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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없는 산> 엄마없는 하늘 아래, 리얼한 슬픔의 빛깔
이화정 2009-08-27

버림받은 채 떠도는 어린 자매 이야기 <나무없는 산>

냉정함과 따뜻함. 김소영 감독의 영화는 아이러니하지만 이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지닌 이상 생명체다. 전작 <방황의 날들>에서 눈길을 거두기 힘들 정도의 설득력으로 이민 1.5세대 에이미의 성장통을 설명한다. 어떤 수식도, 이해도, 동정도 구하지 않은 채 감독은 잔인하게 영화를 닫아버리지만 관객은 에이미에게 동요한다. 지나치리만치 사실적인 감독의 시선은 버림받은 채 떠도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나무없는 산>에서도 그대로 재연된다. 아이들을 위해 당연히 연민이 들어설 거라는 섣부른 예상과 달리 감독은 잔혹한 현실에 무방비상태가 된 아이들의 표정을 노출시킨다. <방황의 날들>에서 아이들이 듣던 음악마저도 차단된 절대무음의 상태. 실제 로케이션과 연기경험이 없는 아역 배우, 그리고 현장음만으로 감독은 리얼한 슬픔의 빛깔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버림받은 아이들에 대한 영화적 해답은 이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에서 완성됐는지 모른다. 엄마가 떠나간 빈자리, 아이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아픔을 간직한 채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힘겨운 투쟁을 한다. 햇빛 쏟아지는 화사한 풍경 속, 아이들의 삶은 처절하지만, 섣부른 감정의 동요는 금물이다. 슬픔을 좀체 종용하지 않는 <아무도 모른다>의 묘사가 가능했던 건 고레에다 감독이 철저히 아이들이 바라보는 시점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동정심만 앞세우는 어른들의 시선이 개입됐더라면, 매 장면 영화는 어른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값싼 눈물만을 구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애들을 그냥 가만히 지켜볼 것인가, 아니면 동정심을 부추길 것인가?” 김소영 감독이 <나무없는 산>을 통해 관객에게 던진 질문은 <아무도 모른다>가 완수해낸 리얼한 아이들의 세상과 일맥상통한다. <나무없는 산>은 엄마(이수아)에게 버림받은 자매 진(김희연)과 빈(김성희)의 이야기다. 집 나간 남편 몫까지 도맡아야 하는 엄마에게 아이들은 버거운 짊이다. 끝나지 않는 아이들의 여정이 시작되는 건 이때부터다. 생활고에 쫓기던 엄마는 급기야 아이들을 지방의 고모집에 맡긴다. 그러나 퍽퍽한 삶, 술로 연명하는 고모 역시 아이들을 돌보기엔 역부족이다. 아이들의 유일한 희망은 ‘돼지 저금통이 꽉 차면 돌아오겠다’는 엄마의 약속뿐이다. 돈을 모으기 위해 아이들은 메뚜기를 구워 팔며 저금통을 채운다. 그러나 저금통이 꽉 찬 순간, 돌아온 건 엄마가 아니라 엄마의 편지 한통이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절망적인 편지 내용에 아이들은 고모집에서 다시 시골 할아버지집으로 내맡겨진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듯이, 작은 아이들은 거친 세상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한없이 부유한다.

아이들의 표정에서 잔혹한 현실을 고발

결핍은 따가운 직사광선처럼 아이들의 머리 위에 내리꽂힌다. 아무리 궁리해봐도 피할 수 없는 현실. 김소영 감독의 카메라는 대담하고도 적나라하게 궁지에 몰린 아이들의 얼굴로 다가간다. 엄마가 짐짝처럼 아이들을 내맡길 때도, 낯선 환경에 적응 못하는 아이들에게 가하는 고모의 가혹한 질타가 이어질 때도 카메라가 좇는 것은 언제나 아이들의 얼굴이다. 화면 한 가득 작은 아이들의 얼굴이 꽉 차는 순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 영화의 드라마는 시작된다. 조작되지 않은 이 드라마에 존재하는 것은 세상에 겁먹은 아이들의 눈동자, 할 말을 찾지 못한 작은 입술이 전부다. 1초, 2초, 3초, 4초… 미세하게 변화하는 표정 속에 아이들의 삶의 그늘은 무한 확대된다. 다소 냉정하지만 김소영 감독은 이 잔인한 지켜보기를 그치지 않는다. “잠깐 ‘보여준다’가 아니라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거다. 극대화된 클로즈업이 아이들의 감정을 침범한다는 비판적인 시선도 많았다. 그러나 얼굴에 무엇이 보이는지 탐구하면 결국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효과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이민 1.5세대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던 전작 <방황의 날들>보다 족히 1.5배는 더 인물들의 감정으로 다가선다. 장 뤽 고다르가 ‘클로즈업은 비극을 위해 고안된 카메라 기법’이라 정의했듯이 아이들의 얼굴에 카메라가 바짝 다가가는 순간,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불행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감독의 냉정한 지켜보기가 가장 적극적인 감정의 개입으로 뒤바뀌는 것도 이때다. 버려지고 내쳐지는 아이들이 존재하지만 눈도 꿈쩍하지 않는 세상, 아무런 사건도 되지 못하는 이 ‘일상’의 한 조각들은 빈번하게 적용되는 클로즈업으로 낱낱이 고발된다.

사실적인 영상 위해 음악도 사용 안해

아이들의 불행은 전시해야 할 소품이 아니었다. “스탭들 그 누구도 우리 영화가 <미스 리틀 선샤인> 같은 영화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감독은 영화에 클로즈업 외에 감정을 유발시킬 어떤 효과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 결과 카메라와 아이들의 얼굴 사이로 개입하는 것은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전부다. “영화 속에 일체의 음악을 사용하지 않은 것도 사실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이 감정을 ‘느껴라!’하는 것은 결국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내버려진 슬픔,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에도 차마 울음을 터뜨리지 못하는 진과 빈의 가혹한 현실은 엄마를 잃은 ‘뽀네뜨’(<뽀네뜨>)가 주었던 감동의 농도를 희석시킨다. <뉴욕타임스>는 <나무없는 산>이 제시하는 이처럼 사실적인 영상을 들어, 2차대전 뒤 폐허와 잿더미로 점철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끈을 발견한다. 바로 현대판 디킨스를 연상케 하는 피할 길 없는 현실의 광경이다.

아이들에겐 상처를 치유할 연고도, 어떤 도움의 손길도 쉽사리 제시되지 않는다. 매일매일 엄마가 떠난 버스 정류장에 가서 오지 않을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린다거나, 저금통이 꽉 차면 돌아온다는 엄마의 약속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메뚜기를 구워 팔아 돈을 모으는 방법이 아이들이 찾아낸 해결책의 전부다. 그리고 100원짜리 동전을 10원짜리로 바꾸면 더 많은 동전을 만들 수 있다는 자구책까지 마련하게 된 건 그만큼 그들의 바람이 절실해지는 단계다. 희망이 낙담으로, 체념으로, 절망으로 점차 퇴색되는 동안 진은 스트레스성 야뇨증으로 고통받고, 엄마가 사준 빈의 하늘색 천사 드레스는 낡고 빛이 바래간다.

“스튜디오에서 제작되는 영화를 만들었다면 아이들에게 어떤 확실한 희망을 전달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집을 나간 엄마가 돌아와서, ‘엄마!’하고 아이들이 반기는 신 말이다. (웃음)” 김소영 감독은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솔직히 사람들 사는 걸 생각해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투성이다. 그런데 무작정 해피엔딩으로 거짓 희망을 주고 싶진 않았다.”

후반부 와이드 앵글이 전하는 희망의 불씨

89분의 전개, <나무없는 산>은 이 짧은 여정에 아이들의 미래를 심는다. 삭막하게 포장된 서울을 떠나 발전의 속도가 더딘 지방의 소도시인 고모집으로, 그리고 논과 밭이 있고 가마솥에 밥해 먹는 시골 할머니 집으로 옮겨가는 동안 놀랍게도 아이들의 희망도 한뼘쯤은 자란다. 아이들의 시선을, 감정을 살피느라 바빴던 카메라는 결국 할머니 집으로 오면서 감춰뒀던 무한한 앵글을 관객에게 내준다. 농촌의 풍광 속 어우러진 작은 아이들의 몸짓은, 같은 와이드 앵글이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며 심적 압박을 느꼈던 그 몸짓과는 사뭇 다르다. 조금은 외부세계에 마음을 열고, 조금은 그 나이 또래처럼 활발해질 수 있는 아이들.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성장할 수 있는 작은 토양이 이 영화가 제시하는 최소한의 그리고 가장 커다란 희망이다. “꼭 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괜찮았다. 진과 빈이 앞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느낌만 주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 절대 뿌리내리지 않을 것 같은 마른 나뭇가지를 손에 쥔 아이들은 땅에 심고, 물을 주면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 믿음은 결국 받아들여질 곳 없는 현실 속, 그래도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아이들 자신의 모습과 똑같이 닮았다. 자연의 요소에서 생명력을 발견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무한한 감동. <나무없는 산>은 어린 두 아이의 여정을 통해 그 원초적인 에너지를 전달해준다. 그건 결국 슬픔도 고통도 아닌, 가슴속 한가득 먹먹해질 수밖에 없는 인생의 섭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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