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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검은 소년' 서정원 감독, 선택하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발걸음
최현수 사진 최성열 2024-02-20

<검은 소년> 서정원 감독

어머니(윤유선)는 아버지(안내상)의 폭력을 피해 별거를 택했지만, 고등학생 훈(안지호)은 자신의 거처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이런 훈을 위로하는 것은 문학 동아리에서 배운 글쓰기다. 하지만 교실에 드리운 폭력의 그림자는 평온하길 바라는 훈의 마음을 괴롭힌다. <검은 소년>은 소년 앞에 놓인 두 가지 갈림길 속에서 함께 고민하는 영화다. 매일 노트에 일상을 기록하는 습관을 지닌 서정원 감독은 내성적인 성격과 달리 복싱과 서핑을 좋아한다. 영화 속 훈의 모습을 똑 닮은 서정원 감독에게 선택의 기로에 놓인 한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영화의 배경인 IMF 금융 위기는 감독이 학창 시절을 보냈던 시기와 겹친다. 1990년대 후반은 어떤 시대였는가.

= 절망과 공포가 만연한 시대였다. 주변 친구들의 얼굴에서 점차 웃음이 사라져갔었다. 삭막한 사회적 분위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자체는 자전적이지 않지만 시대에 대한 묘사는 자전적이다. 나도 그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겪으면서 복잡한 시기를 보냈다. 학창 시절에 대한 에피소드들도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이다.

- 극 중 아버지의 직업은 공인중개사다. IMF에 의한 집값 폭락이 곧 수익으로 연결되는 직업이다. 아버지 무진(안내상)은 강남에 집을 사서 10년을 묵히면 떼돈을 벌 거란 꿈도 꾼다.

= 모두가 빈곤에 허덕이던 시절에도 돈을 번 사람들이 있었다. 조사하면서 부동산 종사자만큼은 수익을 올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이 그 시절의 아버지들이 자행한 폭력과 그 이면에 작동하는 구조를 모두 직시하려는 나의 양면적인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 ‘누울 자리’나 ‘보금자리’라는 단어가 시사하듯 결국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발아래 놓인 땅이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강남이라는 새로운 땅을 아들에게 제시하지만, 훈은 자신이 원하던 땅을 스스로 택하고 몸을 뉜다. 이런 대비를 극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다.

- 아버지는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훈은 이런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동정한다. 영화 내내 훈의 양가적인 태도가 두드러진다.

= 이런 딜레마를 통해 훈은 내면에 집중하고 나아갈 방향을 택한다. 예를 들어 기철이나 연희는 훈의 내면을 비추는 반쪽짜리 거울 같은 인물이다. 연희는 문학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표출한다. 반면 기철은 이를 직관적인 폭력을 수단 삼아 배출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 훈의 선택이다. 자신이 물려받은 폭력성을 포기하기로 하면서 훈은 하나의 길을 정한다.

- 연희는 문학 동아리에서 <데미안>의 한 구절을 낭독한다. ‘나를 발견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인용구는 훈의 상황과 유사하다.

= 결국 데미안은 알을 깨고 세상으로 향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하지만 반대로 알 속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 나만의 알을 만들고 부화될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거치며 성숙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서점에 도착하는 훈의 마지막 장면도 알을 부화하기 위해 품어내는 인큐베이터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 안지호 배우는 아역 시절부터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시트콤에서 익살스러운 부부로 합을 맞춘 윤유선, 안내상 배우는 이번엔 이혼 직전의 부부를 연기한다. 캐스팅 과정에 공을 들인 것 같다.

= 극적인 서사보다는 세밀한 감정을 표현할 배우가 필요했다. <보희와 녹양>에서 봐온 안지호 배우는 순수한 소년 같지만 동시에 성숙함이 공존하는 사람이었다. 안내상, 윤유선 배우는 독립영화다 보니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조합을 의도하고 섭외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그저 우연이었다. 프리프로덕션 기간 때 두분이 처음 만나 “우리 또 만났네” 하면서 서로 웃으셨던 게 기억난다.

- 촬영 중 윤유선, 안내상 배우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했다고.

= 무진이 퇴원하고 훈과 집에서 냉담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촬영할 때였다. 나는 훈이가 아버지의 뒷모습만 보고 이야기하길 원했다. 그래서 무진이 뒤를 돌아 입원했던 짐을 푸는 동선을 그렸는데 안내상 배우가 시나리오를 보더니 가만히 앉아 있겠다고 이야기했다. 당황해서 넌지시 이유를 물으니 ‘무진이라면 그럴 것 같다’는 한마디가 돌아왔다. 안내상 배우의 의견을 믿고 그대로 촬영했다. 나중에 편집하면서 보니 내 의도대로 찍었다면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았을 것 같더라. 윤유선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도 처음으로 모니터가 아닌 영화 속 현장을 바라보는 듯한 몰입의 경험을 느꼈다.

- <검은 소년>이란 제목의 역설이 저릿하게 다가온다. 영어 제목인 <Walker>도 이중적이고.

= 영화를 준비할 당시 우연히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에서 한 소년이 미소인지 무표정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그 순간 이 장면으로 영화가 끝났으면 하고 바랐다. <검은 소년>이란 제목도 그 사진에서 출발했다. 훈은 정서적으로 황폐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동시에 그는 여전히 소년이란 희망을 품고 있다. 걷는 사람이란 뜻의 영어 제목은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끊임없이 거리를 걷는 훈의 여정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선택하려면 우리에겐 수많은 발걸음이 필요하다.

- 줄곧 가족과 관계라는 단어를 강조한다. 차기작도 가족과 관련이 있는가.

= 모두 그렇게 느끼겠지만 가족은 사랑스러우면서 동시에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럼에도 가족을 온전히 미워하기는 어렵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맺어진 관계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음 작품도 가족을 주제로 삼았다. 다만 <검은 소년>이 가족의 해체를 묘사했다면 이번엔 가족의 따스함을 코미디로 풀 예정이다. 사실 나는 밝은 이야기를 더 선호한다. 이번 작품을 만들면서 내 안의 깊은 감정과 마주하느라 괴롭기도 했다. 어떻게 사람들을 웃고 행복하게 할지 고민하는 코미디가 나와 더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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