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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영화비평] <존 윅: 리로드>와 고독한 킬러의 자리

<존 윅: 리로드>(이하 <존 윅>)의 도입부. 건물의 한쪽 벽 위로 버스터 키튼의 <셜록 주니어>(1924)가 영사되는 중이다. 키튼의 꿈속에서 분리된 자아가 탐정 셜록으로 분해 영화 속으로 뛰어든다. 도난당한 진주를 되찾은 그가 악당들로부터 도망치는 거대한 시퀀스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조수의 도움으로 모터바이크 앞에 걸터앉은 그는 조수가 떨어져 나간 걸 모르고 있다. 엄청난 속도로 모터바이크가 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별로 놀라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 그의 별명이 ‘그레이트 스톤 페이스’ 아니던가.

그런 그가 극중 드물게 극도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그의 모터바이크가 달려오는 철도 및 자동차와 부딪힐 뻔한다. <존 윅>은 키튼이 머리를 감싸쥐며 공포를 체감하는 바로 그 장면을 보여준다. <셜록 주니어>는 1924년에 만들어진 영화이며, 키튼은 몸을 놀려 연기하는 배우들의 위대한 선배다. 이미 한 세기 전에 키튼은 액션배우들이 미래에 맞닥뜨릴 적이 바로 첨단의 기계장치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시스템임을 예감했던 것이다.

<셜록 주니어>가 영사되는 벽을 향하던 카메라가 갑자기 아래로 툭 내려온다. 아래쪽 도로 위로 모터바이크가 난데없이 굴러떨어지고 이어 존 윅이 탄 차가 등장한다. 카메라의 급박한 움직임 때문인지 흡사 <셜록 주니어>가 현대식 모터바이크를 낳은 것처럼 보인다. 억지 상상이라고? 존 윅으로 분한 키아누 리브스의 별명 또한 ‘그레이트 스톤 페이스’인 게 단지 우연일까? <존 윅>은 정신없으면서도 꽉 짜인 도입부를 통해 이 영화가 몸으로 임해야 하는 인물, 음모에 싸인 인물들의 운명에 관한 것임을 밝힌다. 기실 이후 장면들에서 나는 이소룡, 주윤발도 모자라 리브스 자신이 연기했던 ‘네오’ 및 게임 캐릭터들, 심지어 거울의 미로에 빠진 오슨 웰스 등과 재회해야 했다. 존 윅의 거울에 해당하는 그들은 대체로 맨손을 쓰는 편이다. 킬러로 행세하기 위해 기껏 갖춰봐야 총 정도만 지닐 따름이다. 예전 영화에서는 그 정도면 해결됐다. 그러나 지금은 ‘포스트 제이슨 본’의 시대다. 맨손으로 기계나 거대 시스템과 대결하려면 힘에 부친다. 그럼에도 존은 제이슨 본보다 키튼에 더 가까워지려 한다. 그는 그런 인물이다.

쉼 없이 싸워야 하는 남자

나는 간혹 필름 속에서 인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호기심을 품곤 한다. 프리즈프레임처럼 굳은 자세로 묶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난 당신의 상상력을 의심할 것이다. 왠지 그들은 쉬고 있을 것 같다. 그러다 필름이 돌아가면 다시 몸을 털고 움직일 거라고, 필름의 유령이 있다면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존은 그럴 확률이 더 높은 인물이다. 계속해서 ‘은퇴’를 언급하는 그이기에, 극중 한 장면은 각별하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현상금을 노리는 킬러들의 집중 공격을 막아낸 존은 불현듯 피곤함을 느낀다. 그는 지하철의 노숙자처럼 보이는 자에게 다가가 특유의 동전을 건네며 그(‘피셔킹’을 오마주한 인물)에게 데려가달라고 부탁한다. 그가 잡동사니 아래로 몸을 숨기자, 노숙자는 그의 몸 위로 넝마를 덮어준다. 멋진 액션스타가 본연의 행색으로 돌변하는 순간. 어떤 액션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장면이다. 이것을 두고 내가 알지 못했던 킬러의 이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몸을 굴려야 하는 자가 휴식을 취해 마땅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나, 그것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굳이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 윅>을 보고 ‘게임 같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일견 맞는 표현이다. 단 어떤 것에 대해 게임적(的)이라고 말하는지, 그 부분은 엄격할 필요가 있다. 존이 총 몇 자루를 들고 수십, 수백명에 이르는 상대방을 눈 하나 깜빡 하지 않고 죽이는 데 방점을 두고 그런 말을 했다면 시큰둥한 반응을 들어도 싸다. <존 윅>이 게임적인 건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 그러해서다. 게임의 캐릭터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무대에 올라야 한다. 그는 선택되어지고, 마찬가지로 선택된 다른 캐릭터와 겨루어야 한다. 설령 버거운 상대가 나와도 어쩔 수 없다. 그는 쉴 수 없으며 그렇게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존 윅>의 로마 시퀀스가 대표적인 예다. 원하지 않았던 살인 임무를 장엄하게 끝낸 존은 이탈 도중 카시안과 마주친다. 동료였으나 지금은 적이 된 사이. 파티에 열광한 군중 앞으로 두 사람이 마주 선 장면은 영락없이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다. 이후 전개되는 긴 액션 시퀀스에서 존은 어떤 게임 캐릭터 못지않은 분량을 소화한다. 총으로 대학살극을 벌인 다음, 거리로 나와 카시안과 육탄전에 돌입한다. 긴 시퀀스 내내 대사라고는 단 몇 마디에 불과하다. 두 인물이 뒤엉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며 내는 ‘욱, 억, 퍽’ 소리는 어지간한 게임의 음향 효과에 맞먹는다.

샘 페킨파는 몸으로 살아가는 남자들을 주로 다뤘던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남자들은 사는 것만큼 죽어가는데, 그들 중 <케이블 호그의 노래>(1970)의 가치는 남다르다. 호그는 서부의 남자이면서 총으로 죽지 않는 이상한 인물이다. 황야를 누비며 살았던 그는 우연히 샘을 발견하고 거기에 정착한다. 몸을 팔아 생존하는 매춘부 힐디와 사랑도 나눈다. 죽음이 그를 찾아온 날, 그는 처음으로 자동차라 불리는 물건을 보게 된다. 말없이 달릴 수 있는 기계를 본 그는 새삼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꿈꾼다. 그것이 그의 죄다. 황야에서 사는 게 그의 운명이다. 그는 문자 그대로 ‘자동차 바퀴’에 깔리는 바람에 목숨을 잃는다. 수십년 전 키튼이 예감했던 게 영화적으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작가와 관객이 킬러를 고독하게 한다

<존 윅>에서 존은 전편에서 싸운 악당 두목의 형제와 ‘화해’의 악수를 나눈다. 이미 한번 은퇴했던 그는 더이상 누군가를 죽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를 살인의 길에 얽매이도록 만드는 게 내부의 규칙인 양 보이지만, 기실 그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건 꽉 짜인 시스템과 기계들이다.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지령과 그것을 전달하고 받는 시스템이 존을 몸부림치도록 한다. 피곤에 지친 존이 수렁에서 나오는 길은 반복되는 살인 행위의 수행밖에 없다. 적어도 리그 바깥으로 해방되기 전까지는 그 길이 유일한 답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은 ‘나’의 벽을 쌓는 것뿐이다.

여기서 하마터면 킬러의 숙명적 고독, 서부 남자의 멜랑콜리를 운운하는 짓을, 나 또한 반복하려 했다. 킬러는 고독한 존재로 태어난 적이 없다. 장 피에르 멜빌의 킬러가 풍기는 멜랑콜리의 냄새는 그의 것이 아니다. 킬러의 고독은 작가와 관객이 연대한 결과이기에, 킬러는 영화가 환원시키는 고독의 자리로 매번 되돌아갈 따름이다. 영화라는 허구의 세상은 인물에게 때론 더 가혹하다. <존 윅>의 결말부에서 거리를 거니는 군중이 일거에 멈춰서는 장면은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한 <매트릭스>(1999)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인물은 자신이 허구로 빚은 세상의 중심에 서 있음을 자각한다. 현실이 아니지만 인물에겐 자명한 현실. 시나리오 작법에서 인물을 고통에 빠트리는 건 관객을 끌어들이는 방법 중 하나다. 작가는 첨단의 기계장치와 시스템이 남자의 육체를 시시각각 압박하도록 설계하고, 작가와 짝을 이룬 관객은 함정 속 깊이 빠진 남자를 향해 손을 뻗지 않는다. 존은 키튼과 페킨파가 예언한 가련함 그대로의 인물이다. 자신의 숙명, 고독한 존재에 대해 스스로 되돌아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을 때, 고독은 그가 수락하고 감당해야 할 몫이다. 절름거리며 도피하는 그의 걸음에서 새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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