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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편의 신작 구상] 2.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정재혁 사진 오계옥 2009-04-07

가장 이준익다운 이야기

구름을 벗어나려 했던 사람. 서자로 태어나 세상이 가둔 굴레를 뛰어넘으려 했던 남자.

이준익 감독이 차기작으로 택한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주인공 견자는 시대의 압박과 싸워나가는 인물이다. 그는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철벽 같았던 조선시대를 대상으로 세상의 한계를 물었고 나아가 자신의 한계와도 맞섰다. 타이거픽처스 조철현 대표의 제안으로 박흥용 작가의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읽은 이준익 감독은 주인공 견자의 드라마틱한 면모에 마음이 끌렸다. 이후 만난 박흥용 작가의 세계관, 사고방식에도 동의했다. 자연스레 영화화를 생각했고 조철현 대표의 시나리오를 받아 같은 이름의 영화 초고를 완성했다. <즐거운 인생> <님은 먼곳에>에 밀려 뒤늦게 구체화됐지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여러모로 이준익 감독의 영화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부정한 정치세계를 바탕으로 한 시대 설정도 그렇고, 세상의 아이러니를 감내하며 그 안에서 스스로의 탈출구를 찾는 인물의 드라마도 그렇다. 많은 부분들이 <왕의 남자>를 연상케 한다. 계급사회의 부조리함 속에서 굴곡을 타고 흐르는 인물들의 이야기와 정치에 대한 조롱, 그리고 이념 싸움으로는 쉽게 풀리지 않는 삶의 슬픈 수수께끼까지. 조심스레 추측하건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이른바 음악 3부작으로 불리는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님은 먼곳에> 이전의 이준익으로 돌아가는 한편의 영화가 될 듯싶다.

먼저 원작을 부수고 다시 조립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는 크게 세 인물이 등장한다. 하나는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벼슬길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견자고, 다른 하나는 서자에 맹인으로 태어나 9살까지 항아리 안에서 숨어 살아야 했던 황정학, 그리고 마지막은 부패한 정치판을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역시 서자 출신 이봉학이다. 서자들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견자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론 황정학, 왼쪽으론 이봉학을 끼고 있는 구도다. 똑같이 세상에 불만을 느낀 이들이지만 이봉학이 혁명으로 판을 뒤집어야 한다고 믿는 것과 달리 눈이 아닌 지팡이로 세상을 보는 황정학은 세상을 탓하는 것의 종점은 결국 자신이라 생각한다. 견자는 황정학을 스승 삼아 그와 길을 떠나며 그 과정에서 불만만 토하고 살았던 철없던 시절의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성장한다.

영화는 원작의 기본 틀은 그대로 가져왔지만 많은 부분을 고쳤다. 이준익 감독은 “아무리 원작이 있어도 일단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땐 원작을 부숴야 한다”는 마음으로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분해해,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으로 조립했다. 만화의 칸이 채우지 못하는 부분도 채워넣었다. “만화는 점핑이 큰 편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 사이를 메워줘야 한다.” 다소 관념적으로 진행되는 견자의 성장 과정을 ‘실존’으로, 디테일한 관계들로 촘촘히 메웠다. 그 결과 시나리오엔 이봉학이 견자의 아버지를 죽인 남자라는, 견자의 여인이기만 했던 백지가 본래 이봉학의 여자라는 설정이 추가됐다. 서로 다른 이상 사이에서만 고민했던 견자에게 좀 더 현실적인 고민과 갈등의 지점을 새겨넣은 셈이다. 그 사이 시나리오는 50고를 넘겼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장르를 굳이 이야기하면 액션이다. 견자가 황정학에게 검을 배우는 과정을 비롯해 그가 부딪치는 많은 사람들과의 검투장면이 영화 곳곳에 배치된다. 물른 그 액션들은 드라마를 품고 진행되지만 이준익 감독이 이번 영화에서 액션에 거는 기대는 크다. 견자가 쓰는 무기인 검은 그가 자신을 숨겨야 할 대상이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비주얼적인 욕심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번에 연출부를 대폭 바꿨고, 촬영을 정정훈 감독에게 맡겼다(박스 참조). “장도리 액션 같은 거 해보라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 이준익 감독과 정정훈 촬영감독의 조합은 분명 이전 이준익 감독 영화와는 다른 영상을 만들어낼 테다. 반면 전체적인 미술은 정갈한 느낌으로 간다. 광대가 주인공인 <왕의 남자>가 붉은색을 중심으로 발산하는 느낌의 미술을 보였다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주인공 견자가 스스로의 세계를 차분히 돌아보는 게 주가 되는 만큼 “담백한 느낌”이 될 거다. “무엇을 더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덜하느냐.” 이준익 감독이 말하는 이번 영화의 미술 컨셉이다.

다시점의 다층적인 드라마를 추구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영화로 옮기면서 이준익 감독이 바꾼 건 결국 1인 성장극에 가까운 원작을 일종의 관계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조정한 것이다. 직선으로 연결됐다 끊기고 마는 원작의 인물들은 영화에서 병렬로, 앞뒤를 물고 이어진다. 견자, 황정학, 이봉학을 중심으로 백지, 견자의 아버지인 한신균, 당시 왕인 선조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행동의 원인을 제공한다. 복수, 애정, 흠모, 대립 등이 이들의 관계를 잇는다. 이준익 감독은 이를 “<왕의 남자>가 4개 삼각형의 이야기라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7개 삼각형의 드라마”란 말로 설명했다. 각각의 드라마가 겹치면서 생기는 풍부함이 그가 추구하는 바다. “다시점의 다층적인 드라마.” 이는 그가 이미 <왕의 남자>에서 한차례 솜씨좋게 뽐낸 바도 있다. ‘2009년 이 시점에 왜 사극을 이야기하는가’의 당위성 문제도 빼놓을 순 없다. 이준익 감독은 “지금 다시 옛날이야기를 할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며 “관객이 영화 속 견자를 통해 자신에게도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는 걸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더불어 “일정 정도 요즘의 개인주의와도 비슷한 견자의 태도가 너무 좁은 건 아닌가”라는 질문도 던졌다. 그가 영화를 통해 일관되게 구해왔던 대중에 대한 어떤 동의가 이번 영화에선 견자란 인물을 통해 이뤄지게 된다. 역사의 질곡과 거기에 파묻혀 고민하는 인물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이준익 감독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리고도 편안한 재료일지 모른다.

비장의 무기! ‘비주얼 스펙터클’에 큰 기대

이준익 영화의 때깔이 달라진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촬영을 맡을 사람은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의 정정훈 촬영감독이다. 이준익 감독의 구수한 영화에 정정훈 감독의 날선 촬영이 어울릴까 싶지만 이번 영화에서 화면에 욕심이 많다. 정정훈 촬영감독 외에도 조연출 자리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조연출을 비롯해 김지운 감독 밑에서 오랫동안 연출부를 지낸 이안규 조감독이 이름을 올릴 예정이고 유하 감독의 연출부, 박찬욱 감독의 연출부도 스탭으로 참여한다.

“왜 내 영화 촌스럽다고 말하잖아. 그럼 사람이 반성을 해야지. 그래서 난 반성했지. 그럼 다음엔 뭐해? 개선을 해야지. (웃음)” 그래서 이준익 감독은 이번 영화의 연출부를 대폭 바꿨다. 어떤 영화가 될지, 어떤 현장이 될지 본인도 확실히 모르겠다지만, 일단은 “드라마 스펙터클”은 이준익 감독이, “비주얼 스펙터클”은 정정훈 촬영감독에게 맡기겠다는 마음. 이준익 영화에서 ‘장도리 액션’같은 시퀀스를 볼 날이 이번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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