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예민한 감성을 가진 폴(로맹 뒤리스)은 파리에서 작은 시골 마을로 이주한 뒤 동거해온 안나(조아나 프레이스)와의 관계에 한계를 느낀다. 사랑을 할 때면 상대의 반응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고, 때때로 치졸한 질투심마저 솟아오르는 탓에 폴은 차라리 사랑을 포기하는 쪽이 낫겠다고 결심한다. 결국 파리로 돌아온 그는 고독과 고통 속에서 칩거하게 되고, 동생 조나단(루이 가렐)과 아버지(기 마르샹)는 폴을 걱정한다.

<파리에서>는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별 의미없는 영화다. 폴을 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3명의 여성과 섹스를 하게 되는 조나단의 이야기나 큰아들을 위해 음식을 챙기거나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17살 때 자살한 누이 클레르의 이야기 등은 말로 뱉어놓으면 사소한 잡담에 가깝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2월23일 하루를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파리에서>는 이 사소한 잡담들 속에서 반짝이는 진실의 순간들을 담아낸다. 이들 삼부자가 아주 친한 모녀와 자매처럼 허물없이 나누는 살가운 대화나 폴과 안나의 이야기 속에는 무겁진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잠언(이를테면 “단 한 사람의 사랑을 얻어 영혼이 구원받을 수도 있어”)들이 슬쩍 끼워져 있다.

거의 모든 장면을 로케이션으로 촬영했고, 현실의 시간에 굳이 얽매이지 않을뿐더러 영화 초반과 중간중간마다 조나단이 아예 카메라를 쳐다보며 내레이션을 하기 때문에 ‘누벨바그의 재현’이라는 평가를 얻었던 <파리에서>는 경쾌한 재즈 피아노 선율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느낌의 영화다. 그렇다고 난해하거나 현학적이기보다 오히려 로맨틱하고 따뜻한 감성 속에 상처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표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J. D. 샐린저의 <프래니와 주이>에서 영감을 얻은 이 영화는 주인공들의 성(姓)과 서열만 바꿨을 뿐, 치킨 수프나 오빠(영화에서는 누이)의 죽음 등의 에피소드를 가져왔으며 “온 힘으로 좌절하면 그만큼의 힘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소설의 메시지를 온전히 품고 있다. 특히 후반부 폴과 안나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뮤지컬처럼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눈물나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사랑의 노래>를 통해 ‘자크 드미풍 프랑스 뮤지컬영화의 부활’이라는 평을 얻은 크리스토프 오노레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차기작을 준비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