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관객에게 내민 낯선 동의서, <사랑따윈 필요없어>
이종도 2006-11-07

눈 내리면 인형들이 사랑을 나누는 스노볼. 깜찍하고 공허하고.

영화의 미덕으로 꼽을 수 있는 처음과 마지막 장면의 삿포로 설경은 이 영화가 현실에 뿌리내리기보다는 판타지에 호소하고 있음을 알린다. CF감독 출신이 만든 CF의 극장용 확장판이라고 가볍게 이야기하는 건 상당한 결례일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건 오해를 부른다. CF라서가 아니라, 도쿄방송 동명 TV드라마 압축판이라서가 아니라 지상 위로 3cm 뜬 채로 이야기의 현실성을 줄곧 부정하는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대부호인 아버지가 죽고, 16년 전 엄마와 함께 집을 나간 오빠 류진마저 죽자, 눈먼 소녀 류민(문근영)은 드넓은 녹차밭 한가운데 우뚝 선 대저택에 홀로 남는다. 곁에 이 선생(도지원)과 오 대표(최성호), 변호사(조상건)가 있지만 마음을 트고 지낼 이는 없다. 호스트바에서 명성을 날리던 호스트 줄리앙(김주혁)은 바에서 쫓겨난다. 게다가 큰 빚을 지고 사채업자인 광수(이기영)에게 쫓기고 있다. 줄리앙은 후배 태호에게 류진 이야기를 듣고 민의 오빠 행세를 하기로 한다. 거액의 유산을 가로채서 기한인 한달 내에 28억원의 빚을 갚겠다는 생각이다.

영화는 서둘러 수많은 의문들을 파묻고 곧장 민과 줄리앙 사이의 관계로 뛰어든다. 오해와 거짓에서 사랑으로 가는 아름다운 여정을 보여줄 생각이다. 그런데 일찌감치 파묻은 의문의 무덤에서 손들이 뻗어나온다. 어떻게 아버지와 오빠가 거의 동시에 죽는가 같은 우연의 일치들, 혈육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많은데 줄리앙은 어떻게 그 의문을 뚫고 나갈 것인가 하는 비과학적 전제들이 먼저 손을 든다. 그런 것이야 현실적으로 일어날 확률도 있고, 줄리앙의 타고난 연기력과 천재적인 임기응변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관객에게 낯선 동의서를 내민다. 사채업자가 한달이 얼마나 남았는지 앤티크 회중시계를 꺼내보거나, 줄리앙을 쫓기 위해 대형 트레일러를 타고 도로를 역주행할 때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데 동의할 것. 잔디밭도 아니고 녹차밭 한가운데 들어선 육중한 건축가의 작품이야말로 민과 줄리앙이 함께 사는 데 어울리는 공간임을 동의할 것. 현실과는 동떨어진 영화만의 현실성에 동의할 것. 이 동의서에 서명한 뒤 얻는 것은 창녕 우포늪, 보성 녹차밭, 삿포로 눈밭 한가운데 선 나무 등이며 포기해야 하는 것은 뛰어난 출연진들이 이제껏 보여준 연기력이다. 그들은 우리가 보아온 개성을 포기하고 이국적인 체스게임의 말노릇을 한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