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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무력함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전, <월드 트레이드 센터>

미국의 무력감을 치유하기 위한 올리버 스톤의 퇴행적인 처방전.

과거에 실존했던 역사적 사건을 영화화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관점이 그 사건의 일부로 스며들 수밖에 없다. 이는 역사영화가 필연적으로 시대착오(anachronism)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이지만, 이러한 시대착오성이야말로 역사영화가 존립할 수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미국 정치사에서 영화적 소재를 즐겨 발굴했던 올리버 스톤이 2001년 9월11일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폭파사건을 영화화한 <월드 트레이드 센터> 역시 마찬가지이다. 올리버 스톤이 이 작품을 두고 ‘9·11 사건’에 대한 비정치적 접근이라고 제아무리 주장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그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는 정치적 사건의 비정치적 접근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발언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정치적 접근이라는 태도 속에서 9·11이라는 역사의 외상(trauma)에 대해 현재의 미국이 어떠한 봉합을 원하는지에 대한 시각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세계무역센터에 구조반으로 진입했지만, 빌딩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매몰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존 맥라글린(니콜라스 케이지)과 윌 지메노(마이클 페나)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영화는 잔해더미에 깔려 행동이 제약된 이들의 모습과 그들이 현장에 매몰되었다는 것을 전해 들은 가족의 모습을 교차시키면서 전개된다. 올리버 스톤은 소재가 지닌 장르적 경향을 따르거나 9·11 사건에 관해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죽음의 문턱에서 그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궁극적인 힘이 믿음, 사랑, 희망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있었음을 역설하고자 한다. 너무도 민감한 9·11 사건의 성격이나 그 사건이 영화화되는 시간의 너무도 좁은 간격을 감안한다면, 이 영화가 정치적 해석을 자제하면서 생존자의 경험에 토대를 둔 객관적 재현에 치중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 페이드 아웃된 화면에 숨막힐 듯한 긴 침묵으로 처리한 빌딩의 붕괴 직후에 등장하는 빌딩 내부의 모습은 그 사실성이 오히려 끔찍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렇게 붕괴 이후의 처참한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한 이 영화 속에는 비행기가 빌딩 속에 그 몸체를 쑤셔박는 외상적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재현의 배제를 두고, 이 영화가 외상적 사건, 즉 그 어떤 말로도 상징화할 수 없는 사건의 충격을 회피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는 9·11이라는 외상적 사건을 두눈 뜨고 똑똑히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미국의 무력감과 무너진 자존심에 대한 영화라는 점이다. 영화가 폭파된 건물 밖으로 피흘리며 걸어나오는 미국의 시민들(이들의 모습은 마치 존재감이 사라진 유령처럼 보인다)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구조대원들의 시점 숏(특히 영화의 초반부에 그러하다)과 이 사건을 TV를 통해 바라보는 미국 시민들의 허탈한 시선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건 현장에 배치된 한 구조대원의 말처럼, 갑자기 뉴욕을 대표하던 빌딩이 폭파되고, 5만명이 넘는 평범한 시민들이,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이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결국 올리버 스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소명은 이러한 무력감을 경험했던 이들을 위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의 모습을 영화 속에 담는 것이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수많은 음모론 중 그 어느 것이 진실이든, 그리고 이 테러의 주체가 누구이든지 간에) 이 사건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을 위한 진혼곡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무능력을 처절하게 경험해야만 했던 이들을 위한 위로곡이다. 올리버 스톤이 모든 정치적 판단들을 배제하면서까지, 역경 속에서도 가족과 신앙의 가치를 (재)발견함으로써 살아 돌아오는 데 성공한 인물들을 영화화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미국인들에게 청교도적 윤리에 기반한 소명의식을 다시금 부여함으로써 그 무능력한 시선을 감추려는 영화이기도 하다. 전역했던 해병이 붕괴 현장에 나타나 스스로에게 해병의 의무를 다시 부여하고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것, 맥라글린과 지메노를 가족과 직업에 의해 부여된 위치로 되돌려주는 것 등은 모두 신의 이름으로 호명된 소명의식의 확인과 그 궤적을 함께한다. 결국 올리버 스톤이 그 대응이 더뎠던 부시 행정부에 대한 비판을 병원장면 등에서 내비친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는 맥라글린이 영화 초반부에 강조하고 지메노가 그 후반부에 확인시켜주는 ‘자신의 파트너(미국의 시민들)를 지켜주는 일’을 스스로의 소명으로 부여함으로써, 가장 미국적인 가치로 그 무능력한 시선을 감추려는 시도이다. 물론 이러한 소명의 호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을 둘러싼 ‘적대’가 어떠한 방식이로든 가려져야 하며, 그것이 이 작품이 비정치적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생존자의 귀환과 관련된 사건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영화라는 사실에 현혹되어, 그것이 과거 사건에 대한 현재의 입장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해이든 화이트가 지적하듯, 미디어 시대의 대중은 스포츠 중계에서 주요 장면을 리플레이로 반복 재생하는 것과 유사하게 역사적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좀더 정확한 역사적 인식에 이를 수 있다고 믿지만(야구 경기에서 아웃과 세이프를 확인하듯), 실제로는 리플레이의 무한한 반복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불가능성만을 확인함으로써 오히려 역사의식의 한계에 더 강력하게 부딪히게 된다. 물론 9·11 사건은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이다(난무하는 음모론이야말로 그 단적인 증거이다). 가장 미국적인 것이라 믿고 싶은 가치들을 ‘자신의 파트너’에게 다시 호명하려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가장 역사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고 아직은) 역사화할 수 없는 현재의 역사의식의 무능력, 혹은 역사성의 텅 빈 공백을 감추기 위한 베일로서 기능하려 한다. 과거란 벙어리와 같아서 현재의 입을 빌리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면, 이러한 베일은 과거가 현재의 입을 빌려 말하는 과정에 개입된 ‘현재의 목소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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