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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 1%의 어떤 것

<초능력자>의 초인, 강동원

<형사 Duelist>에서 자객 ‘슬픈눈’(강동원)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이라는 문장을 끝내 맺지 않았다. 그래도 화가 치밀진 않았다. 강동원이라는 비밀. 그는 비밀과 어울리는 배우다. 유리창의 빗물처럼, 섬세하지만 느긋하게 흘러내리는 선으로 이뤄진 그의 외양은, 담백한 음색의 우직한 말투와 기이한 불협화음을 낸다. 누군가의 깊은 계략으로 합성된 존재 같다. 요괴인간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초능력자>의 강동원에게도 이름이 없다. 그냥 ‘초인’이다. 주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의지를 훔쳐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힘이 그가 가진 능력이다. 초인의 염동력은 눈빛으로 표현된다. “그럼 이번엔 ‘못된눈’?” 씩 웃으며 강동원이 말한다. <초능력자>의 초인은 슈퍼히어로라기보다 돌연변이다. 세상을 위해 능력을 발휘할 의사는 고사하고 자기를 밀어낸 세상과 관련을 맺으려는 의지가 없다. 그렇다고 거창한 악행을 기획하지도 않는다. 그는 인간을 멸시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생존하는 텅 빈 미지수의 존재, 즉 엑스맨이다. 그러고보니 영화 <엑스맨>의 뇌파를 조종하는 자비에와 인류를 적대시하는 매그니토를 한데 뭉뚱그렸다고 표현하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초인은 단절된 상태에서 살아왔고, 모든 사람을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간을 깔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 점을 확장해가며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초능력자>의 시나리오를 본 분들이 그 능력으로 왜 은행은 안 터냐, 정권 탈취나 지구 정복은 왜 꾀하지 않냐고 물으시는데, 김민석 감독님과 저는 조금도 의문을 가진 적이 없어요. 초능력자도 각자 성격이 다를 거 아니에요? 돈이나 권력에 무관심한 게 이 사람의 성격이에요. 그리고 저라도 은행은 안 털겠어요. 요즘 같은 첨단 시스템에 꼬리 밟혀 일을 키우느니 조금씩 훔쳐 티끌 모아 태산으로 사는 편이 낫죠. (웃음)”

대도시에 숨어 사는 맹수와 같은 ‘초인’, 그의 정체를 홀로 알아보고 추적하는 소외 계급의 인물이 등장하는 <초능력자>의 시나리오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옷깃이 스치는 부분이 있다. 만약 한강에 은둔한 괴물에게 인격을 부여한다면 초인과 같은 형상이 아닐까.

“초인은, 일종의 괴물이 맞아요. 괴물은 한강에 숨어 살면서 가끔 출현해 괴이한 일을 벌이고 돌아가잖아요? 그런 괴물한테 '넌 왜 거기서 그러고 사니, 밖에 나와서 살아라' 하면 우스운 일이잖아요. 거기가 편해서 그렇게 사는 건데. (웃음) 초인은 기본적으로 짜증을 품은 캐릭터고, 광기와 똘기가 있어요. 때려부수는 장면에서도 감정의 진폭을 세게 줬어요.”

배우 7년차, 이제 시작이다

186cm의 키와 스포츠카 스포일러처럼 날렵한 손발, 근육을 염두에 둔 운동은 따로 하지 않는 습관을 가진 강동원은 착지의 순간, 동작의 맺음이 유난히 아름다운 배우다. 대부분의 전작에서도 신체적으로 능란한 인물로 분했다. <형사 Duelist>와 <전우치>의 비할 데 없이 가볍고 유려한 와이어 액션은 물론, 묵묵한 인물로 나온 <의형제>에서도 간소하나 딱 떨어지는 액션을 보여주었다. 반면 <초능력자>에서 초인은 물리적 파괴력을 자기 몸으로 표현할 수 없다. 처절히 뛰고 구르는 것은 상대역인 규남(고수)쪽이다. 대신 초인 강동원이 섭렵해야 했던 것은 눈 연기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였다. <괴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연출부였던 김민석 감독의 데뷔작 <초능력자>의 고사를 찾은 봉준호 감독은 강동원을 이렇게 다정히 격려했다고 한다. “너, 눈알 빠지겠다?”

“그때만 해도 기존 눈빛 연기와 다른 걸 보여주자는 결심으로 ‘힘주지 말아야지’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해당 숏이 요구하는 표현의 세기가 있으니 도리가 없더라고요. 바닥난 집중력 끌어올리는 순간에 힘을 뺄 수는 없죠. 결국 ‘눈알 빠지겄네’ 그랬어요. (웃음) 후반작업에 더해질 CG도 감안해서 연기해야 했어요.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 때 초인의 눈이요?… 뭐, 이런 거? (가늘고 비스듬하게 눈을 치뜬다. 서늘한 경멸이 어린다.) 사실 지구 정복 안 하는 이유는 눈이 피로해서일지도…. (웃음) 초인의 능력이 무한한 것이 아니어서 동네만 정복만 해도 탈진하는데, 지구를 어떻게… 하하.”

사실 눈 연기는 게으른 비평이 남자배우의 연기력을 깎아내릴 때 상투적으로 꺼내드는 카드다. 이 점만 보아도 <초능력자>의 초인은 배우에게 약간의 모험이 따르는 역할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고군분투하며 관객의 연민을 사는 상대역 규남과 비교하자면, 초인은 영화 도입에서 카리스마로 주위를 휘어잡은 뒤 점점 피폐해가며 버텨야 하는 악역이다. 게다가 초능력에 면역이 있는 규남을 제외하면 한 장면 속 인물들이 걸핏하면 허수아비가 되는 탓에 상대와 상호작용하며 상승효과를 만들 여지도 적다. 통제된 연기의 조건을 끌어안고 그 안에서 적당한 표현을 발명하는 법,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영화의 흐름에 몸을 싣는 법. <의형제>의 경험이 가져다준 배움이 아니었더라면 강동원은 <초능력자>를 지금처럼 자신있고 흔쾌하게 맞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계획을 즐기고 구조 만들기에 능한 이공계적 인간 강동원이 13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만든 경력 7년차 현재를 “배우로서 시작지점”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의형제>의 송지원은 감정을 조금만 발산해도 캐릭터가 무너질 듯 아슬아슬했어요. 반복 상황도 많고 엄청 답답했죠. 그런데 유사한 제약을 송강호 선배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풀어가시더라고요. ‘이게 맞아!’ 하고 훌쩍 뛰어넘기도 하고 감독이 이의를 제기하면 ‘그래?’ 하고 금세 다른 해석을 보여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물론 선배와 다른 제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했지만, 최적의 답안을 낸 다음 그걸 파고드는 그때까지의 제 방식을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겠다고 깨달았어요. 여전히 혼란 속에서 <의형제>를 찍었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며 진짜 자신이 생겼어요.(<의형제>로 그는 얼마 전 영평상 남우주연상을 탔다.) 아무것도 안 해도 영화의 흐름 안에 있으니 괜찮구나, 뭔가 할 수 있으면 좋고 아무것도 안 하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수 있구나. 그러고 나니 역으로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자꾸 생겨났어요. 영화는 계산을 한다 해도 앞 장면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고 어떤 연기가 선택될지 모르니 정답이 없잖아요? 그래서 <초능력자> 찍기 전 <카멜리아>의 <러브 포 세일>에서 좀더 의식적으로 실험해봤어요. 편해지니 제스처도 굉장히 자유롭고, 연기하기 좋았죠.”

‘우리 세대’에 대한 책임감

연기적 성취감뿐 아니라 경력으로 보아도 어느덧 강동원은 한국 남자배우군의 허리다. 제안도 많아졌지만 그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일도 생겼다. 현장의 즐거움을 느끼고, 집단창작의 메커니즘을 익힌 다음으로 책임감과 사랑이 찾아왔다. 몇해 전부터 그의 인터뷰를 읽다보면 “ ‘우리 세대’는 더 잘해나가야 한다”는 말에 내비치는 세대의식, 활기가 예전만 못한 산업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정도를 넘어서는 그의 적극적 태도가 시선을 붙들었다. <의형제>가 두 번째 장편이었던 장훈 감독에 이어 전혀 다른 스타일의 또 다른 신인 김민석 감독과 작업하며 강동원은 새로운 재미와 만족을 느끼고 있다. 회사를 통해 들어오는 시나리오뿐 아니라 신뢰를 쌓은 영화인과 더불어 영화를 상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강동원은 군복무로 공백을 갖는다. 그와 영화는 서로를 기다리며 예비할 것이다.

“장훈 감독님도 제가 군복무 마칠 때까지 재밌는 시나리오 써놓고 기다리겠다고 해요. (웃음) 영화계를 직장으로 여기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됐고요. 좋은 신인감독이 있다면 작품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도 하지만 안전하게만 가면 우선 저부터가 재미가 없으니 당연한 방향이죠 뭐. 무슨 의미있는 길을 걷겠다는 게 아니라, 영화가 다양해져야 힘을 키우고 모두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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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협찬 릭 오웬스 · 장소협찬 엔트러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