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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의 애니메이션 거장들의 만남, <겨울날>

거장들이 만나 문자에 영상을 불어넣은 단편애니메이션 모음집.

에도 시대, 시인 마쓰오 바쇼는 나고야에 이르러 그 지방 문인들을 만나 시를 짓는다. 손님으로 초대받은 주빈이 첫 번째 구를 짓자, 그에 이어 두 번째 구는 집주인이 이어간다. 일본에서는 여러 작가가 함께 짓는 이러한 합작의 문예형식을 렌쿠라 부르는데, <겨울날>은 1684년 에도를 출발해 여정에 오른 마쓰오 바쇼의 렌쿠 7부작 중 첫 번째 시리즈에 속한다. 시인들은 마치 끝말잇기를 하듯 자신의 순서에 따라 시를 읊는다. 그로부터 약 300년 뒤, 가와모토 기하치로는 렌쿠와 애니메이션의 만남을 기획하게 된다. 그는 렌쿠의 형식에서 세계 각국의 애니메이션 거장들의 만남을 떠올리며 시적 리듬감이 고스란히 담긴 애니메이션 <겨울날>을 구상한다. 이것이 실험적 애니메이션 <겨울날>의 출발지점이다.

애니메이션 <겨울날>에 참여한 각국의 작가들은 다양한 모국어로 자신에게 주어진 ‘겨울날’의 구절을 고요하게 읽는다. 그리고 그 구가 불어넣은 영감을 토대로 그림 혹은 이야기를 창조한다. 예컨대, 한명이 “가련한 운명 해답은 안 나오고 두견새 우네/ 한말 되는 맑은 물 다 새버린 가을 밤”을 외고 이야기를 만들면, 다음 작가는 “한말 되는 맑은 물 다 새버린 가을 밤/ 이백의 정취 가득한 누각에서 달구경하며”를 읊고 또 다른 그림을 그려내는 식이다. 총 35명의 작가가 이러한 형식으로 창조해낸 <겨울날>에는 35개의 독창적 해석들이 모자이크처럼 맞추어져 있다. 그들은 절지, 퍼펫, 2D·3D애니메이션과 실루엣, 셀, 클레이 등의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여 바쇼의 <겨울날>을, 혹은 문자를 독특한 영상으로 재현해낸다.

렌쿠 자체의 특성처럼 애니메이션 <겨울날> 역시 전체적인 조화, 일관성보다는 각 작품(시구)의 독창성에 공을 들인다. 유기적 관계 대신 작가들 각각의 정서에 초점을 두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겨울날>은 그 미덕만큼이나 한계점을 노출한다. 작가들에게 분할된 시간은 원작의 고독함과 해학을 담아내기에 짧은 감이 없지 않고 지나치게 뚜렷한 거장들의 개성은 서구와 동양적 필치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표현하기에 사방으로 튀는 경향이 있다. 바쇼의 시구없이 이들의 애니메이션만으로는 도무지 이야기가 상상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겨울날> 후반의 메이킹 필름은 감독들의 작업과정, 의도 등을 비교적 자세히 보여주며 그들의 진지한 기운을 통해 <겨울날>에 대한 이해를 사후적으로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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