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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라듸오 데이즈>
정재혁 2008-01-30

경성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1930년대, 경성. 일제강점기지만 조선 유일의 라디오 방송국 경성방송국 스튜디오엔 나른한 분위기가 감돈다. 아버지의 힘으로 PD 자리를 꿰차고 있는 로이드(류승범)는 가끔씩 들려오는 뉴스나 짜투리 방송에 마이크 전원을 켤 뿐 방송 일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아나운서 만섭(오정세)이나 가끔씩 스튜디오에 와 풍월을 읊는 기생 명월(황보라)이 이따금 방송국의 정적을 깨는 돌출 행동을 하지만 시대와 벽을 쌓은 듯 심심하게 굴러가는 방송국에 별일은 없다. 1930년대 경성, <라듸오 데이즈>는 역사의 아픔을 싹 거둬낸 뒤 남겨진 피곤함과 공허함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방향을 찾지 못한 인물들이 모두 한량이 되어 방송의 주파수를 돌리고 이야기는 나른한 리듬을 타고 천천히 흘러간다.

시작부터 끝까지 별다른 기복이 없는 영화 <라듸오 데이즈>의 사건은 로이드가 시나리오작가 노봉알(김뢰하)을 만나면서 벌어진다. 봉알의 글을 보고 라디오 드라마를 떠올린 로이드는 방송국 기존 멤버였던 명월, 만철에 재즈 가수 마리(김사랑), 칼피스 배달 소녀 사환(고아성), 독립투사란 정체를 숨기고 있는 음향 담당 K(이종혁) 등을 더해 드라마 <사랑의 불꽃>팀을 구성한다. 조선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란 타이틀을 걸고 시작된 프로그램. 방송이 의외의 성공을 거두면서 평소엔 무관심이던 방송국장이 로이드를 압박한다. 국장은 국민들을 고취시킬 수 있는 엔딩으로 드라마를 종결하라고 명한다. 로이드는 극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갈등에 처하지만 영화는 여전히 별다른 긴장감을 주지 않는다.

<라듸오 데이즈>에는 두축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하나는 로이드가 이끄는 <사랑의 불꽃> 창작과정이고 또 하나는 K가 숨기고 있는 도시락 폭탄 투하 작전이다. 하지만 <라듸오 데이즈>는 정작 두 번째 이야기의 축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K의 이야기를 단지 영화의 판타지적인 엔딩을 위해 단순하게 사용한다.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불꽃축제를 즐기는 <라듸오 데이즈>의 엔딩은 <웰컴 투 동막골>의 팝콘장면을 연상케 하는데 그 판타지가 별로 쾌감을 주지 못한다. 역사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모두 정치적인 메시지를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라듸오 데이즈>는 스스로 취사 선택한 역사적 에피소드를 소홀히 한다. K의 드라마가 사라진 채 달콤한 결말만이 하늘에서 빛날 때 영화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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