안에서는 무리 없이 작동하던 <> 세계의 가치와 논리가 종종 허물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빌뇌브의 제국 사람들은 수상쩍을 정도로 금욕적이다. 심지어 블라디미르 하코넨 남작까지 그렇다. 린치의 영화에서 하코넨의 탐욕은 패션, 분장, 음식, 섹스를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그게 옳았다. 그에 비하면 빌뇌브의 하코넨은 삶의 즐거움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먹고 있는 음식도 식욕이 떨어지게 생겼다. 물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도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무채색의 단조로운 세계는 쿨함을 얻고 덜 우스꽝스러워졌을지 몰라도 원작이 그린 세계의 다채로움과 힘과 논리, 심지어 종종 재미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두 영화에서 하코넨이 죽는 장면을 비교해보라. 이 영화의 복수극이 정점을 찍는 장면이지만 빌뇌브는 여기서 모든 복수의 쾌락을 빼버린다. 아, 그리고 방어막. 사람들은 린치가 원시적인 80년대 CG로 그린 네모네모한 방어막을 비웃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건 절대로 잊히지 않는 종류의 우스꽝스러움이다. 자, 그럼 며칠 전에 본 빌뇌브의 영화에서 같은 방어막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떠올려보라. 빌뇌브는 모래충을 그리는 방식도 괴상할 정도로 산문적이다. 누가 지적했듯, 이 영화의 모래충은 임신부 좌석이 있는 지하철에 가깝다.

여전히 린치의 영화는 우스꽝스러운 망작이고 빌뇌브의 영화는 굉장히 잘 만든 영화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원작의 세상을 충실하게 그릴 때보다 프랭크 허버트가 그린 1권의 세계에서 벗어날 때 더 좋아지는 부류라는 걸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주인공 폴의 여자 친구 챠니의 묘사가 그렇다. 원작과 린치의 영화에서 챠니는 기능적인 여자 친구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하지만 빌뇌브는 이 영화의 중세적 세계관에 이끌리며 전개되는 어처구니없이 고리타분한 계획에 반기를 드는 인물로 챠니를 그린다. 그리고 당연히 상식적인 관객들이라면 중반부터는 챠니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게 된다. 영화가 스틸가를 묘사하는 방식도 흥미로운데, 빌뇌브는 원작의 모든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범죄 증거라도 되는 양 은폐하지만 스틸가의 광신자스러운 태도는 정말 대놓고 놀려댄다.

이 모든 것은 프랭크 허버트의 비전을 따른 게 아니냐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종교의 허위성과 같은 것은 프랭크 허버트가 적극적으로 비판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냥 천진난만한 백인 메시아 서사처럼 보이는 린치의 영화와 달리, 빌뇌브는 이 주제를 최대한 살리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작이 문제점이 없는 책이 되는 건 아니다. <>은 여전히 히피물을 좀 먹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감명 깊게 본 미국 백인 남자의 책으로, 인종차별, 성차별, 문화적 전유와 같은 문제점이 노골적이다. 심지어 책은 이를 비판하려고 노력하는 지점에서도 한계를 노출한다. 어쩔 수 없다. 우린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산물이니까. 문제는 이것이 반세기가 넘는 동안 작가의 대를 이어 시리즈가 나오고 있고, 꾸준히 각색물이 나온다는 데 있다. 아무리 빌뇌브가 허버트의 주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허버트의 비전을 넘어서려고 해도, 이것이 가짜 아랍 세계에 들어와 메시아 놀이를 하는 백인 남자애의 이야기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아마 이 문제점은 이야기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그대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바꾼다면 굳이 원작을 각색할 이유가 없다.

프랭크 허버트의 비전으로부터 멀리

린치의 영화와는 달리 빌뇌브의 영화는 3부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끝이 난다. 프랭크 허버트는 원작의 주제를 최대한 분명히 했지만, 별 내용도 없고 재미도 없는 짤막한 속편 <듄 메시아>를 썼다. 그리고 그건 허버트가 죽을 때까지 쓰고 심지어 아들에게 유산처럼 물려준 속편들의 시작이었다. 빌뇌브는 딱 <듄 메시아>에서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는 진짜로 흥미롭다. 앞에서 말했듯 원작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소설이고, 일단 지금 영화의 챠니 묘사만 봐도 원작을 충실하게 각색한다면 이번 영화와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그건 빌뇌브가 원작을 적당히 무시하면서 훨씬 재미있는 내용을 가진 영화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 가능성을 최대한 살리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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