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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t see] <체인질링> 이스트우드는 다시 매그넘을 들었는가
김도훈 2009-01-22

1920년대 LA 거악과의 전쟁, 웰메이드 역사 드라마 <체인질링>

<체인질링>은 우리 시대의 작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다. 싱글맘 크리스틴 콜린스는 아들을 잃어버린다. LA 경찰은 엉뚱한 아이를 찾아온다. 크리스틴은 부르짖는다. “이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에요!” 그러나 부패한 경찰은 실책이 탄로날까 두려워 엉뚱한 아이를 아들로 삼으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는 크리스틴을 강제로 정신병원에 가둔다. 크리스틴의 목숨을 건 투쟁은 그렇게 시작된다. <체인질링>은 압도적인 우아함으로 재현된 웰메이드 역사 드라마다. 동시에 <미스틱 리버>나 이오지마 연작과는 조금 다른 이스트우드의 세계이기도 하다. 혹시, 이스트우드는 또다시 매그넘을 들었는가.

LA가 천사의 도시라고? 농담은. 대공황기를 무대로 한 필름누아르의 세계에서 LA는 술취한 조커와 부패한 다크 나이트가 활개치는 고담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과 커티스 핸슨의 <LA 컨피덴셜>, 그리고 브라이언 드 팔마의 <블랙달리아>를 생각해보라. 대공황의 LA는 타락한 범죄자들과 더 타락한 경찰들과 타락의 정의를 넘어선 살인귀들의 도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더욱 빠르게 부패시키려는 듯 끈적끈적하게 내리쬐는 태양의 도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체인질링>도 ‘LA 지옥도’의 카테고리에 훌륭하게 한 자리를 차지할 영화다. 여기에는 썩은 경찰과 정치가들, 그리고 아이들을 도끼로 내리찍는 연쇄살인마가 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카우보이고 <체인질링>의 이스트우드는 더티 하리다. 타락한 자들은 결국 쓰러져야만 한다.

대공황 틈에서 피어난 무시무시한 실화

<체인질링>의 주인공은 부패한 도시의 시스템에 온몸을 부딪혀 정의를 찾는 어느 보잘것없는 어머니다. 뉴욕발 대공황의 공포에 시달리는 1928년 3월의 LA.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전화국 슈퍼바이저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는 퇴근 뒤 아홉살 난 아들 월터가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24시간 뒤 경찰의 무성의한 수색이 시작되지만 월터의 흔적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로부터 다섯달 뒤. 크리스틴은 아들이 돌아왔다는 희소식을 경찰에게 듣는다. 하지만 경찰이 데리고 온 아이는 월터가 아니다. 부패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기자들을 잔뜩 불러모은 경찰은 일단 아이를 집으로 데려간 뒤 다시 생각해보라고 강요한다. “한 며칠만 시험삼아 시도해보시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강압에 의해 아이를 거두어들인 크리스틴은 진짜 월터를 찾아달라고 계속해서 경찰청에 요구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무능력이 발각될까 두려운 경찰은 크리스틴을 자신의 아이도 알아보지 못하는 정신병자로 몰아 LA 근교의 정신병원에 가둬버린다.

이 무시무시한 사건은 실화다. <LA타임스>나 <타임>에 글을 기고하던 저널리스트 출신의 각본가 J. 마이클 스트랙진스키는 역사 속에 묻혀 있던 크리스틴 콜린스 사건을 우연히 발굴해냈다. “시청에서 일하던 정보원이 전화를 해서는 오래된 문서들을 소각 중인데 꼭 좀 봐야 할 게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틴 콜린스 사건에 관한 시의회 복지 청문회 문서였다. 나는 그 문서를 읽고는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스트랙진스키의 의심도 이해할 만하다. 크리스틴 콜린스 사건은 믿기지 않을 만큼 드라마틱한 순간들로 가득한 픽션 그 자체다(심지어 지난해 칸영화제 직후 “몇몇 심사위원들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걸 믿지 못해 황금종려상을 <체인질링>에 주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당시 LA를 지배한 건 조지 E. 크라이어 시장과 제임스 E. 경찰서장이었다. 이들은 기관총 경찰부대를 조직해 마약과 술을 몰래 거래하며 시민들을 학살했다. 크리스틴 콜린스 사건이 LA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아들을 찾아달라고 애원하는 무력한 싱글맘을 박해하고 정신병원에 가둬버린 경찰에 분노한 언론과 대중이 LA의 지배자들을 단숨에 권력에서 몰아낸 것이다.

시나리오가 론 하워드 감독의 손에 들어간 것은 필연이라고 하겠다. <뷰티풀 마인드> <신데렐라 맨> <아폴로 13>의 론 하워드는 미국의 오래된 실화를 바탕으로 감동적인 오스카용 드라마를 만드는 데 평생을 바쳐온 인물 아니던가. 그러나 하워드는 현명했다. 그는 직접 메가폰을 쥐는 대신 다른 감독을 떠올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이스트우드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론 하워드에게 전화했다. “내가 이 작품을 맡도록 하지.” 확실한 것은 이스트우드는 스트랙진스키의 시나리오로부터 론 하워드와는 조금 다른 영화를 상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거다. 그는 감동적인 오스카용 드라마로서의 퀄리티보다는 크리스틴 콜린스 사건이 내포하는 몇몇 이스트우드적인 요소들을 발견했다. 부패한 시스템과 그에 맞서 혈혈단신 싸우는 개인의 투쟁. 말하자면 자유주의자의 전쟁 말이다.

왜 서구 평론가들은 만장일치를 보지 못했나

그리고 <체인질링>에는 아동살해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다. 크리스틴 콜린스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은 고든 스튜어트 노스콧이라는 24살의 아동살인마다. 역사를 1928년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보자. 크리스틴이 아들을 찾아 헤매던 그해, 고든 스튜어트 노스콧은 캘리포니아 와인빌의 양계장에서 납치한 남자아이들을 도끼로 살해하고 암매장했다. 마침내 경찰에 검거된 그는 월터 콜린스를 자신이 죽였다고 증언했고, 그 덕에 크리스틴은 정신병원에서 나와 경찰과 시당국을 청문회에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경찰의 부패를 폭로해온 구스타브 브리그랩 목사(존 말코비치)와 시민의 도움으로 크리스틴은 경찰서장과 시장의 옷을 벗기고 노스콧을 교수형시킨다.

<체인질링>은 크리스틴 콜린스 사건이 그러하듯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폭풍 같은 순간들로 가득한 드라마다. 헨리 범스타드의 부재가 아쉽긴 하지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제임스 J. 무라카미가 디자인한 20년대 후반의 LA는 제임스 엘로이의 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생생하고, 장르영화의 고전적인 본질을 잊지 않는 이스트우드의 연출과 편집은 지금 할리우드 시대극의 정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체인질링>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이후 우리가 이스트우드에게 기대할 만한 영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대서양 양편의 서구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대해서 (드물게도) 만장일치의 합의를 보지 못했다. <리베라시옹>은 “이스트우드가 시나리오가 제의하는 도전에 크게 영감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고 느껴진다”고 말했다. <뉴스위크>는 “이야기는 진정으로 선한 자와 악한 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스트우드의 다른 영화들에 들어 있는 도덕적 뉘앙스가 부족하다”고 평했다.

그들의 지적은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데가 있다. <체인질링>이 진정으로 흥미진진해지는 순간은 노스콧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면서다. 카메라는 도끼가 아이들의 몸으로 떨어져내리는 양계장의 학살극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거나 아이들이 암매장당한 황량한 양계장에서 조용히 멈추어선다. 그런데 이스트우드는 거기서 멈춘다. 선과 악은 명확하다. <체인질링>의 노스콧은 이해받을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죽어야만 하는 살인마로만 그려진다. 사실 아버지와 누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노스콧은 출생의 트라우마와 대공황기의 사회가 만들어낸 복잡다단한 괴물이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노스콧의 이야기를 생략한다. 미치광이 연쇄살인마 이야기와 크리스틴 콜린스의 투쟁이라는 두개의 축이 서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 것이다. <체인질링>에서는 <미스틱 리버>나 이오지마 연작에 숨어 있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모호함이 덜하다. 대신 장르영화다운 통렬함은 더하다.

과거에 대한 향수… <더티 하리>와 닮아

현장에서의 안젤리나 졸리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오른쪽).

<체인질링>은 과거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향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악은 지금보다 심플했고 그 덕분에 선이 온전하게 승리하는 것도 가능했던(혹은 그렇게 보였던) 시절 말이다. 그래서 <체인질링>을 <더티 하리>에 가장 가까운 감독 이스트우드의 영화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말했다. “나는 노스콧에게 2년간 독방에 갇혀 있다가 교수형당해야 한다고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순간이 너무나도 통쾌했다. 요즘 판사들은 범죄자들에게 주삿바늘(약물 처형)을 꽂는 것이 잔인한 형벌이라고 걱정하며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우리가 피검사를 받을 때 꽂는 것과 똑같은 주삿바늘을 두고서 말이다.” 이스트우드는 살인마를 동정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그는 여전히 매그넘 44의 방아쇠를 당기는 해리 켈러헌이다.

이야기의 끝은 실제 역사가 그랬듯이 해피엔딩이다. 살인마는 죽고 부패한 경찰과 시장은 쫓겨나고, 크리스틴 콜린스와 LA 시민들은 승리를 거둔다. 영화의 시작 무렵 먼저 주먹을 휘두른 친구를 때렸다고 말하는 아들에게 엄마는 말한다. “절대 싸움을 먼저 시작하지 마라. 그러나 한번 시작한 싸움은 스스로 끝내라.” 이 너무나도 이스트우드적인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 크리스틴 콜린스는 시스템이 걸어온 싸움을 스스로의 손으로 끝장냈다. 이스트우드의 목표가 잊혀진 도덕적 설화를 현대에 되살리는 것이었음은 그 순간 당연해진다. 이 우아하게 매만져진 웰메이드 시대극은 관객에게 눈물로 보답할 것이다. 물론 눈물 이상의 것을 바라는 이스트우드의 관객에게도 <체인질링>은 충분히 보답할 것이다. 막이 내리자마자 떠오르는 수많은 새로운 질문들로 말이다. <체인질링>은 퍼펙트 이스트우드 월드가 내놓은 또 다른 세계의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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