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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씨네21> 편집장이었던 신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안정숙
사진 오계옥이영진 2005-06-09

“평생 일선 기자로 남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되데”

지인들에 따르면, 안정숙(54)씨는 궂은일을 결국엔 마다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백발이 될 때까지 평기자로 남겠다던 그의 고집은 5년 전 <씨네21> 편집장을 떠안게 되면서 깨졌고, 쉰 넘어 카메라를 잡겠다던 그의 꿈도 최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으면서 멀어졌다. 임기 시작 3일째인 5월31일. 앞으로 3년 동안 3기 영진위를 이끌게 된 안정숙 신임 위원장을 만났지만, 바쁜 업무 때문에 인터뷰는 수시로 끊겼고 뒷전으로 밀렸다. “업무혁신 관련 부서가 있는데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 “모태펀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이제 겨우 해결했다는 안 위원장은 “바깥에선 영진위가 하는 일이 뭔지 대략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와보니 모르는 것 투성이”라며, 아직 업무 보고(본인은 위원장 교육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를 받지 못했고 다른 위원들과의 협의 사항인 사안도 있어 앞으로 영진위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은 다음으로 미뤄달라고 했다. 대신 그는 곁에서 일했던 동료들에게도 좀처럼 털어놓지 않았던 다소 사적인 질문들에 관해선 비교적 자세히 털어놨다.

-허리 세우고, 핸들에 얼굴을 묻은 채 전방을 주시하는 평소의 운전자세가, 그동안 차 얻어타는 후배들에겐 사실 좀 불편했고, 불안했다. 이젠 관용차를 타고 다니는지.

=혼자 다니는 것보다 좀 불편하다. 그래도 주차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어 좋은 점도 있다.

-저런 고급 의자는 싫어하지 않나.

=<씨네21>에서도 그래서 바꿨잖나. 컴퓨터 치는 것도 난 (모니터에) 바짝 붙어서 치는 스타일이라서 저런 의자는 좀 불편하다. 영진위에는 김봉석씨처럼 수면을 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의자를 바꿔줄 만한 사람이 아직 없는 것 같다.

-위원들이 왜 위원장으로 뽑았다고 생각하나.

=현장에서 직접 경험을 쌓으면서 (영진위의) 필요를 발견하는 영화인들이 맡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기자가 현장과 가깝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체감온도가 다르고 또 현장과는 벽이 있게 마련이니까. 영화인들도 그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다들 작품을 해야 한다, 다른 책임을 맡은 지 얼마 안 됐다, 그렇게들 고사해서 결국 나 같은 영화계 구경꾼이 이 자리에 앉게 된 것 같다.

-위원직만 하더라도 많이 망설였던 것으로 아는데.

=<송환>처럼 뛰어난 작품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고 그냥 일기 같은, 에세이 같은 사적 다큐나 만들면서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이다 생각하고 푸른영상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그렇게 된 거니까. 음… 내가 쉰다섯인가. 1951년생인데. 여자 나이를 이렇게 공개하다니. (웃음) 3년 지나면 쉰여덟이다. 내가 결심이 굳은 사람도 아니고. 이번에 하지 않으면 3년 뒤의 나를 보장 못하겠고, 그래서 많이 망설였다.

-영진위 일을 하겠다고 맘먹은 계기가 있나.

=지금으로선 관찰하고 발굴하고 길을 찾고 전망하고 여태껏 해왔던 직업적 특성을 영진위에서 발휘해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뿐이다.

-잠깐이지만 1기 때도 위원으로 활동했다.

=활동을 했다고 말 못하지. 그때는 모든 사안을 두고 변화를 추구하는 쪽과 거부하는 쪽의 긴장과 갈등이 워낙 심했으니까. 생산적인 논쟁을 거의 못했고, 자괴감에 결국 정지영 감독, 문성근씨 등하고 같이 중도에 그만뒀다. 다행히 후반기부터 이용관 부위원장이 위원들과 함께 코피 터지게 일하면서 안정적인 2기로 넘어올 수 있었고, 3기까지 온 것 같다.

-영진위는 1기의 경우 산업에, 2기는 문화 또는 공공쪽에 포커스를 맞추겠다고 했고, 그 기조 아래서 사업을 펼쳤다.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영화계 안팎의 여론 자체가 영진위의 그런 정책 방향에 동의했다고 본다. 하지만 3기의 경우, 양쪽의 이해와 요구들이 격하게 부딪치는 것 같다. 부담이 전보다 더 클 것 같은데.

=1기는 내부 갈등으로 인해 동력이 분산되는 일이 계속 있었고, 재원, 인력,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또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사안들이 놓여져 있었고. 일단 시급한 일부터 풀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투자조합 사업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그때는 언제 대기업들이 나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고 안정적인 제작자본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2기의 경우, 1기 때 우선 순위에서 밀렸던 공공, 문화쪽에 관심을 갖긴 했는데 아무래도 재원문제 때문에 완벽하게 지원을 해주진 못했을 것이다. 3기의 경우, 재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문예진흥기금도 없어졌고, 유럽처럼 방송의 이익 몇 퍼센트를 영화에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국고지원의 몫이 더 늘어나야 하는데. 현재로선 돈 끌어모으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지원 방향은 산업과 문화 어느 쪽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고 그렇게 판단할 사안은 아니고 동시에 고민할 문제다.

-영화계 안팎의 의견을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

=사견이지만, 대토론회 형태는 아닌 것 같다. 필요한 사안도 있겠지만. 이번 위원들 면면을 보면 화학구조가 괜찮은 것 같다. 각자 의견을 개진하는 것뿐 아니라 각 분야의 대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견 수렴에는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본다.

-2003년에 기자를 그만두고 LA에서 1년 동안 영화공부를 했는데.

=스스로 A급 기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자 일이 나에게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씨네21>에 있다가 신문사로 돌아와보니 이 일 말고 다른 일을 하면 어떨까 싶더라. 한때 가판대만 보면 <한겨레>를 맨 앞으로 끄집어내놓던 꼬맹이 아들도 다 커서 나보고 <한겨레>는 엄마 없어도 나온다고 하질 않나. 그러던 차에 연수 기회가 있었다. 1년 코스인 USC 영화·텔레비전 스쿨의 영화이론과 객원연구원 자리였는데. 말이 연구원이지 학교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 골프 쳐도 그만, 낚시 해도 그만인 처지였다.

-가기 전에 무엇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게 있었나.

=그때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새로운 생각을 하나쯤 얻어서 오자.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혼자 있어도 된다는 안도감 같은 것도 얻고 싶었고. 사실 그쪽 학교에서 ‘너, 왜 오려고 하는데?’라고 묻는데, 지원서에 그냥 필름 보존이라고 적었다. 필름 프리저베이션을 하려면 UCLA로 가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쓴 거다. 어쨌든 30년 가까이 쉴 틈 없이 일에 쫓기다가 혼자 딱 떨어져 학교에 가서 영화만 보고 책만 보고 하니까 기막힌 신선놀음이더라. 브레히트의 희곡에 보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왜 발표하지 않느냐는 제자에게 “학문은 지 재미로 하는 거다”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는데, 딱 그 재미다. 큰 강의 위주로 들었는데, 마이클 레노프 교수의 다큐멘터리 강의가 특히 재밌었다. 내 짧은 영어로 3분의 1이나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다큐멘터리를 영화학 내부로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 중 한명인데, 그거 들으면서 다큐멘터리 하면 재밌겠네 싶었다.

-미국 가서 영어는 많이 늘었나. 누가 그러는데 단어가 쓰인 포스트 잇으로 자동차를 도배했다던데.

=남동철 편집장이 그랬나?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그런 건데 한번 붙여놓고 바꿔 붙인 적이 없다. 외운 것도 다 까먹었고. 변명을 하자면, LA에 가면 통역해줄 친구들도 바글바글하고 하다보니 독립적으로 영어 쓸 수 있는 환경이 아니더라. 그래서 지금은 그런다. LA에서 영어 배웠다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평소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위원장직을 맡기 전에도 푸른영상에 출근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은 좀 오래됐다. 87년엔가 뒤늦게 80년 광주 비디오를 봤는데 충격이었다. 이후 좋은 다큐를 보면 관심이 갔고,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싶더라. 푸른영상은 어떻게 된 거냐면, <송환>이 선댄스에 갔잖나. 임권택 감독에 관한 책을 써서 국내에서도 유명한 데이비드 제임스 교수가 그때 김동원 감독을 USC로 초청했다. 상영도 하고 관객과의 대화도 하고 그랬는데 거기서 만나서 ‘나 한국 가면 푸른영상에서 받아줄 거냐’ 물었더니 그러겠다고 하더라. 나중에 안 것이지만 김동원 감독이 푸른영상의 실력자가 아니더라. 전원 합의제다보니 지원서도 내서 합격하면 한달 동안 자원봉사하고 6개월 동안 수습 끝내야 정회원이 되는 건데. 그래서 자원봉사부터 시작한 거다.

-자원봉사 일이 구체적으로 뭐였나.

=자원봉사 일이 뭐냐고 나도 물었었다. 그랬더니 “다큐멘터리 많이 보세요” 하더라. 편집을 위해 사전에 데이터를 받는 일도 하고, 인터뷰 번호 매겨가면서 대사도 풀고 그랬다. 나중에는 기합이 빠져서 농땡이 많이 쳤지만. 조선희, 최보은에게는 내가 서치도 하고, 로깅 작업도 하고 그런다고 자랑했는데 더이상 궁금해하지 않더라. 어쩌면 옛날에는 영화를 많이 만들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고 툴툴거렸는데, 시간이 많아지니까 내가 만들고 싶은 게 이건가, 회의도 들고 어쩌면 거기서 도망쳐 나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언제였나.

=1973년인가. 프랑스영화주간이란 행사를 조선호텔에서 했다. <쥴 앤 짐>을 그때 거기서 봤다. 감독이 누군지도 모르고 봤었다. 그때 신문들은 누벨바그가 뭔지 소개도 안 하던 때니까. 그러고나서 대전에 가서 독일어 선생을 하다가 1977년에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프랑스 문화원이 근처에 있어서 점심시간에 영화보러 갈 기회가 많았는데, 사실 <무도회의 수첩>이니 <장미빛 인생>이니 <밤의 문>이니 그런 감상적인 영화들을 보러 갔었는데 거기서 <도살자>니 <네멋대로 해라>니 <히로시마 내사랑>이니 하는 영화들을 본 거지. 그러면서 ‘어… 어… 어…, 영화도 예술이네’ 했던 거다. 잘 모르지만 한번 관심을 가져봐, 했던 거고.

-그 관심이 이어져 서른 넘어 영화과에 입학한 건가.

=사실 위대한 작품 보면 주눅들어서 접근이 어렵잖나. 고다르 영화 보면서 영화 만들겠단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언젠가 아주 평범한 프랑스 코미디영화를 봤는데, 지금도 제목은 기억 안 나고, 상쾌한 영화긴 했는데 보고 나서 ‘어 저 정도는 나도 만들 수 있지 않나’ 싶었다. 80년 7월30일에 해직되고 난 뒤였을 것이다. 기자 생활 한 건 3년밖에 안 됐지만 80년에 그만둔 기자들은 다들 언젠가 신문사로 복귀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일을 해도 부수적인 것처럼 느꼈었다. 다른 직장에 다니고 있었던 나도 별로 애착이 없었고, 그렇다면 이 기회에 영화를 한번 만들어봐 하는 마음으로 서울예대 85학번으로 편입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내가 정말 영화를 굉장히 잘 만들 줄 알았다.

-그런데 들어가보니 아니었나? 학교 다니면서 단편 작업을 했을 텐데.

=하나는 <봄소풍>이라는 제목이었고, 또 하나는 <창밖에서>였나. 기말 발표회 앞두고 가편집 한 거 보고 있는데 그때 누가 들어와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영사기 렌즈를 손으로 막은 적도 있다. 되게 못 만들었다. 상영 뒤에 전혀 반응이 없었고, 나중에 한 후배가 자신의 영화에 내 영화의 한 장면을 인용했다는 말을 듣긴 했다. 치졸하지, 라는 대사 앞에 끼워넣었다고 해서 언젠가 복수하겠다고 맘먹었는데 결국 못했다.

-<한겨레> 입사 이후, 15년 가까이 문화부에서만 일했다.

=젊었을 때는 문화부가 싫었다. 그거 하려고 기자 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 해직 이후 1년 반이지만 영화공부도 하고 그러면서 문화쪽으로 관심이 고정되어버린 거지. <한겨레>에 와서도 다른 기회를 가져보지 않아서 문화부에 정착을 한 것일 수도 있고, 또 기질상 잘 맞아서일 수도 있고. 당시 문화부에 고종석, 조선희 이런 친구들이 있었는데 같이 떠들고 그러는 분위기가 좋았다. 매일매일이 MT고, 학습이고 그랬으니까. 서커스 기사를 문화면에 넣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이런 것 가지고도 논쟁을 벌였던 시기였다.

-영화기자 시절, 취재원들에게 당황스러울 정도로 깍듯하게 대했다고 하던데.

=특별한 건 없다. <한국일보> 해직 동기들끼리 다시 기자 하게 되면서 무슨 특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진 말자고 하긴 했지만. 아마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하고 싶어서 힘들게 노력하던 사람들이었을 테고, 내 입장에선 그런 모습들이 보기 좋았고, 그래서 호기심을 유지하며 취재를 한 결과일 순 있겠지.

-평기자로 남기를 고집했던 이유는 뭔가.

=지금 생각하면 싸구려 낭만인 것 같은데. 입사했을 때 30년 뒤에도 머리 허연 평기자로 남고 싶었다. 조직이 정한 단계를 밟기도 싫었고. 원래 책임을 맡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땐가. 선생이 반장하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전근 가신다고 해서 면한 적이 있다. 5월쯤 돼 선생이 전학 안 가는 나를 이상하게 여겨 ‘아버지 전근 안 가시냐?’고 묻기에 ‘이미 전근 가셨어요. 전 자취해요’ 그랬었다. 게다가 어느 날 남편이 정치를 한다고 하니까. 공연한 오해를 받기 싫었다. 바르게 처신한다고 하더라도 만에 하나 남에게 이상한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잖나. 찜찜한 거지. <씨네21>은 상관없을 줄 알아서 간 건데. 편집장이 나서야 한다는 대선후보 인터뷰 때 고민하다 결국 뒤로 빠져야 했다.

-기자 일 하다보면 때론 ‘기생하는 자’의 비참함 같은 게 있다. 창작에 대한 갈증을 갖고 있는 이에겐 특히 더할 텐데. 일하면서 갈등은 없었나.

=<한겨레> 기자였잖나. 그 정열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다 그랬지만 자나깨나 <한겨레>, 눈 떠도 눈 감아도 꿈 꿔도 <한겨레>, 뭐 그랬다. 그랬으니 자의식이 싹틀 기회가 없었지. 그런 말 있잖나. 없는 집에선 자식들이 공부라도 잘해야 한다고. <한겨레>가 아무것도 없으니까 우린 기사라도 잘 써야 한다, 뭐 그랬었다. 93년이었을 텐데. 아버지가 투병 중에 하루는 ‘정숙아, 니 글은 언제 쓸래?’ 하셔서 ‘저, 만날 써요. 기명기사 나오잖아요’ 했던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내가 글 잘 쓰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진 ‘아니, 니 글 언제 쓸 거냐고, 제발 니 글 보고 싶다’고 계속 그러셨고. 암으로 돌아가시고 나서야 처음으로 내가 글 쓴다는 행위가 뭔지 곰곰이 따져보게 되더라. 그뒤로 글 말곤 딴 일을 벌이진 못했다.

-영화기자 하면서 만났던 이들 중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누가 있나. 스승 같은, 때론 친구 같은.

=임권택 감독님을 참 좋아했다. 서울예대 다닐 때 현장 가서 밑에서 연출부 하고 싶은 감독이었다. 장선우, 박광수 감독은 시대가 바뀌었지만 <한겨레> 시작할 때 함께 영화를 시작했던 사람들이라 동시대를 살았다는 느낌이 있고. 뒤통수 얻어맞은 듯한 영화를 만들어 질투와 경외심을 갖게 했던 홍상수 감독과의 인터뷰도 좋았고. 좋은 영화 만든 감독들과의 만남은 다 그랬다. 정지영 감독 같은 경우엔 <남부군> 지방 촬영 끝내면 피곤할 텐데 서울 올라와서 각종 성명서 내던 열정이 맨먼저 떠오르고. 김혜준 국장(현 영진위 사무국장)은 외국에서 한밤중에 전화해서 뭘 물어볼 정도로 살아 있는 데이터베이스였고. 아, 그리고 유영길 촬영감독. 그분이 눈이 되게 형형하잖나. 인터뷰 첫머리에 80년 광주 이야길 하시면서 자신이 필름을 전달하러 송정에 가던 날 광주에서 발포가 있었다고, 그런데 카메라 기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길 하시던 때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유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 거기 한국의 빛이 잡혀 있잖나. 촬영할 때 필름 색온도를 계산한 거는 아닐 테고, 경험이 쌓여서 그런 것일 텐데,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빛, 골목의 빛을 보면서 내가 경험한 오후의 빛이다,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신문 만들다가 잡지를 만들었을 때 어떤 재미가 있던가.

=깊이 볼 수 있다는 재미는 있는데 피가 마르지. <한겨레>가 어떤 기사를 썼는지가 그날 부수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진 않지만, 주간지는 편집이든 문체든 독자들 꼬시려고 악을 써야 하니까.

-악 쓰다보면 짜증이 날 때도 있었을 텐데. 화를 좀처럼 내지 않았던 것 같다. 부처님 혹은 호호 아줌마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고.

=<씨네21> 간다고 할 때 신문 문화부 후배들이 나한테 한 이야기가 있다. ‘안 선배, 여기서처럼 성질 부리지 마세요.’ 울끈불끈 성질 내지 말자, 이번 기회에 성격 개조하자 다짐했지.

-개인적으로 영진위에서 일하면서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한국영화가 영화제에서 상받는 것뿐만 아니라 외국 극장에서도 활발히 상영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국내에선 시네마테크들이 많이 생겨서 좋은 프로그램 많이 돌려볼 수 있으면 좋겠고. 한국영화의 난관들을 풀어가지 못하면 영진위가 일을 잘 못해서라고 욕먹을 텐데, 힘 모아서 또 다른 도약의 발판을 만드는 데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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