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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알아? <후아유>
김현정 황혜림 2002-05-21

탄성이 나올 정도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자잘한 젊음의 풍경

게임 회사에 다니는 형태(조승우)는 2년을 투자한 게임 <후아유> 베타 테스트를 준비하던 도중 흥미로운 지원자를 발견한다. 같은 빌딩 수족관에서 다이버로 일하는 인주(이나영)의 도발적인 비판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그는 게임 광고를 위한 인터뷰를 핑계삼아 인주를 직접 만난 뒤, ‘멜로’라는 ID로 그녀의 게임 파트너가 된다. 온라인으로, 오프라인으로 인주에게 다가가던 형태는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지만, 인주는 누구인지도 모를 파트너 ‘멜로’에게만 마음을 연다. 청각장애 때문에 마음마저 닫아버린 인주와 불안한 미래를 눈앞에 둔 형태는 그처럼 만나는 듯 서로 조금씩 어긋난다.

기억은 그리 끈질기거나 솔직하지 못하다. 장난처럼 시작한 연애는 10년쯤 지나 삶의 전부를 내걸었던 열정이 되고, 무심코 되풀이해 들었던 노래 하나도 끝없이 아팠던 순간으로 돌아가는 통로가 된다. 구질구질하고 짜증난다 해도 엄연히 존재했던 시간. 그 잔재를 견디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기억을 거르고 걸러 한때나마 폼나는 인생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최호 감독의 데뷔작 <바이준>이 스무살의 문턱과 아무 관련이 없는 영화였다면, 아마도 그런 까닭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음에 발목을 잡힌 채 흰 대마초 연기를 뿜어내는 이 영화의 젊은이들은 ‘방황’이나 ‘허무’라는 맥없는 단어로 치장된 정체불명의 젊음일 뿐, 우리 중 누구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런 젊은이들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바이준>을 연기처럼 흩어지는 영화로 만들고 만 최호 감독은, 4년 만에 <후아유>로 돌아오면서 신기하게도 좀더 젊음에 가까워졌다. 그는 여전히 “청춘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해답없이 방황하는 시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방황엔 어떻게든 살아야만 하는 젊은이들의 남루한 흔적이 묻어난다. <후아유>의 젊은이들은 떠나버린 친구보단 바로 지금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낯선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자동차를 타고 질주하는 대신 골칫덩어리 중고차에 속을 앓는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막연한 고독이나 불안이 아니라 구체적인 결정과 선택의 문제다.

<후아유> 제작진은 20대를 향한 향수에 젖는 대신 수백명을 대상으로 한 면밀한 설문을 통해 먼저 현실을 파악했다. 그 결과 때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자잘한 일상의 풍경을 얻을 수 있었다. 수영선수였던 인주는 사고로 청각을 잃은 뒤 자신이 무가치하다며 자학하지만, 그런 배경을 알리지 않아도 좋은 인터넷상에선 또래와 다름없이 발랄하다. 능청스럽고 낙천적인 형태가 드물게 내비치는 두려움도 설득력이 있다. 여섯달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한 후배들에게 “우리가 대기업에 다니는 거냐”면서 호소하는 그의 모습은 웬만한 벤처 기업에 다녀본 20대라면 한번쯤 겪었을 법한 경험이다. 예쁘고 늘씬한 아바타의 환영, 빠르게 주고받는 채팅 와중에 드러나는 속마음, 그처럼 무책임하게 밝히고 만 속내를 현실에서도 감당해야 할 때 느낄 수밖에 없는 당혹. <후아유>는 가느다란 케이블을 타고 또 하나의 세계를 배회하는 지금 20대들의 순간 순간을 무작위로 골라 보여주는 것처럼 선명하게 제시한다.

최호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과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네가 나를 알아?”라는 대사 역시 지금 젊은이들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술에 취해 밤거리에서 말다툼하는 젊은이들이 비슷한 말을 내뱉는 모습을 몇번이나 목격했다. 그는 “뭔가 잘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한데, 누구도 해답은 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는 너를 안다’는 말은 강한 ‘필’을 가지는 대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사소하지만 당사자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을 겪은 뒤 네 젊은이가 노래방에서 악을 쓰며 춤추는 장면은 그래서 무척이나 슬프다. 감독의 말대로 “호락호락하지 않고, 어른이 될 것만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어중간한 인생들은 이해받고 싶은 욕망을 악으로만 내지른다. 그것밖에 모르고 그것밖엔 방법이 없다.

<후아유>는 그러면서도 좀처럼 만나기 힘든 해소와 희망의 순간을 움켜잡는다. 사랑을 얻은 형태가 “나 다시 온다. 돈 벌어서 다시 온다!”고 돈없어 떠나는 건물 옥상에서 환성을 지를 때, 문득 마음이 맑아진다. 테크노 음악에 기대 스크린을 현란하게 휘저었던 전작에 비해, 눈에 띄게 간결해진 <후아유>는 끈질기고 또 솔직하다. 잦은 클로즈업으로 가상 공간에 몰두하는 인물을 담는 것은 어쩌면 안일할 수 있고, 유리에 비친 영상으로 형태의 나약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뻔한 기법일 수 있겠지만, 동시에 편안하게 다가오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후아유>가 단 한번도 인주와 형태의 마음 깊숙이 다가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무척 안타깝다. 농담처럼 가벼운 대사 뒤에서 그들의 고민 밑바닥은 닿을 것 같은 순간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반쯤은 공감하면서도 반쯤은 겉돌게 되는, <후아유>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딱 그만큼의 영화인지 모르겠다.

<후아유>의 음악 - 소방차에서 델리스파이스까지

최호 감독의 영화는 음악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바이준>에서 라디오헤드와 프로디지로 대변되는 브릿팝 선율과 테크노 비트가 넘쳐났다면, <후아유>에서는 국내 인디음악의 토양에서 캐낸 곡들과 방준석의 창작음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흐른다. 선곡은 최호 감독과 솔로 프로젝트 ‘볼빨간’ 및 줄리아 하트의 프로듀서 겸 드러머로 활동하며 <거짓말> <하면 된다> 등에 음악을 제공해온 서준호가 맡았다.

우선 만나자는 인주의 메일을 받은 형태가 자신이 ‘멜로’와 동일인물임을 밝혀야 할지를 고민하는 장면과 엔딩을 감싸는 <차우차우>는 감독의 선택.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를 반복하는 가사와 서정적인 기타의 미니멀리즘이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는 델리 스파이스 원곡의 정서를 끌어오되, 멜로디 라인의 변주와 기타의 여운을 좀더 살린 방준석의 편곡과 이준우의 보컬이 색다르다. 인주의 친구 보영이 실연당하는 시퀀스에 삽입된 레이지본의 <사랑하고 싶어>는 소방차의 80년대 댄스곡을 경쾌한 펑크로 리메이크한 곡. 그 밖에도 ‘멜로’를 만나기로 한 인주가 대학로를 배회할 때 야외무대 공연으로 스쳐가는 <오르골>과 <유성우> 등 줄리아 하트의 맑고 상큼한 선율, 크라잉 너트의 <밤이 깊었네>와 이한철이 이끄는 불독맨션의 <사과>, 롤러코스터의 등 젊은 감수성을 드러내는 음악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텔미썸딩> <공동경비구역 JSA> 등의 영화음악을 거쳐온 방준석의 창작곡도 감정의 흐름을 세심하게 반영한다. <고백> 같은 연주곡은 물론, 블루 인 그린이란 프로젝트 밴드의 이름으로 들려주는 <혼잣말> <나의 너> 등 멜랑콜리한 선율과 몽환적인 기타의 울림이 매력적이다. 윤종신의 <환생>, 긱스의 <짝사랑> 등 포크기타 반주의 가요 메들리에 속마음을 실은 <형태 라이브>, H2O의 <끝>을 조승우가 직접 부른 곡까지, 20대의 감성에 발맞춘 음악이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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