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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1. 거장과 신예
씨네21 취재팀 2009-04-30

지금 세계 영화의 최전선을 지금 여기서 볼 수 있다. 동시대의 영화사를 이끄는 거장과 신예들이 영화의 한 진풍경을 만들어낸다.

<멜랑콜리아> Melancholia

감독 라브 디아즈 | 필리핀 | 2008 | 480분 | DV | 흑백

정치적이고 실험적이며 시적이기까지 한 걸작. 안토니오 셰라드 산체스, 라야 마틴, 카븐 드 라 크루즈, 말하자면 ‘필리핀영화의 무서운 아이들’을 선두에 서서 이끄는 라브 디아즈의 신작이다. 줄리안, 알베르타, 리나. 그들은 실패한 혁명 전사들이다. 지금은 과거에 대한 상처를 안고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은 잊혀지지 않았으며 혹은 알베르타의 남편 레나토처럼 영영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다.

줄리안은 자신의 기억과 필리핀영화의 역사를 관통시켜 영화로 만들 계획을 한다. 영화는 8시간이라는 긴 상영시간 동안 과거, 현재, 대과거, 그리고 다시 현재라는 시간을 오가며 이들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영화는 단순하게 정치적인 주장을 투사하는 대신 근본적인 태도로 인간의 불행과 행복에 대해서 질문한다. 때로는 시적이고 음악적인 방식으로 역사를 성찰한다. <멜랑콜리아>는 디지털영화의 극단적인 한 경향을 경험하는 것으로도 가치가 있으며 지난해 전주영화제에서 상영했던 라브 디아즈의 걸작 <엔칸토에서의 죽음>과 동전의 양면으로 놓고 보아도 무방하다. 긴 상영시간이 부담되지만 한번 통과하면 오랫동안 잊지 못할 영화.

<쉬린> Shirin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 이란 | 2008 | 91분 | HD | 컬러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오랜만의 신작. 디지털 세계로 접어든 다음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현실과 허구를 오가던 예전의 영화보다 훨씬 극단적인 면모를 갖췄다. 이번 상영작 <쉬린>은 그중에서도 그가 오즈 야스지로에게 헌정했던 영화 <파이브>와 함께 키아로스타미식 미니멀리즘의 끝점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쉬린>에 등장하는 것은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는 130여명이나 되는 수많은 여인의 얼굴들이다. 그들이 지금 영화에서 보는 건 <코스로우와 쉬린>이라는, 왕의 여인이지만 다른 남자를 사랑한 쉬린이라는 여자의 이야기이며 800년 전부터 내려오던 페르시아 비극이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본다고 가정될 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텅 빈 화면을 보는 배우들의 표정이고 화면 밖에서는 끊임없이 <코스로우와 쉬린>의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를 통해 키아로스타미는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한 영화보기의 경험을 요구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이 영화를 두고 “나의 가장 진전된 시네마토그래픽 필름”이라고 불렀다.

<다크 하버> The Dark Habor

감독 나이토 다카쓰구 | 일본 | 2008년 | 101분 | 35mm | 컬러

외로움에 사무친 남자, 38살 노총각 어부 만조는 절실하게 아내를 원한다. 일, 장보기, 식사, 외출까지 그는 모든 일상에서 철저히 혼자다. 마을에서 주선한 도시 여자들과의 맞선 이벤트에서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한 날, 만조는 그의 집에 숨어든 모자(母子)의 정체를 발견한다. 함께 살던 남자가 남기고 간 아들 마사오까지 데리고 무단침입한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은 미치코. 혼자 마시는 공기에 질식 직전이던 만조는, 두 사람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가족과 함께하는 소소한 행복을 알아가던 만조의 백일몽은 그러나, 경제력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산산이 깨어진다.

경쾌하고 노골적인 음악과 무언극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효과적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다크 하버>는, 동화와 현실을 오가는 블랙코미디다. 박장대소할 부분은 없어도 낄낄거릴 장면은 파다하다. 구강성교를 제안하는 창녀의 수신호를 음료수를 마시고 싶다는 뜻으로 오해해 캔을 건네는 등 물정 모르고 계산없는 어촌민들의 순박함도, 가랑비에 옷젖듯 영화에 빠지게 만든다.

<밀랍> Beeswax

감독 앤드루 부잘스키 | 미국 | 2009년 | 100분 | 35mm | 컬러

“20~30대 캐릭터, 관계에 집중, 초저예산, 비전문 배우, 즉흥적인 대사의 웅얼거림”으로 규정되는 미국 인디계의 소장르, ‘멈블코어’(Mumblecore)의 대표감독 앤드루 부잘스키의 세 번째 영화. “너나 잘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Mind Your Own Beeswax”(밀랍, Business 대신 사용됨)에서 제목을 따왔다.

주인공은 쌍둥이 자매 지니와 로렌이다.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 신세를 지는 지니는 중고 옷가게의 동업자와 운영권을 놓고 법적 소송 중이고, 로렌은 두 남자와 두 직업 사이에서 갈등 중이다. <밀랍>은 전형적인 멈블코어의 공식대로 특별한 서사없이 진행된다. 상황은 일상처럼 던져지고 그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갈 뿐이다. 인물들은 희로애락을 표출하며 ‘삶의 편린’을 그려내지만 어떤 극적인 제스처도 취하지 않는다. 별것 아닌 일에 웃고 별것 아닌 일로 마음이 상한다. <밀랍>의 신선함은 비전문 배우들의 꾸밈없는 연기에서 나온다. 실제로는 자매지만 쌍둥이를 연기한 두 배우가 영화에 생기를 더한다.

<나무 아래서> Under The Tree

감독 가린 누그로호 | 인도네시아 | 2008년 | 104분 | 35mm | 컬러

발리 섬 원주민들의 제의의식으로 여는 영화의 첫 장면은 꽤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보여주는 춤과 전통음악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신비로울 거라고, 그리고 고전적인 서사대로 전개되진 않을 거라고 예고하는 듯하다. <나무 아래서>에는 세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첫 번째 여자, 자카르타에서 온 그녀는 택시를 타고 ‘무언가’를 찾으러 간다. 두 번째 여자, 임신을 한 그녀는 의사에게서 뱃속의 태아가 기형아라는 사실을 전달받고 고통스러워한다. 세 번째 여자, 몸에 문신을 새기는 그녀는 계란껍질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를 따라다닌다.

세 가지 상황을 통해 감독은 ‘어머니’, ‘고통’, ‘사랑’, ‘예술’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진 않는다. 더군다나 영화의 마지막, 임신을 한 여자가 초반부인 첫 번째 여자의 택시에 타는 장면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마치 관객이 자유롭게 생각하게 하려는 듯. 그래서 누구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현실을, 또 다른 누구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그렸다고 해석할지도 모른다. 모두 다 맞는 해석이다.

<노던랜드> The Northern Land

감독 주앙 보텔료 | 포르투갈 | 2008년 | 121분 | HD | 컬러

음험한 산들. 거센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바닷물에 몸을 맡긴 자갈들도 보인다. 이곳은 마데이라, 포르투갈의 섬이다. 이 괴이하지만 수려한 섬은 시시 가족의 삶의 기반이었다. 선조 여인들이 남긴 기록을 추적하던 시시는 그들의 생이 자신의 그것과 깊숙이 연결돼 있음을 느낀다.

아구스티나 베사 루이스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한 <노던랜드>는 과거와 현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교차시키는 영화다. 당시로선 혁명적으로 남편을 떠나 홀로 ‘노던랜드’에 머문 로자문드를 비롯해 옛 영혼들의 잔영은 여전히 마데이라 섬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아이 중 그녀들과 비슷한 아이들이 태어나곤 했다’. 연극은 물론 갖가지 미술 작품을 실험적으로 인용하곤 하는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유디트’다. 아시리아의 장수 홀로페르네를 유혹해 잠자리를 가진 뒤 그의 목을 가차없이 그어버렸다는 그 매혹적이고도 용맹한 여성. 조국의 구원자이자 마리아의 전신이며 살인자이기도 한 유디트는, 어쩌면 모든 여성들의 얼터에고가 아닐지. 부산할 만큼 여러 옥타브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를 빌려 한 가족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수작.

<파르케 비아> Parque Via

감독 엔리케 리베로 | 멕시코 | 2008년 | 86분 | 35mm | 컬러

베토는 ‘파르케 비아’의 관리인이다. 오랫동안 주인을 찾지 못한 저택을 홀로 지키는 그는 규칙적인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만나는 이라곤 가끔 그곳을 찾는 집주인과 일주일에 한번 정사를 갖는 창녀 루페뿐. 저 넓은 방들을 놔두고 왜 자신의 방에서만 섹스를 하냐는 루페의 물음에도 베토는 고지식하게 룰을 따른다. 그는 의지하되 소유할 수 없는 삶에 익숙해 있다. 그 특별할 것 없는 생에 젖어들 찰나, 이 늙은 남자에게도 위기가 닥쳐온다.

<파르케 비아>는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할 만큼 사실적인 영화다. 좁은 복도를 노니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건조하고, 매일은 지루할 만큼 엇비슷하다. 그러나 정지된 얼굴 아래 간혹 억눌린 욕망이 내비친다. 창밖을 바라보던 베토가 무심히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처럼. 그리고 가여운 남자의 운명이 간신히 궤도에 오르기 직전, 영화는 충격적인 결단을 내린다. 그 순간의 진실을 온전히 소유할 이는 드넓은 저택을 쓸고 닦으며 이에 전적으로 기대온 자그마한 노인 베토밖에 없다는 듯. 말수는 적지만 영리한 2008년 로카르노영화제 대상수상작.

<하상적 애정: 물 위의 사랑> Cry Me A River

감독 지아장커 | 중국·스페인·프랑스 | 2008년 | 19분 | HD | 컬러

19분짜리 짧은 단편이며 시네마 스케이프 단편부문에서 상영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따로 떼어 소개하는 이유는 지아장커의 신작이기 때문이며 그의 다른 장편영화들에 비교해도 적지 않은 감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한 지 10여년쯤 되는 네명의 남녀 친구들이 은사의 생일잔치를 위해 다시 모인다. 즐거운 저녁 한때가 지나고 그 다음날 그들은 한쌍씩 짝을 지어 도시를 돌아다닌다. 그들은 과거에 서로 사랑했던 사이며 지금은 각자의 삶이 있다.

하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지만 그들의 시간은 지나버렸다. 단편영화의 실습작으로 누구나 꿈꾸는 그런 상투적 소재이며 또한 그 얼마나 많이 다뤄져왔던 소재인가. 그럼에도 세월을 어루만지는 지아장커의 은은함이 빛난다. 지아장커의 예의 그 카메라는 인물을 느릿느릿 쫓다가 마치 카메라 그 스스로의 기억에 빠진 듯 잠시 멈춰 서기도 하고 다시 인물을 쫓기도 하면서 극의 안과 밖을 오가는 감정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짧지만 아름다운 지아장커식 연애담. 지아장커는 이 영화를 자신과 같은 1970년대생들에게 바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