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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삼만 잊으면 즐겁게 볼 수 있는 팝콘무비, <페이첵>

기억까지 삭제하며 헌신한 3년간의 노동의 대가로 거액의 스톡옵션이 아니라 자질구레한 19개의 물건을 스스로 택한 이유를 찾아가는 SF액션물

이제 오우삼의 흔적은 과거완료형이 된 듯하다. <페이스 오프>와 <미션 임파서블2>까지만 해도 ‘오우삼표’ 액션의 홍콩 키워드라 할 쌍권총이 수놓는 발레액션이나 슬로모션으로 펼쳐지는 비장미의 과잉이 곳곳에서 꿈틀거렸다. <페이첵>에 이르러선 서로의 얼굴에 총을 마주 겨눈 두 남자, 봉술 격투장면, 운명의 순간을 예고하며 날아오르는 흰 비둘기가 간신히 오우삼의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 흰 비둘기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환상의 존재로 나오는 건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벤 애플렉은 촬영장에서 마냥 친절하고 평화로운 오우삼을 보고 “도대체 오우삼은 어디 있는 거야. 그 액션의 달인은 어디 간 거야”라고 농담을 건넸다고 했다). 오우삼은 할리우드에 부드럽게 안착하다 못해 아예 귀화를 작정한 것일까. 적어도 <페이첵>만 놓고 보면 오우삼은 질박한 개성보다 반질거리는 표준 공예품을 택한 장인처럼 보인다. <페이첵>은 오우삼만 잊으면 즐겁게 볼 수 있는 훌륭한 팝콘무비다. 예컨대 <매트릭스2>의 고속도로 오토바이 역주행을 떠올리게 하는 오토바이의 역주행과 자동차와의 대결장면이 그렇다.

즐거움을 위해 잊어야 할 것이 또 있다. <블레이드 러너>와 <토탈리콜>에서 육중하게 빛나던 원작자 필립 K. 딕의 존재감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위태로워보였던 필립 K. 딕의 흔적은 <페이첵>에서 아예 증발해버렸다. 흥미롭게도 필립 K. 딕은 <페이첵>의 원작에서 모종의 음모를 꾸미는 기업을 기술과 자금이 넉넉한 혁명 집단으로 그렸다(기업은 그가 그토록 불길하게 여겼던 자본주의의 전위 조직이 아닌가). 그런데 영화에선 그 기업을 정반대로 탈색시켜버렸다. 사리사욕을 위해 인류를 절멸의 위기에 빠뜨린다는, 흔해빠진 할리우드 공식지정 악당으로 말이다.

마이클 제닝스(벤 애플렉)는 하이테크 기업의 천재적인 분해공학자다. 그는 기업 경쟁력의 핵심 상품을 만들어내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기억을 제거당한다. 기업 비밀을 지켜주기 위한 사전 계약에 따른 일이다. 그 대가는 물론 고액의 보수(페이첵)다. 비교적 짧고 간단한 프로젝트를 끝마친 그가 옛 친구가 경영하는 알콤사와 매혹적인 거래를 시작한다. 3년간의 장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스톡옵션으로 엄청난 돈을 받기로 한 것. 물론 그간의 기억은 삭제하는 것이 조건이다. 3년이 지나고 9천만달러어치의 주식을 받을 마음에 들뜬 그는 충격적인 사실에 접한다. 주식을 포기하고 그 대신 하찮은 19개의 물건이 담긴 봉투만을 받겠다는 이상한 계약서에 스스로 서명한 게 아닌가. 기억이 지워졌으니 자신이 왜 이렇게 무식한 짓을 저질렀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때부터 FBI에 쫓기는 몸이 되고 위기의 순간마다 봉투 속의 물건들이 구세주 구실을 한다.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싶은 물건들이 결정적 실마리로 작동하게 만든 순간들만이 필립 K. 딕의 살아남은 재기다. 기억을 되찾아가는 여정에 과거 3년간의 연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료 레이첼(우마 서먼)이 동참하는 건 보기 익숙한 ‘보너스’다.

알콤사에서 일하는 레이첼(우마 서먼)은 제닝스(벤 애플렉)의 연인이 된 뒤, 자신을 기억 못하는 제닝스를 도우며 새로운 로맨스를 쌓아간다.

제닝스가 알콤사에서 한 일은 미래를 내다보는 시간거울을 만드는 일이었다. 주식을 포기하고 별 의미없어 보이는 물건을 갖기로 한 건 그 거울을 통해 뭔가 엄청난 걸 보았기 때문이다. <페이첵>은 그 비밀을 향해 달려가는 제닝스를 배경으로 탄생한 속도감 있는 SF액션물이지만, 필립 K. 딕은 영화와 달리 제닝스의 선택에 재밌는 옵션을 붙였다. 제닝스는 알콤사의 비밀을 알아내 회사의 고용인이 아니라 경영진이 되는 거래를 벌이고자 한다. 자신을 위협하는 비밀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중세의 교회처럼 성역이 된 기업 안으로 숨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는 이런 배경들을 깡그리 삭제했다. 지난 3년간의 ‘나’를 ‘그’라고 그냥 남처럼 부르는 제닝스의 역설(기억의 단절이 만든 또 다른 ‘나’를 하나의 실체로 인정하는) 역시 삭제됐다.

:: 벤 애플렉 인터뷰 나는 마초가 아니다, 그리 터프하지도 않고 어떤 영화를 통해 오우삼을 좋아하게 됐나. 그리고 현장에서의 인상은 어땠나?

90년대 초 미국에 그를 처음 소개한 <첩혈쌍웅>과 <첩혈속집>이다. 이들 영화는 액션에 대한 내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나는 오우삼과 주윤발의 팬이 됐다. <첩혈쌍웅> 포스터는 지금도 내 집 벽에 붙어 있으니까. 함께 작업한 것에 관해 말하자면, 그가 매우 상냥하다는 점에 놀랐다. 친절하고, 항상 부드럽게 말하고…. 격렬한 장면을 찍을 때도 그는 평화로운 모습이고, 조용하며, 매우 젠틀하다. 그래서 나는 촬영장에서 “도대체 오우삼은 어디 있는 거야. 그 액션의 달인은 어디 간 거야” 하고 농담했다. (웃음)

영화 속 주인공처럼 미래를 볼 수 있다면? 특히 배우 입장에서.

그런 점에서는 타임머신이 있으면 좋겠다. 시나리오를 받으면 그 기계를 통해 미래로 보면 된다. “오 이건 꽝이야!”, “오 이건 훌륭해!” 이런 식으로 알 수 있을 테니까. (웃음)

최근 할리우드 액션영화 스타일은 홍콩 스타일로 바뀌었다. <페이첵>에서도 당신은 봉을 휘두르는 등 홍콩식 액션 연기를 하고 있다. 자신의 연기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이소룡의 발톱만큼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아시아 액션영화는 최근 할리우드를 석권했다. 요즘 할리우드영화에서 스턴트는 모두 아시아인들이 한다. <미녀 삼총사>나 <매트릭스>, 그리고 오우삼 영화에서도. 이제 현장에서 아시아 스턴트팀과 대화를 위해 통역을 두는 게 흔한 일이 됐다. 나는 그게 반갑다. 액션영화를 발전시켰으니까. 지금까지 할리우드 액션은 존 웨인 식이었다. 의자로 때리고, 권총을 쏘고 하는. 이제 아시아영화에 영향받아 액션은 좀더 발레 같은 춤에 가까워졌다. 내가 그런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 매우 흥분되고 짜릿하다.

새 영화를 고를 때 기준이 있다면.

시나리오를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항상 내가 출연할 수 있는 분량보다 많은 작품이 기다리니까 선택이 필요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누가 연출자인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갈수록 영화작업에서 감독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우삼 감독을 선택한 것도 이런 차원이다. 사실, 배우가 돋보이는 영화일수록 위험은 커진다. 그게 제대로 먹히지 않으면 망하고 만다. 그것도 스펙터클하게 말이다. 최근작 <질리>는 엄청나게, 스펙터클하게 망했다. (웃음) 그럼에도 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한다. 그동안 안전한 영화만 고르지도 않았고, 똑같은 스타일의 영화에만 출연한 것도 아니다. 인생이 그렇듯이 영화는 다 다르다. 아무도 어떤 영화가 잘될지 확신할 수 없다. 결국 항상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데어데블>에서도 그랬지만, 당신은 요즘 근육질 액션 배우로 이미지를 굳히는 듯하다.

우선, 나는 분명 마초가 아니다. 그렇게 터프하지 않다. 액션에도 그리 능한 것 같지 않다. 나는 10종경기 선수 같은 연기자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어떤 한 종류의 연기를 최고로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내 장점은 여러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코미디, 액션, 러브스토리, 드라마 등 모든 장르를 연기했다. 액션영화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고 스스로를 흥분시키는 점이 있지만, 나는 다른 영화에도 출연한다. 예컨대 곧 개봉할 코미디영화 <저지 걸>에서는 한 소녀를 키우려 애쓰는 아버지로 나온다. 실제 내 모습? <굿 윌 헌팅>과 <체이싱 아미>에서 맡은 캐릭터의 중간 정도일 것이다. 문석 ssoony@hani.co.kr

(*이 인터뷰는 2003년 12월 LA에서 열린 <페이첵> 시사회 때 이뤄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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