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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연의 영화비평] 잔혹한 역사적 사건을 장르적으로 소비한 <클랜> 파블로 트라페로의 방식

<클랜>

다소 거창하게 시작해보자. 영화가 역사를 기억하고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 말이다. 아무리 상업영화라 하더라도 여기에는 재현의 정치학과 윤리학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거창한 이슈인 만큼 뛰어난 프랑스 비평가의 사유를 빌려와도 좋을 것 같다. 세르주 다네는 영화가 ‘역사의 귀환’이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프랑스에서 영화가 프랑스 자신의 역사를 책임지는 문제”에 대해 숙고했었다. 여기서 세르주 다네가 특정했던 ‘프랑스’라는 단어만 빼버린다면, 모든 영화는 그 자신이 속한 나라의 역사에 대한 기록 혹은 상기와 관련해 논해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화두가 진지한 시네필이나 영화학자들만의 것으로 남겨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를 방문하기도 했던 아르헨티나 감독 파블로 트라페로의 영화 <클랜>은 매우 과감하고 저돌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현대사의 한 지점을 건드린다. 일명 ‘더러운 전쟁’(1976년부터 1983년까지 지속된 갈티에리 군부정권의 민간인 납치 고문 학살을 일컫는 말로, 이 기간 동안 대략 3만여명이 납치, 고문, 살해, 실종되었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군부 정보요원 출신으로 온 가족이 납치 살해극에 가담했던 실존 인물, 푸치오 가족이 행한 4건의 범죄를 다루고 있다.

극중 아르키메데스 푸치오는 교사 출신인 아내와 3남2녀의 자녀를 둔 가장이다. 그중 큰아들인 알렉스는 스타 럭비선수로,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가 있다. 이웃들에게 푸치오 일가는 매우 성실하고 상냥한 가족으로 비쳐진다. 뿐만 아니라 아르키메데스는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권위 있고 다감한 가장이다. 그러나 이들의 집 한켠에는 아르키메데스와 알렉스가 납치한 희생자들이 감금된 채 고문당하고 있다. 아내와 아이들은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 희생자들이 내지르는 비참한 절규가 때로는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대개는 무심하게 단란한 가족의 일상을 수행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다. 1983년 12월, 군사정권이 실각하고 민주주의 재건을 주장한 알폰신 정권이 집권하게 된 것이다. 납치 살해한 희생자들의 가족으로부터 돈을 갈취해 군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했던 푸치오 가족의 위기는 여기서 비롯된다. 더이상 군부나 경찰이 그를 비호해주기 힘든 상황으로 세상이 변한 것이다.

정서적 불편함의 이유

푸치오 가족의 이야기는 2011년 아르헨티나에서 책으로 출간되면서 화제를 끌기 시작했다. 2015년에는 TV시리즈로, 그리고 이 영화 <클랜>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클랜>은 아르헨티나에서만 무려 15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지난 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까지 수상했다. 그러나 비평계의 반응은 엇갈렸다. 희생자들이 여전히 생존하는 현대사의 구체적인 한 사건을 각색한 이 영화가 윤리적 딜레마를 수반한 것이다. 마치 마피아 보스처럼 행동하는 푸치오의 살상극은 미드 <소프라노스>나 마틴 스코시즈의 마피아영화에서처럼 살해되어도 무방한 가상적 캐릭터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사라지거나 희생당한 사람들 대부분은 노동조합원, 학생, 지식인들이었으며 그들의 가족은 오랫동안 ‘5월 광장의 어머니’들처럼 무책임한 정부와 기나긴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그러나 파블로 트라페로의 선택은 세르주 다네가 진지하게 질문했던 ‘역사의 귀환과 영화적 책임’이 아니라 과거와 기억의 장르적 재구성, 역사의 스펙터클화였다. 이 영화 <클랜>은 장르적 긴장과 서스펜스를 만들어내기 위해 역사적 시간을 파편적 시간으로 재구성하고, 인물들의 관계 및 정황들에 대해 마치 관객이 풀어나가야 할 퍼즐처럼 배치한다. 잔혹한 역사적 사건을 영리한 장르적 포뮬라와 컨벤션으로 소비하고 있는 이 영화는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을 만들어낸다. 특히 영화의 중반부까지, 2명의 희생자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장면을 감독은 알렉스의 일상들(박진감 있는 럭비 훈련 장면, 여자친구와의 격렬한 섹스 신 등)과 의도적으로 교차편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알렉스 신에 활력을 불어넣는 경쾌한 음악으로 두 상황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한 장면들을 폭력의 아이러니 혹은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항변할 수는 있겠지만, 그 정서적 모드의 불편함은 피하기 어렵다.

윤리적 딜레마 다룬 트라페로의 전작들

국내에선 낯선 이름이지만 파블로 트라페로는 이미 유럽의 평단에서는 오랫동안 언급되고 지지받는 감독이었다. 1999년 장편 데뷔작 <크레인 월드>로 단박에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한 그는 이후 <비밀 경찰>(2002), <사자굴>(2008), <카란초>(2010) 등의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칸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그의 필모그래피 속에서 보자면 이번 영화 <클랜>은 상업적인 기획과 연출력이 가장 강한 작품이다. 영국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조너선 롬니는 “이 영화 이전에 트라페로는 결코 나쁜 영화를 만든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클랜>에 대해서는 ‘형식적 스타일이나 정치적 감각에 대해서 새로울 것이 없는 진부함’이라고 요약한다.

전작들에서 트라페로 감독은 아르헨티나 사회의 부조리와 폭력의 역사에 휘말린 개인들의 삶을 롱테이크숏으로 포착해왔다. 가난한 청년이 부패한 경찰조직에 들어가면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권력과 폭력의 하수로 자리잡아가는 모습을 그린 <비밀 경찰>이나 교통사고 피해자들의 보험 보상금을 갈취하는 변호사의 비극적 분투를 그린 <카란초>는 희생자의 관점이 아니라, 권력의 하수로 살아가는 자들의 삶에 권력과 폭력이 어떻게 각인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살인사건 용의자로 몰린 한 여성의 수감생활과 탈출을 묘사한 영화 <사자굴> 역시 윤리적 딜레마를 포함한 작품이다. 영화는 온몸에 희생자의 피를 묻힌 채 자신의 집에서 깨어나는 한 여자로 시작한다. 그녀 옆에는 애인이 난도질당한 시체로 발견되고 또 다른 남자 친구가 중상을 입고 발견된다. 모든 정황은 그녀가 용의자임을 증명하지만 그녀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 영화는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다 탈옥하는 그녀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끝내 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녀의 진범 여부는 더이상 다뤄지지 않는다.

장르적 캐릭터만 남다

트라페로는 매우 미묘한 방식으로 결국 가해자일 수밖에 없는 이들을 묘사해왔다. 그것은 영화 <클랜>에서도 반복된다. 아르키메데스는 평범함과 자상함으로 위장된 권력의 사이코패스로 묘사된다. 딜레마는 알렉스다. 그는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한 채 갈등을 겪는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트라페로는 인터뷰를 통해 실제 이 가족이 어떤 심리였는지 밝힌 바 없으며 구체적인 것들과 캐릭터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극화한 것이라 말했다. 딜레마는 ‘극화’에서 고조된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국가적 폭력이 국민에게 용인될 수 있는지, 가족(아버지 가부장의 권위와 자식들)의 알레고리로 묘사된 작품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서사 구조와 수사학은 장르적 스펙터클에 기댄 채 역사적 상처를 외설적으로 소비하는 위험을 더 많이 드러낸다. 트라페로의 치밀한 장르적 트릭과 연출가로서의 영민함은 이 영화에서 오히려 불온해진다. 영화 <클랜>에는 그가 오랫동안 질문했던 아르헨티나 사회의 부조리한 권력과 폭력의 구조는 사라지고, ‘선한 가면을 쓴 악랄한 사이코패스’, 장르적 캐릭터만 어슬렁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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