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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t see] <도쿄 소나타> 따뜻한 가족영화라니 당치 않소
김도훈 2009-03-17

공포의 거장인 구로사와 기요시가 그린 가족 지옥도 <도쿄 소나타>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가 3월19일 개봉한다. 한국 내 홍보자료의 문구는 ‘가족에게 찾아온 불협화음이 아름다운 하모니로 변해가는 과정을 다룬 따스한 가족영화’다. 기요시의 팬들이라면 미리 실망할 필요 없다. 따스한 가족영화라니. 대체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건 <큐어>와 <회로>와 <절규>를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다. <도쿄 소나타>는 무시무시한 가족 지옥도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절규>(2006)는 걸작이었다. 그러나 <절규>는 정식으로 국내 개봉하지 못했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나 ‘넥스트플러스 영화축제’ 같은 기회를 통해 소수의 구로사와 팬들을 만났을 따름이다. 정식으로 개봉해봐야 돈을 벌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일까. 억측은 젖혀두자. 문제는 <절규>를 먼저 거론하지 않고서는 <도쿄 소나타>를 이야기하는 게 조금 재미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절규>는 구로사와 기요시 호러영화의 어떤 정점 같은 것이었다. 현대 일본의 평범한 일상에서 조용히 스며나오는 불안과 공포. 도저히 풀리지 않으며 풀어봐야 의미도 없는 미스터리. 소외되어 죽은 망자들의 귀환과 복수. 그 모든 것을 통해 도달하는 이성과 문명의 종말. <큐어> <도플갱어> <회로>를 통해 뻗어나온 구로사와의 세계는 <절규>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런데 <절규>는 구로사와 호러영화의 정점인 동시에 일종의 종합 정리이기도 하다. 하긴 그럴 때가 됐을지도 모른다. (서로 성향이 굉장히 다르긴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와 나카다 히데오가 끓어올린 J-호러의 붐은 일본인 자신들과 옆동네 한국인, 할리우드의 끝없는 복제로 금세 끝이 났다. <회로>가 할리우드식으로 리메이크되어 스스로의 아우라를 갉아먹은 게 정점이었다. 나카다 히데오는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일본으로 돌아와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을 만들며 자폭했다. 사실 나카다는 원래 스튜디오의 요청을 잘 따르는 상업감독이었으니까 자폭이라고까지 표현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아쉬운 건 사실이다. 자신의 가장 ‘덜’ 흥미로운 호러영화 <로프트>를 만들고 <절규>로 자신의 장기를 재확인한 구로사와는 뭘 하고 있었느냐. 그는 1년을 쉬다가 오스트레일리아 각본가 맥스 매닉스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했다. 호러가 아니다. 가족드라마다.

전형적인 가족, 현대 일본의 미니어처

<도쿄 소나타>의 주인공은 도쿄의 전형적인 가족이다. 가장인 사사키 류헤이(가가와 데루유키)는 어느 날 갑자기 회사로부터 해고당한다. 중국인 직원들이 값싸게 그의 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체면을 지키기 위해 가족에게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결심한 류헤이는 매일 슈트와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집을 나와 직업소개소를 찾아다니며 노숙자 배급소에서 끼니를 때운다. 가장의 실직만이 이 조용한 가족의 문제는 아니다. 사춘기를 방황으로 보내던 큰아들 다카시는 갑자기 미군에 지원한다. 막내아들 켄지는 극렬한 류헤이의 반대에도 몰래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다. 남편 류헤이가 직장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내 메구미는 위태로운 가족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지키려 애쓰지만 한번 침몰하기 시작한 가족은 끝없이 가라앉는다.

구로사와가 <도쿄 소나타>를 연출하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지금까지의 경력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부터 새롭게 반영해야 하는 시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관객이 <도쿄 소나타>를 내 이전 작품과는 전혀 다른 영화로 받아들이길 원한다. 내 영화가 해외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나보다 젊은 감독들이 데뷔했고 J-호러 같은 트렌드도 생겨났다. 나 역시 그 물결에 올라타서 작업해왔지만 결국 20세기에 이미 실패로 끝났던 작업의 연장선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확실히 <도쿄 소나타>는 전작들과 다르다. 호러 장르가 아니라는 건 표면적인 차이점이다. <도쿄 소나타>는 호러 장르를 우화적으로 이용해 현대 일본의 황폐한 집단 무의식을 비판하던 전작들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현대 일본’이라는 소재를 다룬다. <도쿄 소나타>의 가족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분명한 미니어처다. 외부로부터 무너져내린 권위를 가족에게만 휘두르는 처량한 가장,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전쟁과 미국을 신봉하는 젊은 아들, 그 모든 걸 다잡아보려 하지만 외부세계에 대한 아무런 경험도 지식도 없는 어머니. 일본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모두 여기에 있다.

구로사와는 “현대 도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가족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동안, 이미 외부 세계의 거대한 힘은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외부 세계의 움직임에 의해 가족은 끊임없이 좌지우지될 거다. 영화 속 가족은 직접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 일본은 직접적으로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렇다면 내부 구성원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내부의 모든 것을 바깥 세계의 변화와 직시하도록 하는 게 더 나은 일인가. 많은 일본인들은 일상적으로 이런 선택과 마주한다. 21세기를 혼돈 속에서 살아간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다.” <도쿄 소나타>의 가족이 붕괴되는 것은 국제적 인력시장에 문을 열어젖힌 일본 회사의 정책 때문이다. 구로사와는 그것이 일본의 실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변화일 따름이다. 구로사와는 다만 변화가 가져오는 가족(일본) 붕괴의 과정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파멸을 부르는 악마는 내부의 균열

특히 은유가 아니라 직유의 방식으로 현대 일본의 정치성을 대변하는 건 큰아들이다. 그는 갑자기 미군에 입대한다. 심지어 그는 일본인 청년들을 위한 미군 입대 버스에 오른다. 사실 일본인 국적을 가진 사람이 그토록 쉽게 미군에 입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큰아들의 입대는 구로사와가 “가까운 미래의 일본을 상상”해서 집어넣은 이야기다. 이유는 간단하다. <절규>에서 명확하게 보여줬듯이 구로사와는 2차대전의 기억을 망각한 현대 일본사회의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한탄한다. 그래서 <도쿄 소나타>의 큰아들 캐릭터는 젊은 세대의 정치적 진공 상태에 대한 구로사와의 직설적 코멘트에 다름 아니다.

“만약 영화에서처럼 일본인의 미군 입대가 쉬워진다면, 나는 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전쟁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지금 일본의 닫혀 있는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필요한 옵션이 전쟁일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본은 전쟁을 도발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국가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그게 변해야 한다고 느낀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지금 일본의 상황이 마음 깊이 두렵다. 하지만 영화 속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젊은이들이 전쟁에 나가는 걸 막기 위해 어떤 조언을 해줘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공기에서조차 균열을 볼 수 있을 만큼 미묘하게 팽팽한 불안감을 안고 가다가 클라이맥스에서 끈을 확 놓아버리는 구로사와의 거장다운 (장르적) 세공법은 여전하다. 가족의 파멸은 그저 서로를 원망하고 눈물흘리며 울부짖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구로사와는 원혼의 실마리를 잡자마자 전세계적인 종말론으로 치달아버리던 <회로>나 <절규>처럼 영화의 후반부를 끌고 간다. 큰아들은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버린다. 작은아들은 차비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치소에 갇힌다. 아내는 갑자기 나타난 광인(야쿠쇼 고지가 극적으로 연기한다!)에게 납치되어 버려진 바닷가 별장에 갇힌다. 그리고 가장은, 죽는다.

류헤이와 가족의 파국을 그리는 구로사와의 필치에는 어떠한 블랙코미디적 웃음도 없다. <도쿄 소나타>에는 허공을 걸어다니며 원죄를 묻는 원혼이 없다. 그러나 원혼의 복수 없이도 희생자들은 무방비상태로 쓰러지고 무너져버린다. 이건 분명히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다. 일상적인 리얼리티는 한순간에 초현실적인 파국으로 치닫는다. 파국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악마와 원혼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구로사와 영화의 악마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 세계에 어렴풋이 존재하다가 한순간에 터져나오는 내부의 균열이다. 바로 그 때문에 캐릭터와 우리는 구로사와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를 넋놓고 바라볼 도리밖에 없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희망의 단초를 놓지 않는 마지막 장면

※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주의(지나치게 민감하지만 않다면 보아도 무방한 스포일러긴 하다. 구로사와의 영화에서 스포일러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런데 <도쿄 소나타>의 마지막 장면은 갑작스러운 반전이다. 분명 류헤이는 죽었다. 구로사와는 그를 되살려낸다. 그리고 큰아들을 제외한 가족은 막내아들 켄지의 피아노 콩쿠르에 참석한다. 켄지는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을 멋지게 연주한다. 연주가 끝나자 가족들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퇴장한다. 이상할 정도로 이 마지막 엔딩은 꿈이나 환상처럼 여겨지지만 어쨌거나 미세한 희망의 전조인 것은 틀림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진정한 희망에의 기운을 불어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짜 희망을 안겨주는 것 또한 아니다. 어쨌거나 그들은 뭔가를 극복하려고 시도하면서 끝난다. 큰아들은 가버렸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가족 모두는 여전히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문제를 풀어보려는 시도는 시작됐다.” 그러니 “저는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죽어주세요”라고 절규하던 <절규>의 종말과 <도쿄 소나타>의 마지막은 확연히 다르다.

“요즘 나를 사로잡는 주제는 21세기가 대체 어떤 시대인가 하는 것이다. 왜 모든 것이 이토록 혼잡하고 혼란스러운 걸까. 왜 21세기는 이전 세기에 우리가 기대했던 미래의 비전과 이토록이나 다른 것일까. 이런 시대에 대한 책임은 대체 누가 져야 하는가. 대답을 찾기는 힘들다. <도쿄 소나타>는 이런 복잡한 문제들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서 창조되었고, 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황홀경의 종말을 그리던 공포의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는 <도쿄 소나타>에서 마지막 희망의 단초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류헤이와 구로사와의 일본은 죽어넘어졌지만 새로운 세대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드뷔시의 선율로부터 또 다른 재생과 재활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래서 <도쿄 소나타>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소나타다. 그는 이미 호러 장르에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신전에 올랐다. 장르 속에서 해낼 만한 모든 것을 다 해냈다. 그건 끝이 아니었다. <도쿄 소나타>는 장르의 바깥에서 새로운 챕터를 열어젖혔다. 절규의 절벽에서 또 다른 대륙을 찾아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여전히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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