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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편집장] 시네필 다이어리
이주현 2023-10-16

몸과 마음이 분주해서 극장으로 도망친다. 이곳에선 오직 영화만이 나를 기다린다. 잠시나마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영화를 본다. 운 좋게 좋은 영화를 만난다면 잡생각도 사라질 것이다. 영화로 도피하기에 영화제만큼 완벽한 곳도 없다. 문제는 숨을 곳이 너무 많다는 것뿐. 10월4일부터 13일까지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다. 영화제에서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텐데, 나의 올해 전략은 국내 개봉이 확정된 해외영화제 수상작 혹은 화제작을 발 빠르게 챙겨 보는 것이 아니라 국내 개봉이 요원해 보이는 탓에 영화제가 아니면 만나기 힘든 영화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중하게 만난 두 영화는 프레데릭 와이즈먼 감독의 4시간짜리 다큐멘터리 <메뉴의 즐거움-트와그로 가족>과 루이 빌게 제일란 감독의 3시간짜리 영화 <마른 풀에 관하여>다.

<메뉴의 즐거움-트와그로 가족>은, 뉴욕 공립도서관의 시공간을 기록한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이야기를 채집한 <내셔널 갤러리>, 파리 국립오페라 발레단의 구석구석을 비추는 <라 당스> 등과 비슷한 영화적 방법론을 취하는 와이즈먼의 44번째 영화다. 카메라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미슐랭 스리스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가족의 시간을 따라간다. 토양과 기후처럼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핵심이 되는 와인의 양조 과정과 마찬가지로 프레데릭 다큐멘터리의 핵심도 단순함-가만히 오랫동안 응시하기에 있다. 그렇게 순수하게 축적된 시간이 역사와 예술과 삶을 들춰낸다. 참고로 <메뉴의 즐거움-트와그로 가족>과 함께 트란 안 홍 감독의 <프렌치 수프>까지 챙겨본다면 프랑스 미식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른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만 수상한 것이 수상한, 루이 빌게 제일란의 <마른 풀에 관하여>는 튀르키예의 한 시골 마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주인공인 영화다. 미술 교사 사메트는 의식 있는 지식인이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옹졸하고 위선적인 인물이다. 영화에는 사메트가 찍는 빼어나게 훌륭한 인물 사진들이 등장하는데, 사진과 영화라는 이미지의 예술은 우리가 보는 것, 안다고 믿는 것, 진짜라고 믿는 것을 재고하게 만든다. 우리는 끝내 풍경에 박제된 듯 서 있는 사람도, 그 사진을 찍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한 채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한편 영화에 이런 말이 나온다. “역사는 반복된 희망의 피로다.” 거장은 이번에도 반복되는 계절 속에서 희망일 수도 피로일 수도 혹은 둘 다 일 수도 있는 삶에 부단히 접속한다. 영화가 끝나자 극장에선 뜨거운 박수가 두번이나 터져나왔다.

지금 여기가 아니면 언제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영화들로 가득한 영화제 중에는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도 있다. 10월20일부터 24일까지 열리는 BIAF에서 올해 칸영화제,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수준 높은 해외의 장편애니메이션들을 극장에서 만나기가 힘들어졌는데, 올해 BIAF 홍보대사인 최예나가 추천한 <샌드랜드>, 올해 안시에서 장편영화 대상을 수상한 <치킨 포 린다!>는 놓칠 수 없다. 지금이 아니면 안되는 영화들을 챙기느라 이번 가을도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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