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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효정의 영화비평] 현실 반영의 일본 괴수영화로서 <신 고질라>가 놓친 지점

“주인공은 정치계에 있는 젊은이로 할 것, 어린이는 일체 고려하지 않는다.” <신 고질라>(2016)의 총감독 안노 히데아키는 처음부터 컨셉을 분명히 했다. 영화 대부분은 재난에 대처하는 관가의 움직임을 보여줄 뿐 생생한 시민의 일상에는 도통 무심하다. 정치가 전면에 등장한 대신 거대괴수SF 특유의 과학주의는 힘을 잃었다. 가족도, 로맨스도 구원자도 없다. <신 고질라>는 실제 현실의 일본에 괴수가 나타난다는 설정을 리얼하게 시뮬레이션해 동시대 도쿄를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주인공은 대를 이어 정치를 하는 젊은 야심가이자 내각 관방부(副)장관인 야구치 란도(하세가와 히로키)다.

12년 만에 제작된 29번째 시리즈물 <신 고질라>는 오리지널 작품인 혼다 이시로의 <고질라>(1954)의 고유성을 상기시키며 시리즈의 전면적 쇄신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총감독·각본·편집은 안노 히데아키가, 공동감독·시각효과는 히구치 신지가 맡았다. 이 작품은 최근 개최된 제40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한 7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2016 <키네마준보> 베스트영화에서 2위를 했다.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 실사영화로서 흥행과 비평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일본 바깥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포스트 3·11의 감성을 구축하며 2016년 일본영화의 쌍끌이 흥행을 일으켰던 <너의 이름은.>과 달리 해외에서는 <신 고질라>를 내수용 괴수물로 평가하는 인식이 지배적인 듯하다. 강력한 무기를 동원한 자위대가 총출동한다는 점은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동아시아 관객에게 심리적 저항감을 안겨주었다.

작품은 웃음기 없는 냉소주의로 일관된다. 주인공의 건조한 열정의 진의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란 어렵다(성공 지향의 야심가인가, 수줍은 휴머니스트인가). 무엇보다 실제 자위대의 대대적 협조를 받아 전차와 전투기 등 장대한 스케일의 액션 신을 선보인 의도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리기 곤혹스럽다.

반복되는 전후, 재난과 올림픽

그렇다면 지금 왜 다시 ‘고질라’일까. 오리지널 <고질라>는 원폭이 투하돼 전쟁이 종결된 지 10년 후인 1954년 제작되었다. 태평양 해저에서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에 의해 ‘깨어난’ 괴수가 도쿄에 상륙한다는 설정의 원작에서 고질라는 과학기술로 인한 인간의 폭력에 대한 신의 분노를 상징했다. 고질라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적 힘, 어원 그대로의 몬스터(‘나타나다, 경고하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monstrum을 어원으로 한다)인 셈이었다.

<고질라>가 공개된 지 10년 후인 1964년 일본은 도쿄올림픽을 통해 경제 재건의 확실한 계기를 마련했다. 60여년 후 지금의 일본은 2020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있다. 관련해서 근래에 만들어진 소노 시온의 아날로그적 특촬영화 <러브 앤 피스>(2015)는 <신 고질라>와 사뭇 대조적인 괴수영화로 눈길을 끈다. 신도쿄올림픽을 앞둔 일본, 한 소심한 직장인이 기르던 거북이가 거대한 괴수 피카돈으로 변해 올림픽이 개최될 장소인 일본 스타디움을 파괴한다. 방송에서는 신도쿄올림픽에 대한 낭만적 기대가 쏟아지지만, 그 이면에서는 폐기되고 소모되는 사소한 것들의 작은 반란이 거대한 사건을 일으킨다. 전후 도호영화사의 흥행물의 상상력은 강력한 파괴의 원천인 괴수를 만들어냈다. 괴수는 핵무기에 의해 일깨워진 괴물이라는 측면에서 반전의 아이콘인 한편,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을 상기시키기에 패전과 굴욕의 아이콘이었다. 파괴되었기에 생산해야 한다. 전후 일본의 슬로건은 전쟁극복, 국민총화, 경제부흥에 집중됐다. 그런데 전후 슬로건은 상업영화에서 전도된다. 생산을 위해 파괴한다. 반전의 주제를 전유한 상업영화의 도착적 욕망 속에서 반전은 전쟁의 욕망으로 번역된다. <신 고질라>의 경우 이러한 내재적 충동이 오리지널보다 한층 강력하다. 오리지널은 그래도 원자력(을 동원한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는 과학자가 한손과 눈을 잃은 것으로 등장하며, 서사의 끝에서 자신이 개발한 위험한 기술과 고질라와 함께 자멸한다. 하지만 <신 고질라>는 도쿄를 정말로 처절하게 파괴해버리며, 적대의 대상인 고질라보다 더 강력하고 잔혹한 이미지로 미국을 형상화한다. <신 고질라>에서 내각총리 보좌관(다케노우치 유타카)이 재난 후 전세계의 원조와 동정을 통한 국가부흥을 위해 미국의 열핵무기 사용을 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욕망이 분명히 드러난다.

스타일과 형식만 남다

<신 고질라>는 현세를 다큐멘터리 혹은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반영하는 작품이다. 9·11 이후 <클로버필드>를 위시한 미국 재난영화의 질감이 바뀐 것처럼 이 작품도 3·11 이후 일본 현실의 반영인 셈이다. 무능한 정부와 비효율적 관료주의를 비판한 점에서 작품의 공동감독이자 시각효과를 담당한 히구치 신지의 재난 신파영화 <일본침몰>(2006)도 일부 떠오른다. 한국으로 치자면 ‘국뽕영화’에 가까울 이 작품에서 소박한 시민들의 헌신을 지워내고 관료주의를 부각시킨다면 <신 고질라>에 보다 가까워 보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통시적으로 보자면 <신 고질라>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감독은 전후파 오카모토 기하치이다.

일찍이 안노 히데아키는 <건버스터>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작품 곳곳에서 오카모토 감독에게 노골적으로 오마주를 바친 바 있다.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오카모토는 비관습적이고 과감한 폭력 신에서 빼어난 솜씨를 발휘한 테크니션이자 콘티 단계서부터 숏의 초 단위까지 기록해둘 정도의 치밀한 스타일리스트기도 했다. <격동의 쇼와사 오키나와 결전>(1971)은 안노 스스로도 평생 가장 많이, 100회 이상 본 영화라 술회하기도 했다. 컷 분할의 템포, 표준에서 벗어난 과감한 프레임, 리액션의 형태 등에서 특히 큰 인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신 고질라>에서 안노는 편집을 스스로 함으로써 오카모토의 형식을 실험해보았다(오카모토는 영화 속 자살한 괴짜 과학자의 사진으로 등장한다).

회사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심각한 전쟁영화 <일본패망하루전>(2015)은 안도가 참조했을 법한 영화다. 우익영화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상 <일본패망하루전>은 황군의 신들린 정신주의를 차갑게 응시하는 정치영화에 가깝다. 전쟁의 현장이 아니라 정치 군인과 일왕의 정책결정 과정을 치밀한 편집으로 구성해낸 작품의 기계적 형식은 <신 고질라>가 재난 현장이 아니라 정치 현장에 집중한 점과 꽤 유사하다. 그런 점에서 <신 고질라>는 <일본패망하루전>에서 패전을 재난으로 번안한 작품이다. 괴물(패전,파괴, 재난)의 기원이 ‘미국’에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내재적 공모관계에 놓여 있다. 두 작품에는 허무하게 죽어간 300만명의 군인(그리고 더 많은 동원된 식민지인들), 희생당한 무고한 시민들의 실체적인 존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황군 혹은 자위대의 등장이 곧 우익적 가치관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쟁과 재난의 책임을 자성하지 않고 스타일과 형식에 골몰했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피해의식적 자기합리화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냉전질서가 작동하는 한 반복 가능했던(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억압된 것들의 귀환’) <고질라>시리즈가 CG의 육체를 입고 21세기에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을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적대와 원한이 재구조화되고 있는 증후로 독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 고질라>에서 경제번영의 상징인 도쿄의 시가지가 불바다가 되는 장면과 20세기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인 도쿄역이 처참하게 파괴되는 장면은 시대의 종언을 선언하는 듯 장대한 쾌감을 준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파괴이며 어떤 신질서인가. 괴수물의 상상세계를 현재의 일본이라는 리얼로 가져올 때엔 감당해야 할 치열한 고민들이 있다. <신 고질라>는 여전히 많은 점들이 모호한 피해의식의 영화다. 그 세계관을 확인하기 위해서 2020 도쿄올림픽 이전에 개봉될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최종편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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