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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거리에서 몸으로 익혔던 깨달음, <박치기!>

1968년, 일본의 교토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박치기’란 한글을 그대로 제목으로 쓴 일본영화 <박치기!>는 재일조선인을 사랑하게 된 일본 고등학생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당대의 파란만장한 풍경을 힘차게 그려낸다. 이즈쓰 가즈유키 감독은 ‘일본의 역사’를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박치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생각하는 일본의 역사는 전공투와 프리섹스, 미시마 유키오와 포크음악만이 아니라 재일조선인과 거리의 폭력배들까지 망라한다. 머리에서 만들어낸 역사가 아니고, 결코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불타는 거리에서 몸으로 경험하고 익혔던 깨달음을 <박치기!>는 유쾌하게 담아낸다.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도, 결코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이즈쓰 가즈유키의 결연한 태도가 <박치기!>를 걸작으로 만들었다. 촌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분방한 에너지가 넘치고, 쾌활한 것 같으면서도 슬픔을 질근질근 씹고 있다.

교토의 히가시 고등학교에 다니는 코우스케는 조선인학교에 다니는 경자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경자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던 코우스케는 동네 술집 청년 사카자키에게 노래 <임진강>을 배우고, 한글을 공부한다. <박치기!>에서 ‘임진강’은 중요한 상징이다. 박세영 작가, 고종한 작곡의 <임진강>은 68년 인기밴드였던 더 포크 크루세이더가 번역하여 불렀지만, 북조선의 노래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남과 북의 대립은, 일본 땅에서조차 화해불가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임진강>은 조선인만이 아니라 일본인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수 있었다. ‘강’은 단지 남과 북 사이만이 아니라 민족과 민족, 개인과 개인 사이에,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었다. 그 강의 존재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임진강>의 한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진강>은 단지 남북의 화해를 그리는 마음만이 아니라, 68혁명이 원했던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꿈꾸는 노래였던 것이다.

코우스케는 조선인들의 잔치에서 <임진강>을 부르며 경자와 가까워진다. 하지만 조선인부락과 일본인 거주지 사이에 강이 놓여 있듯이, 그들의 마음에도 쉽사리 건널 수 없는 거칠고 너른 강이 있다. 경자의 오빠인 안성은, 교토 최고의 싸움꾼이다. 안성과 친구들은 히가시 고등학교의 가라테 부원들과 날이면 날마다 싸움을 벌인다. 즐겁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다. 재덕은 친구가 된 코우스케에게 말한다. 날마다 쫓기는 꿈을 꾼다고. 거리를 갈 때마다 눈을 마주치고, 어깨가 부딪치는 사람마다 재덕이 시비를 거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워서 먼저 시비를 걸고, 오기와 근성으로 자기의 생존을 증명한다. 영원히 그들은 타인의 나라에 살고 있는 이방인일 뿐이다. 안성은 귀국선을 타고 돌아가겠다고 하지만, 북한이 정말 조국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에게, 북한 또한 타인의 나라일 뿐이다. 그들에게 현실의 조국은 허상일 뿐이고, 진짜 조국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서로를 돕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그들의 조국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경자에게 다가가려는 코우스케의 바람처럼.

<박치기!>는 요즘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에서 가급적 피하거나 외면하는 소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단지 제작자가 재일동포인 이봉우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즈쓰 가즈유키는 81년 데뷔작 <아이들의 제국>에서 67년의 오사카를 배경으로, 재일조선인을 비롯한 아이들의 싸움을 그려냈다. <박치기!>는 이즈쓰 가즈유키에게 대단히 친숙하고, 데뷔작의 기운을 이어받은 이야기다. 이즈쓰 가즈유키는 사춘기 시절의 불안과 희열을 매혹적으로, 무엇보다 가열차게 그려내는 감독이다. 거칠고 투박하게도 보이지만, 그건 청춘의 들뜬 에너지 때문이다. 안성과 친구들은 끊임없이 싸우지만, 거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가라테 부원 역시 딱히 조선인이기 때문에 죽일 듯 덤비는 것은 아니다. 정글에서처럼, 단지 승부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대전을 벌이다가도, 안성의 아이가 태어나자 싸움은 스리슬쩍 끝나버린다. 싸움은, 그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소비하기 위한 수라장인 것이다. 전공투가 그랬듯이, 그건 통과의례이고 연극무대일 뿐이다.

<소년 M의 임진강>을 각색한 <박치기!>는 60년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 시절을 경험한 일본인이 보았다면, 과거의 풍경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에 놀랐을 것이다. 소년들은 당시 청년들의 필독서인 <헤이본펀치>란 잡지의 누드사진에 혹하고, 독일에서 들어온 <여체의 신비>란 영화를 통해 섹스를 배운다. 대학생들은 자신의 이념적 당파를 선전하는 ‘중핵’이란 글자가 새겨진 헬멧을 쓰고 쇠파이프를 휘두른다. 마오쩌둥을 존경하는 좌파 선생은 러시아 출신의 스트리퍼에게 푹 빠져 샌드위치맨으로 전락한다. 여자애들은 아이돌 밴드 옥스의 노래를 들으며 기절하고, 한신파크의 레오폰(사자와 표범의 혼혈)을 보고 싶다고 조른다. 코우스케에게 <임진강>을 가르치는 히피족 청년 사카자키는 몸소 프리섹스의 고향인 스웨덴을 찾아간다. 조선학교의 교실에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주체사상의 구호가 걸려 있다. 한마디로 뒤죽박죽의 시대였다. 그러나 <박치기!>는 그 모든 것이 오로지 열정이었음을 말해준다. 코우스케가 한국어로 <임진강>을 부르며 끊임없이 경자에게 나아가듯, 안성의 아이를 가진 일본 여인이 결코 미래를 포기하지 않듯, 그들에게는 미래를 믿는 힘과 의지가 있었다. 그것이 60년대의 시대정신이었다.

<박치기!>는 정말 재미있는 영화다. 재덕의 장례식에 찾아간 코우스케를 내치는 조선인들의 한처럼, 분노와 슬픔이 고스란히 그려지면서도 엄숙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분노를 웃음으로, 한바탕의 소동과 싸움으로 전이시킨다. 포크 경연대회에 참가한 코우스케에게 <임진강>을 부르지 못하게 하자, 담당 PD는 상사를 데리고 잠깐 나간다. 퍽퍽 소리가 난 뒤, 상처가 난 PD가 돌아와 <임진강>을 부르게 한다. <박치기!>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지금의 일본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말해준다. 지금 일본이 무엇을 잃어버렸고, 외면하려 하는지를 말해준다. 그것이 <박치기!>가 관객을 사로잡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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