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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보일, 할리우드에서 길을 잃고 런던에서 답을 찾아 돌아오다 [2]
박은영 2003-09-18

실패 케이스 2

과욕 그리고 뜬금없음 - <비치>

알렉스 갤런드의 소설을 각색한 2000년작 <비치>는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보다 더 시끄러웠다. 첫 번째 뇌관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캐스팅이었다. 알렉스 갤런드의 원작소설에서 주인공 배낭족은 격렬한 생의 체험을 구하면서도 감정을 잘 표출하지 않는 영국 청년이다. 주인공으로 캐스팅될 것이라고 당연히 믿고 있던 이완 맥그리거는 디카프리오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을 제3자를 통해 듣고 대니 보일 팀과 불편한 사이가 됐다. 디카프리오가 분한 미국인 청년은 기본적으로 관찰자라기보다 정복자에 가깝다. 그는 <지옥의 묵시록>의 마틴 신처럼 선풍기가 돌아가는 지저분한 호텔방에서 미션을 받고 미지의 신세계로 잠입한다.

(왼쪽부터) <트레인스포팅> <비치>

영화 <비치>가 가진 결함은 <시카고 선 타임스>의 로저 에버트가 명쾌히 요약한 대로다. 프랑스 소녀와의 삼각 로맨스, 정글과 고독한 인간의 대결, 문명의 전말에 대한 우화, 순수의 상실, 전체주의로 변질되는 유토피아니즘 등등, <비치>는 너무 많은 실마리를 늘어놓는 동시에 그중 어느 것도 매듭짓지 않음으로써 관객에게 좌절을 안긴다. 숲에 홀로 버려진 디카프리오가 돌연 전자오락 캐릭터로 변해 뜀박질을 하는 시퀀스는 대니 보일의 절박한 몸부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트레인스포팅>에서 변기 속으로 다이빙하는 판타지신은 주인공이 마약의 위안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더러워질 각오가 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극적 필연성이 있기에 명장면이다. 반면 <비치>의 게임 화면이나 <인질>의 갑작스런 뮤지컬 댄스는 단지 황당하다. <비치>는 제작비 5천만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국 박스오피스 수입 3977만달러의 재앙이 되고 말았다. 대니 보일 감독 역시 <비치>를 일종의 자연재해처럼 회고한다(실제로 타이의 폭우와 바람은 제작과정의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대니 보일은 <비치>를 통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을 안고 영화를 만드는 일에 피로와 깊은 두려움을 갖게 됐다. 그는 한동안 <비치>에 관한 악몽을 꿨다. 비행기에 탄 <비치>의 전 스탭이 다음에는 뭘 할까요라고 다그치는데 대답할 말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꿈이었다.

“<비치>의 가장 큰 짐은 기대였다. 압박감이 너무 커 마비가 올 것 같았고 몹시 외로웠다. 나는 다시는 자연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고 런던을 사랑한다. 시골에 가면 하룻만에 몸이 완전히 뻣뻣해진다. 내가 다음 영화를 찍는다면 여행도 해류도 몬순도 야자수도 없는, 어딘가 통제할 수 있는 장소일 거다. 도시이고 밤장면이 있는.” 영국으로 돌아온 대니 보일은 디지털카메라로 TV영화 <스트럼펫>과 <천국에서 누드로 진공청소하기>를 찍었고 런던과 몇몇 로케이션에서 를 찍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비치>에서 받은 개런티의 절반에 해당하는 제작비(약 600만파운드)로.

시행착오의 교훈,

종말의 폐허 위에서 시작하는 는 대니 보일 감독의 고유한 장기와 시행착오의 교훈을 종합한 하나의 대답이다. 대니 보일은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 시리즈의 외형과 알레고리를 계승함으로써 <쉘로우 그레이브>로 감각을 입증한 스릴러호러 장르 속으로 한발 더 들어간다. 그리고 좀비호러라는 50년 묵은 장르를 거리를 두고 인용하거나 아이러니로 응용하지 않고, 21세기 사회의 현실을 파고드는 직접적 도구로 쓰는 정공법을 취했다.

뉴스릴 도입부와 전장에서 타전된 9시 뉴스처럼 보이는 디지털카메라의 화면이 시사하듯 는 21세기 현재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서 공포의 근원과 양상을 고스란히 가져온다. 실제로 는 제작기간 동안(시간순서대로) 9·11 테러, 이라크전, 사스 히스테리의 반영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핵무기와 권력의 음모에 대한 1950년대의 신경증에서 태어난 좀비호러 장르를 부활시키면서 장르와 현실이 맺은 예민한 연관도 계승한 셈이다. 작가와 감독은 길거리에서, 교통지옥에서, 쇼핑센터에서 사소한 이유로 촉발되는 폭력사태, 광우병 등의 전염병과 급증하는 엽기적 범죄에 대한 영국 정부의 무능한 대처를 보며 ‘분노’ 바이러스를 착안했다. “수많은 CF가 당신은 중요한 존재이므로 이 물건을 꼭 가져야만 하고 저곳에 꼭 가야만 한다고 속삭이지만 현실은 여의치 않고 분노만 쌓인다.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동의 순간을 1천배쯤 확대하고 단순화한다면 그 파괴력이 바로 호러영화의 괴물이 된다”라고 말하는 보일은 비극의 이미지 역시 중국 대지진, 북아일랜드 테러, 르완다, 보스니아전쟁의 기록 사진에서 따왔다.

다른 나라에 비해 좁은 영국의 시가지가 스크린보다 브라운관에 걸맞다고 토로한 적이 있는 대니 보일은 실내장면의 탁월한 연출에 비해 로케이션 촬영에 불편함을 느껴왔다. 의 전반부를 압도하는 진공상태의 런던 거리신은 그러한 문제를 적절히 극복했을 뿐 아니라 영화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대니 보일에게 친숙할 뿐 아니라 관광사진을 통해 관객에게도 눈익은 빅벤과 밀레니엄 관람차, 세인트 폴 성당이 인적없는 진공 속에 우두커니 서 있고 빨강색 2층버스가 대로에 나동그라진 광경은 절묘한 공간적 공포를 자아낸다. 거대 예산 액션블록버스터라 해도 꿈꾸기 힘든 이 효과는 알려진 대로 디지털카메라 촬영 덕택에 가능했다. 미국과 달리 영화촬영을 위한 교통통제에 야박한 런던에서 보행자와 차량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은 단 몇분. 대니 보일과 도그마영화의 숙련된 촬영감독 앤서니 도드 맨틀은 러시아워 이전의 새벽거리에서 6대에서 10대의 디지털카메라를 나흘 동안 돌려서 결실을 얻었다.

대니 보일은 에서 모든 형식적 기교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고 TV영화 두편을 찍으며 터득한 디지털카메라의 기능을 대폭 활용했다. 전통적으로 느린 괴물로 알려진 좀비 역에 운동선수들을 고용해 “일반인이 할 수 있을 듯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동작”으로 빠르게 공격하는 액션을 연출했고, 초당 프레임 수를 변조하는 카메라 메뉴를 이용해 통상적인 깊이감이나 거리감을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을 조성했다. 또한 누군가 정체 모를 존재가 지켜보는 CCTV의 느낌을 전하는 거친 입자의 화면은 서정적 아름다움과 도시괴담의 아우라를 동시에 성취했다.

수도 런던과 영국의 전원을 황무지로 둔갑시키며 ‘대영제국의 몰락’을 생생히 그린 는 영국 관객을 소름끼치게 하는 데 성공했다. <트레인스포팅> 같은 센세이션은 아니지만 ‘켄 로치 스타일의 좀비영화’, ‘1970년대 이래 최고의 영국 호러’라는 언론의 찬사에는 한 유능한 감독의 ‘홈커밍’에 대한 반가움이 보인다. 에서 대니 보일은 오랫동안 매달려왔던 테마- “자기 보호본능을 발동한 인간보다 극악한 존재가 있을까?”- 를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도시와 장르, 몸으로 이해하는 공포의 코드를 통해 표현했고 다시 관객과 소통의 길을 텄다. 현재 대니 보일은 파운드가 유로로 바뀌기 직전 주말에 주인없는 100만파운드를 발견한 소년들의 이야기 <밀리언스>를 촬영 중이며 <트레인스포팅>의 속편 <포르노>를 준비하고 있다. 돈가방과 뜀박질이라면 대니 보일이 전문이다. 또 한바탕의 질주가 시작될 모양이다. 글 김혜리 vermeer@hani.co.kr·편집 권은주

▶ 대니보일, 할리우드에서 길을 잃고 런던에서 답을 찾아 돌아오다 [1]

▶ 대니보일, 할리우드에서 길을 잃고 런던에서 답을 찾아 돌아오다 [2]

▶ 대니보일, 할리우드에서 길을 잃고 런던에서 답을 찾아 돌아오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