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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7]
문석 2003-02-06

˝늬들이 한국 영화사를 알아?˝

가장 많은 엑스트라가 출연한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 <무사> 또는 <태백산맥>

영국 DK출판사에서 펴낸 <Top 10 of Eveything 2002>에는 ‘엑스트라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영화’ 부문 3위로 한국영화 <우주괴인 왕마귀>(1967, 권혁진 감독)가 올라 있다. 무려 15만7천명을 동원했다는 것. 하지만 당시 이 영화의 제작사인 세기상사에 근무했던 정종화씨는 “홍보를 위해 부풀린 것. 유료로 고용된 엑스트라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본 문화평론가 이순진씨도 “참 많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김성수 감독의 <무사>(2001)가 50마리의 말과 기수를 기본으로 해서 많을 때 200명가량 동원해 112회 동안 찍었으니, 연인원 2만명 정도 규모의 엑스트라를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 또한 연인원 수만명대의 엑스트라를 동원했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무려 30만명 이상이 운집한 것으로 추산되는 <간디>(1982)의 ’인해전술’은 여간해선 깨지지 않을 기록. 감독 리처드 아텐보로는 간디의 장례식 33주년을 맞던 81년 1월 31일, 영화 속 장례식 장면을 찍었다. 대부분은 40펜스 상당의 저렴한 비용으로 계약한 엑스트라만 94560명, 신문과 방송 등을 통해 모인 자원 엑스트라가 20만명 이상이었다. 11대의 카메라로 이날 하루 동안 찍은 분량은 188분짜리 개봉판 프린트를 능가할 정도였지만, 결국 125초로 편집됐다.

가장 많은 숫자의 배우를 뽑은 오디션 <장군의 아들>

임권택 감독이 <장군의 아들>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던 1989년 공개 오디션에서 44명을 뽑은 것. 이중에는 주인공 김두한 역의 박상민뿐 아니라, 하야시 역의 신현준, 김승우, 이일재, 김해곤 등도 포함돼 있었다. <장군의 아들2>를 준비하면서 연 오디션에서는 여주인공 송채환을 비롯한 28명을 선발했다. 임권택 감독은 공개 오디션을 즐겨 이용하는데, 2000년작 <춘향뎐> 때도 오디션에서 이효정과 조승우를 선발했다. 한편, 가장 많은 인원이 응모한 오디션은 밝혀내기 어려운데, 이는 제작사들이 홍보효과를 위해 지원인원 수를 부풀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기록상에 남아 있는 가장 많은 응모인원 수는 신성일이 선발된 1956년의 신필림 오디션에 5천여명이 몰렸던 것. 어찌 됐건 당시는 오디션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모양이다. 남정임이 선발됐던 66년 김수용 감독의 <유정> 여주인공 선발 오디션에는 2300여명이 몰렸는데, TV로 생중계되기도 했다. 68년 <춘향> 오디션에는 1800여명이 몰렸고, TV중계는 물론이고 순경까지 입회해 있었다. 당선자에게 상품으로 승용차를 지급했기 때문이라는 것. 이때 뽑힌 춘향은 홍세미였다.

최다 카메오 출연 배장수

카메오의 기준에 따라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현역 카메오’로는 <경향신문> 영화기자인 배장수씨가 최다 출연자다. 그는 1993년 김유진 감독의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에 출연한 이래 2002년 <울랄라 씨스터즈>까지 모두 32편에 출연했다. 대학 때부터 연극반 활동을 했던 그는 <레이디 경향> 기자 시절에도 선배와 함께 신촌 청파소극장에서 <아일랜드>를 상연했다. 공연을 위해 부득불 머리를 박박 밀어야 했기에 취재할 때는 가발을 쓰고 다닐 정도로 열의있는 연기지망생이었다. 그의 영화출연은 <아일랜드> 공연 당시 “한번 흥행해보겠다는 각오로” 아는 영화계 인사에까지 초대장을 돌린 데서 시작됐다. 이때 공연을 봤던 김유진 감독이 “한번 하지”라고 권유해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그 이후 영화사의 요청, 또는 그의 간절한 ‘연기욕’으로 30편이 넘는 ‘필모그래피’를 이뤄냈다. 카메오답게 그동안 그가 맡았던 배역은 양념 정도의 역할이었다. <참견은…>의 야구심판, <장미빛 인생>에서 최명길과 선보는 남자, <맨발에서 벤츠까지>의 파업 주도하는 벌목공, <자카르타>의 수위 등. 하지만 <태백산맥>에서는 보성군당 부위원장 역을 맡아 위원장 김명곤을 보좌했고, <엽기적인 그녀>에서는 원조교제를 꾀하다 전지현에게 혼나는 회사원을 연기해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임순례 감독의 인권영화 <그녀의 몸무게>에서 성차별 발언을 하는 교사 역할을 맡을 예정인 그는 “전업은 생각도 해본 적 없다. 다만 좋은 영화에 발 한번 담갔다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다.

최초의 프로배우

이월화. <월하의 맹서>(1923)에 출연한 뒤 <해의 비곡>(1924) 등에 출연. 훗날 인기가 떨어져 조선권번의 기생이 됐다. <미망인 존스>(1896)에서 최초의 키스를 연출한 존 라이스와 메이 어윈.

현역 최고령 배우

정종화씨에 따르면, 1920생으로 1957년 <아리랑>으로 데뷔, 1996년 <만무방>에 출연한 장동휘씨라고 밝힌다. 4살 때 <Not To Be Trusted>(1926)에 담배 피는 꼬마로 데뷔한 이래, 무성영화 시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배우 미키 루니로 추정.

가장 오랫동안 활약한 배우

45년 동안 활약하고 있는 안성기. 1957년 5살로 <황혼열차>로 데뷔한 뒤 2002년 <취화선>과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 출연. 1908년 8살의 나이로 데뷔한 뒤 <카사블랑카>(1942) 등을 거쳐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1988)로 80년 연기 인생을 마무리한 독일 배우 커트 브와.

가장 오랜만에 컴백한 배우

김일해. 59년작 <인걸 홍길동> 이후 85년작 <장남>으로 복귀.

한 영화에서 가장 많은 배역을 소화한 배우<종각>(1958)에서 1인3역을 소화한 문정숙. 기네스북에는 <Kind Hearts and Coronets>(1949)의 알렉 기네스로 등재돼 있으나, 실은 <Sixty Years a Queen>(1913)에서 무려 1인 27역을 소화한 롤프 레슬리.

최초의 배우학교

1925년 이구영이 서울 창신동에 세운 조선배우학교. 이금룡, 복혜숙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최초의 오디션

작품을 놓고 벌인 오디션으로는 1958년의 <산넘어 바다건너>라고 정종화씨는 밝힌다. 이 오디션을 통해 이대엽, 방수일, 정영자 등이 발굴됐다.

가장 많이 커플로 등장한 배우들

신성일과 엄앵란. <떠날 때는 말없이> 등 34편에서 남녀주인공으로 연기했고, 13 작품에서는 함께 출연했지만 커플 아닌 연기를 했다. 1975년부터 무려 130편의 영화에서 공연한 인도의 슈퍼스타 프렘 나지르와 쉴라. 할리우드에서는 15편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춘 찰스 브론슨, 진 아일랜드 부부.

가장 늙은 나이에 주연을 맡은 배우

이두용 감독의 <장남>에서 주연을 맡았던 김일해. 당시 그의 나이는 78살이었다.

배우 생활 75년만인 1987년, 95세의 나이로 <쾌락의 계절>(Les Saisons du Plaisir) 에 주연한 프랑스 베테랑 샤를 바넬.

가장 어린 나이에 주연을 맡은 배우8살 때 <꼬마신랑>에서 주연한 김정훈.헝가리 영화 <9개월>(1976)을 촬영하는 카메라 앞에서 태어난 발라즈 모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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