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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 여성 캐릭터로 보는 한국영화 100년展>을 가다
이화정 사진 백종헌 2019-08-08

그들이 싸워온 세상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 스크린은 여성을 어떻게 그려왔을까. 남성 중심의 시스템하에서 편견과 차별의 시선으로 그려져온 여성 캐릭터를 다시 돌아볼 뜻깊은 기회가 마련된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 여성 캐릭터로 보는 한국영화 100년展>이 10월 13일까지 열린다. 잘못 호명되었다면, 지금부터 바꾸면 된다. 다가올 100년의 미래,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나갈 발판이 될 의미 있고 흥미로운 전시다.

<사방지>(1988)의 사방지(이혜영)의 기괴한 정면 클로즈업 컷이 반복되는 영상, 영상의 대각선 맞은편에서는 <마더>(2009)의 마더(김혜자)가 한껏 눈을 뜬 기이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고개를 돌리니 옆의 영상에선 <마녀>(2018)의 구자윤(김다미)이 입에 잔뜩 피를 묻힌 채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마주하고 있는 각각의 영상 속 캐릭터 모두 ‘도를 넘은’ ‘센’ 행동을 반복한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진다. 아니, 이 구역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여성 캐릭터의 이미지들이 쏟아진다

상암동에 자리한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실. 오는 10월 13일까지 열리는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 여성 캐릭터로 보는 한국영화 100년展>이 시작됐다. 지난 7월 12일 개관일 오전 서둘러 전시장을 찾았다. 여성 캐릭터의 이미지가 나열된 전시장 입구를 통과하면 곧 전시장을 가득 메운 스크린 속 영상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대로 동선을 따라가보면 벽면에 여러 개의 거울이 부착되어 있다. 앞서 보았던 여성 캐릭터의 얼굴을 떠올리며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을 확인하니 기분이 묘하다.

여기까지는 전초전에 불과하다. 코너를 돌면 전시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맞닿은 대형 스크린이 자리한다. 곡선으로 이어진 3면의 스크린을 활용한 대형 미디어아트다. 이 구역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보고 기억하는 스크린 속 여성 캐릭터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영상을 통해 쏟아져 나온다. 저 멀리 짚어보면 <미몽>(1936)의 애순(문예봉)부터 <산불>(1967)의 사월(도금봉),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의 호정·연·순(강수연·진희경·김여진), <바람난 가족>(2003)의 호정·병한(문소리·윤여정), <차이나타운>(2015)의 ‘엄마’라 불리는 조직 보스(김혜수), <악녀>(2017)의 숙희(김옥빈), <아가씨>(2016)의 히데코와 숙희(김민희·김태리) 등 세기가 어려울 정도로 총망라돼 있다. ‘여인의 초상’이라는 이름하에 여성 캐릭터를 모자이크한 영상. 전시는 이렇게 한국영화 100년 역사 안에서 기억하고 언급하고 다시 불러보아야 할 여성 캐릭터들을 ‘불온한 섹슈얼리티’ , ‘위반의 퀴어’, ‘초-능력’, ‘비인간여자’ , ‘법 밖에 선 여성’, ‘엄마의 역습’ 등 총 6개의 주제로 분류한다.

시대도 장르도 다른 개별의 캐릭터가 영상 안에서 섞이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하니 그 속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새로운 여성 서사를 상상해보게 된다. 왜 이토록 멋있는 여성 캐릭터를 자주 돌아보지 못했을까. 전시장의 시작점에서 읽게 되는 문구이자 여성 캐릭터들이 그간 처한 위치를 가장 간결하게 정리해주는 페미니스트 영화평론가 로라 멀비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전시 공간을 둘러본다. “카메라는 근본적으로 남성의 시선으로 대상을 응시한다. 남성을 시선의 주체로, 여성을 시선의 타자로 위치시키는 이분법은 여성을 남성의 시선, 즉 성적 욕망·감시·판단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이른바 남성이 만든 이상적이거나 혹은 왜곡된 여성상을 향한 오해의 뿌리는 깊었다. 개중 주체적이거나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드러내는 여자는 어김없이 ‘나쁜 여자’가 되어 처단의 대상이 되거나 ‘이상한 여자’로 불리거나, ‘죽이는 여자’로 묘사되어왔다. 여성 캐릭터들이 잘못 규정되어왔다면 한국영화를 만들어온 우리 역시 그런 오해와 편견을 방관하고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해온 것은 아닐까. 새롭게 돌아볼 기회다. 끊임없이 모자이크된 영상 속 여성 캐릭터들 앞에 위치해 있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을 통과한 여성 캐릭터들의 기운이 오롯이 전달되는 느낌이다.

전시 기획의 시작점. 올봄 한국영상자료원 연구전시팀 조소연 큐레이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주제는 ‘한국영화 100년사, 여성영화 캐릭터’. 귀가 번쩍 뜨였다. 그간 남성 중심의 영화산업 시스템 속에서 남성들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져오고 정의되어온 여성 캐릭터를 새롭게 정의하고, 또 호명하자는 취지의 전시. 흔치 않은 기회에 의견을 보탤 기회라니 놓칠 수가 없겠다 싶었다. 6인의 자문위원으로 문화예술 페미니즘 평론가 김선아(영상문화 평론가), 손희정(문화평론가), 심혜경(중앙대학교 BK 플러스사업단 전임연구원), 오영숙(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 연구교수), 조혜정(영화평론가)이 참여했다. 함께 모여 회의하며 그간 우리가 사랑했던 스크린 속 여성 캐릭터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분류했다. 의미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상당히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1월 막 부임한 주진숙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의 취임에 맞추어 한 인터뷰(<씨네21> 1191호 씨네인터뷰, 주진숙 한국영상자료원장 “이전에 잘못된 것들이 있었다면 바로잡는다”)에서 ‘학자로서 관심’에서 연계된 앞으로의 기획을 묻자, “센 여성들”을 언급하며 “<악녀>(Fatal Women)라는 책도 있듯이 한국영화사의 센 여성 캐릭터를 모아서 캐릭터 열전을 진행해보고 싶다”라는 말이 지금의 기획으로 이어졌지 싶었다. 그때만 해도 ‘개인적 관심사’라 이 기획의 실행이 언제 될지 모른다고 했지만, 자료원장 이전, 수십년간 한국영화사를 연구해온 영화학자인 주진숙 원장의 관심사’는 이미 대중의 필요와도 맞닿아 있음이 분명했다.

그가 변재란, 장미희 등 여성 영화인들과 함께 <여성영화인사전>을 출간한 게 2001년의 일이다. 1954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 여성 영화인들의 활동상을 담은 이 책의 서문에 “한국영화사에는 ‘여성 영화인과 관련해서는 몇몇 유명배우를 제외하면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말을 적시하고 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에 대한 연구는 얼마나 나아갔을까. 주진숙 원장은 “두 번째 책을 내자는 이야기만 하고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말로 필요성을 되새긴다. 여성 캐릭터의 총망라는 어떤 형태로든 흔치 않았다. <씨네21>이 22주년 특집으로, 영화인 208명을 대상으로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20’을 조명해 호응을 얻기도 했다. 당시 설문에 참여한 영화인들이 “선정을 위해 돌아보니 한국영화사에 너무 멋진 여성 캐릭터들이 많았다”라는 평을 전해준 기억이 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여성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한국영화사는 그만큼 부족하고, 여성 캐릭터를 환기할 기회는 그만큼 적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조소연 큐레이터 역시 공감한 지점이다. “2003년 한국영상자료원에 입사하고 처음 본 영화가 <지옥화>였다. 최은희는 보통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같은 한국의 고전적인 여인상으로 소개되지만 나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그때 본 <지옥화>나 <쏘냐> 속 팜므파탈 이미지였다. 워낙 강렬하고 인상적이어서 언젠가 <지옥화>의 최은희를 포함한 독특한 여성 캐릭터들을 주제로 한 기획을 해보고 싶었다.” 앞서 진행한 배우 신성일의 커리어를 조명한 <청춘, 신성일 전설이 되다展> 전시를 진행하며 그는 “전시 준비로 1960년대 청춘영화를 다시 보는데 가슴 한쪽이 답답하더라. 철저히 남성 중심의 서사와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수동적인 여성캐릭터들이 대다수였다”며 이번 전시가 그 답답함을 해소해줄 시도라는 점을 말한다.

최근 들어 미투 운동이 전개됐고, 스크린을 통해 진일보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중심의 서사가 확립됐다고 보기에는 아직은 요원하다. 제대로 그리기에 앞서 수적으로 약세하다는 것도 짚어줘야 한다. 최근 10년간 극장 개봉작 중 여성감독 영화는 10%를 넘지 못하고, 여성이 주연인 영화는 전체 작품 중 20%대에 머무는 게 현실이다(조혜영, ‘영화에서 퀄리티란 무엇인가?’, KMDb 칼럼, 2018년 7월 13일자). 통계치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주변 여성 영화인들의 체감지수는 수치 이상의 현실을 일깨워준다. 한 여배우는 “규모가 큰 대작들 제작이 늘어난 지금, 남자배우들은 요즘 ‘오디션 풍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최근 몇 백명의 남자배우를 캐스팅하는 현장에 여성 캐릭터는 단 2명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마저도 ‘이미 내정되어 있다’는 말이 돌아 고충을 토로했던 기억이 난다. 여성 캐릭터의 절대적 부족, 남성 중심 서사의 구색 맞추기 캐스팅이 결국 편견과 클리셰로 가득 찬 여성 캐릭터의 양산으로 이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이번 전시는 그동안 남성 중심의 영화산업 시스템 속에서, 남성들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져온 여성 캐릭터를 새롭게 정의하고 호명하는 일이다. 시간을 내 찬찬히 미디어아트로 완성된 이 전시 공간을 모두 한번쯤 경험해보길 바란다. 전시장 안에 꽉 들어찬, 여성 캐릭터들의 에너지가 당신이 지금껏 여성 캐릭터에게 가진 선입견을 뒤흔들어줄 것이다. ‘인간으로서’ 욕망을 표현했지만 그것이 ‘여성이라서’ 나쁘다고, 이상하다고,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또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무수한 여성들을 향한 오해를 풀 차례다.

전시와 함께 진행되는 부대행사까지, 전시의 일환처럼 세트로 기획되어 있다. 시네마테크KOFA에서는 전시에 언급된 작품인 <지옥화>부터 <마녀>까지 13편의 작품을 상영한다. 또 지난 7월23일부터 전시 기획에 공동 참여한 6명의 영화평론가·연구가가 섹션별로 영화와 여성에 대한 도록을 발간하고, 6개의 섹션으로 분류된 여성 캐릭터들을 각각 조명한 강연도 진행하니 놓치지 말자. 또 이경미 감독, 정시경 작가, 배우 김다미 등이 참여해 여성 캐릭터에 대해 논의하는 토크와 큐레이터 전시 해설도 다양하게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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