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왕따에 대한 재해석

대략 말해서 나는 모범생의 인생을 살았다. 모범생이 가질 법한 콤플렉스 혹은 자존심 때문에 아웃사이더에 대한 관심과 호감도 제법 표했지만, 그것마저도 범생이스러운 관용의 일부였을 것이다. 모범이라는 가치관은 지루하고 억압적이므로, 그런 유의 기웃거림은 일종의 얌전한 일탈로서 내 심신을 부분적으로 해방시켜주는 기능도 했을 것이다. 토끼가 목 축이고 간다는 산속 옹달샘처럼.

그런데 내가 이 세상 왕따 중의 왕따들과 한편이 되는 순간이 있었다. 예전에 본의 아니게 어딘가에서 지내다 나온 적이 있는데,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관계가 거기에서 펼쳐졌다. 아침저녁으로 포승에 묶여 조사받으러 다니는 동안, 유치장을 제집 드나들 듯하는 한 청년은 화장지로 만든 한 다발의 꽃을 선물해주었고, “아이고, 이 생기다 만 사람 좀 보게. 한여름에 털옷이 웬 말이야” 하면서 저녁이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아침이면 머리를 땋아주던 사람은 소매치기 대장 아줌마였다. 얼굴도 모르는 어떤 이는 운동 중에 네잎 클로버를 주웠다며 간수를 통해 전해왔다.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져봤던 행운의 네잎 클로버는 한톨의 희망이 간절한 사람과 장소로부터 주어졌다. 그러면서 다들 저녁이면 모여앉아 자기의 죄를 변명하고 어떻게 하면 처벌을 모면할까 궁리했고 서로 욕하며 싸우기도 했다.

쉽거나 행복하진 않았지만 진기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범죄자와 정신이상자, 예술가와 혁명가가 어찌 보면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 말라는 짓을 하거나, 제정신을 놓아버리거나, 이성과 감성과 기술을 통해 문제제기를 하거나, 모두 기존의 질서가 답답하고 적응이 덜 되기는 마찬가지인 사람들일 터이다.

다큐멘터리 <송환> 또한 이 사회의 왕따들이 만나 탄생된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그런 존재가 여기 없다는 듯이 수십년간 유폐되었던 장기수 선생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번영의 영화판에서 주류가 아닌 변방을 끊임없이 응시하는 김동원 감독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발적인 소외자다. 그외에도 약육강식의 경쟁 시스템에 힘이 못 미치는 사람들, 원칙을 고수하려는 사람, 남들이 아직 사태를 파악하기 전에 미리 내다보는 사람들도 우리 사회에서는 쉽사리 왕따가 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우리가 몸담고 만들어내는 공동체가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다 알면서 눈감고 사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만들며 괴롭힌다는 데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마이너리티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는 지극히 중요한 진보가 시작되었지만, 실은 왕따가 마이너리티 곧 소수자의 문제가 아니라 다수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의 바탕에 깔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따는 경계선 밖에 있는 ‘그들’이 아니라 1인칭으로서의 ‘우리’ 자신이다. 유능한 의사 장금이는 환부를 탓하지 않고 그 몸의 조화를 묻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