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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의 2002 외화 비망록 [3]
2002-12-27

최고의 허풍쟁이부터 최악의 키스신까지

오리발 상

말로는 “날 사랑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고 해놓고 소년의 마음을 훔친 <워크 투 리멤버>의 맨디 무어. 행복이 비등점에 달할 때쯤 기다렸다는 듯 털어놓는다. “나, 백혈병이야.” 일 벌여놓고 내빼기로는 <워터 보이즈> 신임 수영부 교사 사쿠마를 따를 수 없다. 미모로 남학생들을 불러모아놓고서 깜박 잊었다는 듯 기혼 사실을 밝힌 뒤 출산휴가를 받아 사라지더니 모진 풍파 다 지나고 영화 끝날 때가 다 되어서야 흥뚱흥뚱 나타난다. 하지만 맨디 무어도 감당 못할 오리발 상 임자는 따로 있다. <어바웃 어 보이>에서 아이가 무심코 던진 딱딱한 빵을 맞고 두개의 진짜 오리발을 하늘로 뻗은 채 죽어간 죄없는 런던 공원 오리의 혼백을 차마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멘.

가장 무의미한 전쟁

(제목 표기 확인요!)에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일갈한 대로 고귀한 전쟁은 없다. 하지만 2002년의 미국 전쟁영화처럼 헛되고 생뚱맞은 시행착오들도 드물었다. 게임 스테이지 대신 전쟁을 끌어들인 것처럼 보인 <에너미 라인스>를 비롯해 <하트의 전쟁> <위 워 솔저스> <윈드토커> 등은 모두 국수주의와 피해의식, 상투적 의리론을 직격탄도 아닌 지뢰로 묻어놓고 형식적 줄거리에 매달리는 다소 병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모든 잘못된 작전을 압도하는 ‘무의미한’ 전투는 <스위트 알라바마>의 한 장면. 이 로맨틱코미디에서 리즈 위더스푼의 고향 남부 남자들은 짬이 나면 민방위 훈련하듯 동네 언덕에 모여 남군 제복을 입고 패배한 남북전쟁을 재연하며 자존심을 위로했다.

올해의 OST

참 멋진 넘들끼리 친구 먹는군. U2의 보노가 감독 빔 벤더스의 친구라는 건 이 영화 <밀리언 달러 호텔> 때문에 알았다. 그것도 절칠한 친구라는 걸. 보노가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이 영화는 완전 감성파다. 빔 벤더스의 이 영화가 독일에서 처음 나온 건 2000년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올해에 개봉되었으므로 뒤늦게나마 `올해의 OST`를 받을 자격을 얻은 셈인데 어쨌거나 OST는 압권이었다. 이 영화를 위해 따로 조직된 `MDH 밴드`는 보노를 위시하여 브라이언 이노, 존 해셀, 빌 프리셀 등 최강의 멤버. MDH밴드와 밀라 요보비치가 함께 부른 루 리드의 <Satelite of Love>가 참 좋았다. 맨 첫 장면의, 푸른 새벽 빛이 눈에 선하다. 그뒤로 흐르는 보노의 축축한 목소리는 밤을 지새운 느낌.

최고, 최악의 헤어스타일

‘헤어 논란’의 원흉은 검열기관만이 아니었다. <판타스틱 소녀백서>에서 소녀 이니드와 환상적인 아웃사이더 커플을 이루는 스티브 부세미의 8:2 가르마 머리는, 고독한 늑대처럼 시대의 흐름과 동떨어져 지내는 그의 캐릭터를 웅변했다. 모자를 벗는 순간 뭇여성들을 충격에 빠뜨린 <로드 투 퍼디션>에 출연한 주드 로의 엽기 헤어스타일, 머릿속은 아름다웠으나 겉은 그렇지 못했던 <뷰티풀 마인드>의 러셀 크로, <밴디츠>의 두 남자 빌리 밥 손튼과 브루스 윌리스도 관객의 심미적 감수성에 도전한 사내들이다.

올해의 아버지상

올해는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활약이 돋보인 한해였다.그중에서도 <아이 엠 샘>의 숀 펜은 단연 두드러진다. <로드 투 퍼디션>의 톰 행크스와 폴 뉴먼이 필적할 만하나 그들은 아들을 잃었고, 숀 펜은 딸을 되찾았다. 게다가 내 딸을 빼앗아가지 말라는 샘의 호소엔 태초의 순결함이 있다. 한마디로 샘의 부정(父情)엔 그늘이 없다. 딸을 향한 사랑 외에 눈돌릴 곳 없는 샘은 그런 면에서 사실적이기보다 판타스틱하다. 최악의 아버지상에는 <아귀레, 신의 분노>와 <몬스터 볼>이 경합할 만하다. 아마존 오지에 왕국을 건설하는 건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렇다치고 철 모르는 딸까지 데려가 온갖 고생을 시키는 클라우스 킨스키와 지독한 인종적 편견을 집안 자랑으로 여기는 <몬스터 볼>의 아버지는 정말이지 구제불능이다.

베스트 공간

<패닉룸> <고스트 쉽> <엑스페리먼트> <레지던트 이블> <글래스하우스> <고스포드 파크> <디 아더스> 등 올해 외화 중엔 유독 폐쇄공간이 무대인 영화가 많다. 그중 백미는 <고스포드 파크>. 우아하고 호화로운 이 넓은 저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한번 본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까 저택의 창문 수만큼이나 많은 자잘한 사건으로 인해 <고스포드 파크>는 1m2당 드라마 밀도가 가장 높은 영화로 손꼽힐 만하다. 여기 비하면 의 온갖 귀신이 출몰하는 저택은 1m2당 드라마 밀도가 가장 낮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놀이동산에 있는 유령의 집에 가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여기서 돌발 퀴즈, <고스포드 파크>에는 과연 몇개의 방이 나올까요

베스트 허풍

본디 허풍 하면 무협지적 상상력이 최고다. 내공이 실린 소리만으로 수천명이 고막터져 죽게 만들고, 장풍으로 태산을 옮기는 중원에선 어떤 일도 가능한 법. 오랜 세월, 영화로 무협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집착했던 서극의 <촉산전>은 ‘허풍에 의한, 허풍을 위한, 허풍의 영화’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 맞서는 주성치의 <소림축구> 또한 허풍 내공 삼갑자는 족히 넘는다. 벽이 무너지고 골대가 날아가는 소림축구팀의 강력한 슈팅이라면 독일의 수문장 올리버 칸도 오금이 저릴 것이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무공의 고수여서 발로 뻥 차서 주차시키는 경지까지 오른다면, 오호라, 흥겹구나, 자진방아를 돌려라, 아니겠는가.

노력상

2002년 외국영화를 통틀어 가장 건전한 노동윤리로 근면하게 일한 캐릭터는 <싸인>의 외계인들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검댕먼지들이다. 외계인들은 멜 깁슨 이웃의 옥수수 밭을 트랙터 몇대로는 어림없어 보이는 규모로 벌초하느라 번번이 철야의 과로를 무릅썼다. 영화에 따르면 새벽 이슬은 이들에게 치명적이었을 것이므로 노동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검댕먼지들은 <이웃집 토토로>에서 일없이 몰려다니며 무위도식한 과거의 태만을 반성하듯 목욕탕에서 석탄을 나르는 사회 봉사에 나서 보는 이를 안쓰럽게 했다. 일러스트 이강훈 leebid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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