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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연속기획 1 - DVD로 듣는 OST [3]
이다혜 2003-07-25

실패한 연인들을 위하여

<화양연화>

花樣年華 | 2000년 | 감독 왕가위출연 양조위, 장만옥 | 출시사 다음미디어

10번 트랙/ 사랑에 빠져 가정을 떠난 남녀 뒤에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남편이, 아내가 떠나버린 빈자리에 남아 상처를 쓰다듬는 사람들의 어깨 위에 냇 킹 콜의 노래가 내려앉는다. 쿨한 듯 흘러나오는 냇 킹 콜의 음색은, 그러나 찌꺼기만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사랑의 감정을 쿡쿡 찔러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알람소리에 아침잠을 깨듯, 냇 킹 콜의 슬프도록 달콤한 목소리가 울리면 그들은 스쳐지나고, 만나고, 응시한다. 싱가포르로 떠나게 된 차우(양조위)는 묻는다. “티켓이 한장 더 있다면 같이 가겠소?” 그리고 <Quizas, Quizas, Quizas>가 흐른다. “항상 난 그대에게 묻지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냐고/ 그대는 늘 내게 대답하지요/ 글쎄, 글쎄, 글쎄/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고/ 나는 절망에 빠져듭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대답하지요/ 글쎄, 글쎄, 글쎄….” 노래가 끝나고, 남자는 떠나고, 허겁지겁 달려온 리첸(장만옥)은 뇌까린다. “내게 자리가 있다면 내게로 올 건가요?” 내 연애만 실패로 끝나는 건지, 원래 연애라는 장르는 실패가 운명지워진 건지, 이 의문에 답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긴 여정의 서곡

<파리, 텍사스>

Paris, Texas | 1984년감독 빔 벤더스 | 출연 해리 딘 스탠튼나스타샤 킨스키 | 출시사 미디어체인

1번 트랙/ 작열하는 광선 속에서 모든 게 말라비틀어진 듯한 황량한 텍사스 사막, 빨간 모자가 눈에 띄는 한 남자가 걸어간다. 초점 잃은 눈과 무기력한 걸음걸이는 그의 내면이 사막보다 더 황폐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흘러나오는 라이 쿠더의 기타 소리는 이 공허함과 쓸쓸함을 극단까지 몰아붙인다. 떨림이 강한 기타의 단속음은 멜로디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이 영화의 커다란 주제인 소통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제곡 <파리, 텍사스>는 주인공 트래비스(해리 딘 스탠튼)가 이 영화 속에서 헤쳐나가야할 여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 내내 다양한 형태로 흘러나오면서 트래비스의 심리상태와 사람들 사이의 먼 거리를 표현한다. <파리, 텍사스>는 벤더스와 라이 쿠더의 첫 합작품이다.

너는, 나는 누구냐?

<파이트 클럽>

Fight Club | 1999년감독 데이비드 핀처 | 출연 에드워드 노튼브래드 피트, 헬레나 본햄 카터 | 출시사 이십세기 폭스

35, 36번 트랙/ “다리는 하늘에, 머리는 땅바닥에 두고 이 트릭과 회전을 해보지 그래, 네 머리는 붕괴할걸.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지. 그리고 넌 스스로에게 묻겠지. 내 정신은 어디에?” 통유리창 너머로 즐비했던 고층빌딩들이 바람 앞의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무너질 때 강렬한 기타와 드럼 사운드에 실린 목소리가 이렇게 묻는다. 나(에드워드 노튼)와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이 분열을 멈추고 통일된 듯한 상황에서 픽시스는 <Where Is My Mind?>로 ‘도대체 나는 누구냐?’고 묻는 것 같다. 확고하기 짝이 없던 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을 즐거워하는 듯 시원한 사운드는 정체성에 관한 다소 심오한 질문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지만, 이 영화의 이 장면에는 딱 어울리는 절묘한 선택이다. 다른 장면에선 더스트 브러더스의 하드코어 테크노 사운드를 사용하다 마지막에 이 곡을 쓴 데는 핀처의 섬세한 계산이 작용했을 듯.

전통은 가라!

<사무라이 픽션>

Samurai Fiction | 1998년감독 나카노 히로유키 | 출연 가자마 모리오후키코시 미쓰루, 호테이 도모야스 | 출시사 다음미디어

5번 트랙/ 흑백 사무라이영화에 록음악이 웬말이냐. 그런데 그게 썩 어울리는 것을 보면 오프닝 타이틀에 SF라고 시작하는 것이 (<사무라이 픽션>의 줄임말이기도 하지만, ‘공상과학’이라는 뜻으로 봤을 때도) 공염불은 아닌 듯. 보검을 훔친 카자마츠리를 뒤쫓는 울트라 엉성 3인조가 바닷가로 산으로 마구 내달리는 모습에서 <트레인스포팅>의 청춘군상이 오버랩된다면 오버일까. 여자 앞에서 퍽 하고 시뻘건 코피를 쏟는 사무라이의 모습에 낄낄거리고 다리가 풀려서 천장에서 뚝 떨어지는 자객에 푸실푸실 웃다보면 전혀 일본 전통스럽지 않은 선곡에 놀랄 것도 없어 보인다. 슬라이드 기타가 등장하면 마카로니 웨스턴이 되는가 싶은데, 또 어느 순간엔 보사노바 계열의 리듬이 들어서더니 영화를 가볍고 말랑말랑한 핑크빛으로 칠해버린다. 기모노를 입은 여주인이 카자마츠리를 유혹하려고 캉캉 댄서라도 된 듯 엉덩이를 내보이며 에 맞춰 몸을 흔드는 부분이 바로 그것.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고 옆에 슬쩍 앉아서는 “정말 강하시군요”라며 허스키하게 중얼거리는 그녀. 뇌쇄적 매력보다는 싸움솜씨가 돋보이는 터프한 팜므파탈을 위한 최고의 선곡이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 | 1984년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 출연 로버트 드 니로제임스 우즈 | 출시사 워너

10번 트랙/ 너무 많이 봤다고? 그래서 진부하다고? 글쎄, 섣불리 답하긴 이르다. 영화를 굳이 다 보지 않은 사람들도 TV에서 족히 대여섯번은 보았을 어린 데보라(엘리자베스 맥거번)가 춤을 추는 장면은 최근 복원출시된 229분짜리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다시 훔쳐보기를 충동질한다. 이제는 늙어 백발이 성성한 누들스(로버트 드 니로)가 옛날 옛적 비열한 거리에서 지냈던 잃어버린 시간을 되살리기 위해 필요로 했던 것은, 모의 식당 화장실 변기 뚜껑을 닫고 올라서서 벽의 판자를 뜯어내고 그 구멍에 눈을, 마음을 가져다대는 것. 그 너머에 그녀가 있다. DVD의 깨끗한 음질 덕에 지직거리는 소리조차 선명한,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Amapola>가 육체로 현현한 듯 음악과 하나된 소녀. 밀가루를 후광처럼 대기 중에 띄우고 사뿐사뿐 몸을 가누며 춤에 몰두한 데보라의 모습은, 그들 모두가 맞닥뜨려야 할 잔인한 삶에 쉽게 KO당하지 않을 작은 꿈이 되어준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가장 의외의 선곡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 Fidelity | 2000년감독 스티븐 프리어스 | 출연 존 쿠색 잭 블랙 | 출시사 브에나비스타

28번 트랙/ 가장 뻔뻔한 조연 ‘Top 5’를 뽑으면 상위권에 랭크될 것이 120% 확실한 베리(잭 블랙)는, 영화 내내 얄미운 짓만 골라한다. 바지는 다 흘러내려서 X구멍이 다 보일 지경에 머리는 천만년 전에 감은 듯 떡이 됐고, LP를 사겠다는 손님이 마음에 안 든다며 팔기를 거부하는 베리의 싸가지는 그야말로 영업장의 적. “돈을 줄 테니 제발 무대에 서지 말아줘”라는 롭(존 쿠색)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대에 선 밴드 ‘죽이는 원숭이’의 보컬 베리. 괴상한 노래를 불러서 사람들이 모두 계란투척이라도 할까봐 잔뜩 불안해진 롭과 그의 여자친구 로라의 귀에 딩딩딩∼ 하는 기타전주와 함께 들려온 것은 . 짧은 전주가 선곡의 놀라움을 극대화한다. 극중에서 ‘최고의 1번 트랙’으로도 꼽혔던 마빈 게이의 명곡이고, 여주인공 로라가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다. 사운드트랙 앨범에는 잭 블랙의 노래가 실려 있다.

시체들을 위한 러브송

<좋은 친구들>

Goodfellas | 1990년감독 마틴 스코시즈 | 출연 로버트 드 니로조 페시, 레이 리오타 | 출시사 워너

B면 7번 트랙/ <카지노>와 더불어 <좋은 친구들> 역시 노래 듣는 재미만으로도 끝까지 보는 게 어렵지 않다. 한국에서는 사운드트랙 앨범이 발매되지 않은 점이 유감이지만 DVD의 볼륨을 한껏 키워놓으면 총소리, 비명소리와 함께 듣는 고전(록과 팝의 고전) 명곡들에 소름이 돋는다. 영화의 후반부, 크게 한탕한 지미(로버트 드 니로) 일당. 그들은 돈 번 티를 섣불리 내는 녀석들, 그리고 관련되어 소문을 낼지도 모르는 놈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기 시작한다. 이 트랙의 이름은 ‘온통 시체들뿐’(Bodies All Over)인데, 어느 아침, 아이들이 농구공을 들고 가다가 주차된 차 안에 죽어 있는 남녀를 발견한다. 피투성이가 된 남녀를 클로즈업하면서 ‘Derek and the Dominos’의 <Layla>가 힘차게 터져나온다. 흔히 듣게 되는 에릭 클랩튼의 보컬 부분이 아닌 중후반의 피아노 리드 부분인데, 절절한 사랑 노래에 맞춰 쓰레기더미의 시체, 냉동차 안 갈고리에 걸려 매달린 시체들이 하나둘 등장한다. 그런데 너무 잘 어울린다, 뒷골이 쭈뼛 설 정도로.

DVD 연속기획 1 - DVD로 듣는 OST [1]

DVD 연속기획 1 - DVD로 듣는 OST [2]

DVD 연속기획 1 - DVD로 듣는 OST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