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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면
임소연 2023-10-19

인간을 닮은 기계를 열망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시대, <프랑켄슈타인> 읽기 딱 좋은 때다. 마침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빅터의 창조물이 처음 등장하는 부분을 학생들과 소리내어 읽었다. 괴물의 외형을 묘사하는 구절을 읽던 중 유독 ‘쭈글쭈글한 얼굴 살갗’이라는 표현이 귀에 들어왔다. 문득 수년 전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분만실에서 처음 만난 아기는 참 쭈글쭈글했었지.

책을 읽기 전 저자인 메리 셸리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을 훑어봤다. 영화 속 메리의 삶은 단 한순간도 순탄치 않았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시고 이후 그가 어린 나이에 낳은 아이는 병으로 곧 죽어버렸다. 그가 몸소 경험한 탄생과 죽음의 연쇄가 소설 속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생명 창조의 꿈을 꾸고 그러한 꿈의 결과로 탄생한 창조물이 여러 사람을 죽이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괴물의 살갗이 하필이면 쭈글쭈글했던 것은 저자 자신의 출산 경험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빅터가 자신이 공들여 만든 창조물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지 않은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신화화된 어머니의 이야기와 달리 현실 속 많은 어머니들이 아기를 낳자마자 모성을 느끼지는 않으며 산후우울증으로 아이에 대한 미움이나 양육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니까 말이다. 자신이 애써 만든 생명체를 혐오하고 혼란에 빠지는 빅터에 나는 잠시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빅터는 괴물을 버린 적이 없다. 잠시 충격을 받고 그 자리를 떠났을 뿐 괴물을 적극적으로 유기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만약 괴물이 아기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혼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아기는 한숨 돌리고 다시 돌아온 빅터의 품에서 보살핌을 받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빅터의 보살핌이 부족해도 이웃이나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자랄 가능성도 있다. 괴물의 기괴한 움직임도 아기였다면 귀여운 배냇짓으로 보였을 테니까 말이다.

인간은 아기에게 귀여움을 느끼고 그 귀여움에 대한 반응으로 양육 행동을 하도록 진화해왔다고 한다. 아기의 입장에서 보면 귀여움은 생존 전략이다. 그래야 미숙한 상태에서 버림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귀여움의 진화론은 인간 아기의 생존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식당에서 주문한 식사를 가져다주거나 미술관 안내를 해주는 로봇에는 귀여운 눈, 코, 입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낯선 기계는 아이의 얼굴을 함으로써 (때로는 비슷한 이유에서 동물이나 여성의 얼굴을 함으로써) 인간을 위협하지 않는 존재로 생존할 수 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에 온 마을이 필요하다면 인공지능이나 로봇도 온 사회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텐데 귀여운 아기의 얼굴을 빌리지 않고서도 가능할까? 아니 아이들도 잘 자라기 힘든 사회에서 기계를 잘 키우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확실한 것은 올해에도 <프랑켄슈타인>을 읽기 잘했다는 것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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