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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김예솔비 이론비평 - 창문과 풍경의 어긋남이 말해주는 것
김예솔비 2022-07-16

<퍼스트 카우> <스파이의 아내> <바쿠라우>를 중심으로

<퍼스트 카우>

닫힌 영화 앞에서

<당신얼굴 앞에서>가 닫힌 영화처럼 느껴진다면, 영화가 후반부 30분간 술집을 거의 빠져나가지 않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처음과 끝이 거의 정확한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아침에서 시작해, 아침으로 끝난다. 영화는 동생의 아파트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상옥의 이틀간에 놓여 있다. 두 아침을 보여주는 방식은 거의 다르지 않다. 두 아침 모두 카메라는 소파에 앉아 있는 상옥과 아파트 창문, 잠든 동생의 얼굴을 보고 있는 상옥을 차례로 보여준다. 이때 보이는 것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막혀 있으며, 특수한 밀실을 만든다. 너무 높아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창문, 건물에 가로막혀 아파트 단지 내부만을 비추는 풍경, 무슨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는 동생의 잠든 얼굴, 응답 없는 얼굴. 그 위로 “천국은 이미 당신 얼굴 앞에 있어요”라는 상옥의 말이 맴돈다. 영화는 얼굴과 세계 사이의 알 수 없는 공간만을 열어둔 채로, 미묘한 방식으로 닫힌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두 아침 사이에 영원히 갇혀 있을 것만 같다.

유독 ‘닫혔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들이 있다. 영화가 닫힌다.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영화들이 주었던 생경함을 기억한다. <로프> <이창> <파장> <잔느 딜망>과 <반다의 방> <샤이닝>에 이어서, 21세기에 와서도 여전히 <설국열차> <헤이트풀 8> <대학살의 신> <겟아웃> <라이트 하우스>와 같은 밀실의 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또 꾸준히 어떤 유난스러움을 안겨주는 것은 왜일까? ‘닫힘’이라는 개념이 영화에 생소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극장 내부가 이미 밀실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극장은 닫혀 있고, 영화는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영화가 끝났다고 말하지, 영화가 닫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영화를 여정, 모험과 동일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크린 앞에서 우리는 매번 새롭게 멀리 나아가는 여정을 기대하지만 영화가 응하지 않을 때, 희미한 배신감과 호기심이 동시에 작동한다.

최근 도착한 세 영화 <퍼스트 카우> <스파이의 아내> 그리고 <바쿠라우>는 ‘영화가 닫혔다’는 수사를 동원하고 싶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처럼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됨을 특징으로 갖지는 않지만, <당신얼굴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세 영화들은 매우 미묘한 방식으로 밀실을 구사하고 있다. 세 영화에 나타나는 또 다른 공통점은 영화가 특정한 시대를 다루고 있으며, 그 시대와 불화하는 개인/공동체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모종의 이유로 바깥으로 향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진다. 거친 서부의 개척지에서 마초가 아닌 남자와 동양인은 꿈의 개척지로 향하지 못하고(<퍼스트 카우>), 제국주의의 이면을 폭로하고자 했던 사토코는 미국으로 건너가지 못한다(<스파이의 아내>). 혹은,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 공동체가 통째로 고립되기도 한다(<바쿠라우>). 이들은 왜 빠져나갈 수 없는가? 무엇이 이들을 가로막고 있는가?

이렇게 닫힌 영화 속에서 우리는 창문을 유심히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창문은 외부의 세계와 이어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일부로서의 풍경이 창문에 있고, 우리는 풍경 너머에 있는 세계의 전체를 짐작한다. 그러나 눈여겨볼 점은, 세 영화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창문과 풍경의 관계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창문 바깥에는 풍경이 보이지 않거나, 보이더라도 외부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로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창문은 풍경과 무관해지며 불일치하기도 한다. 이를 창문과 풍경의 변증법이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창문과 풍경의 어긋남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영화의 미묘한 닫힘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유난스러움을 무릅쓰고서, 영화 속 창문 앞에 오래 머물러보자. 세 영화들이 주는 미묘한 매혹을 설명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스파이의 아내>

창문이 침묵하고, 풍경이 느려질 때: 안티-서부극의 경우

<퍼스트 카우>는 19세기 초 서부 개척지를 배경으로 킹 루와 쿠키(본명은 피고위츠)라는 이름을 가진 두 남자 사이의 우정을 다룬다. 킹 루는 중국인이며, 쿠키는 개척지의 거친 야성과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성격을 타고났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시대와 불화하는 조짐을 보인다. 켈리 레이카트는 전작들에서도 집요하고 꾸준하게 주변부적인 인물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녀가 ‘우정’에 초점을 맞춘 것 또한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드 조이>에서는 지나간 우정의 자리를 더듬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고, <웬디와 루시>에서는 반려견과 인간 사이의 단단한 유대를 지켜볼 수 있었다. <어떤 여자들>에서 영화는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비틀거리기도 했었다. 한편 <퍼스트 카우>는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 자체가 미묘하고 암시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우정의 기제보다 우정과 세계가 충돌하는 양상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장 자본주의의 물물교환 체제가 막 태동하던 시대에, 우정이라는 환원 불가능한 가치가 끼어들 때, 영화는 그 최초이자 기원적인 충돌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영화가 우정의 교환을 보여주는 방식은 바로 창문과 문의 풍경 속에서다. 몇년 만에 재회한 킹 루가 자신의 집에 쿠키를 초대하는 장면에서, 킹 루는 장작에 쓸 나무를 해오겠다며 밖으로 나가고, 어색하게 남겨진 쿠키는 가만히 서 있는 대신 집안일을 찾아나선다. 이때 카메라는 절묘하게도 도끼질을 하는 킹 루의 모습을 창문의 프레임 속에, 빗질을 하는 쿠키를 문간의 프레임 안에 그려넣는다. 서로 말을 맞추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 카메라는 오랫동안 이러한 균형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 장면에 멈춰선다. 프레임 안에 그림처럼 들어맞는 두 사람의 구도처럼, 두 사람의 가사 분담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킹 루는 밖에서 거친 일을 도맡고 쿠키는 실내에서 빵을 굽는다. 쿠키가 처음 구운 빵을 아무 말 없이 창가에 올려놓고, 그 빵을 킹 루가 집어들 때, 창문은 두말할 것 없이 우정의 교환을 위한 창구가 된다.

한편 두 사람이 나누는 우정은 시장에서 교환 가치가 없는 것이기에 창문이 보여주는 것 또한 무용한 것이 된다. <퍼스트 카우>의 창문은 기존 서부영화에서 정체성과 같이 다뤄졌던 장대하고 장엄한 풍경이나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보여주지 않는다. <퍼스트 카우>의 창문에는 영웅의 귀환도, 모뉴먼트 밸리도 없다. <퍼스트 카우>가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는 것은 서부의 웅장함이다. <퍼스트 카우>의 풍경에는 19세기 미국 서부의 땅이라는 배경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들이 주어지지 않는다. 창문이 보여주는 것은 두 남자가 나누는 우정처럼 물질적 가치로 환산될 수 없는, 그러므로 ‘개척’이라는 거시적인 역사에서 배제된 사소하고 미시적인 정동이다. 얼핏 보아서는 시선을 사로잡지 않는, 사사롭고 무용하고 주변부적인 존재들이다.

<퍼스트 카우>가 개척지의 구석진 자리에서 우정과 더불어 길어올린 것은 바로 ‘느림’이라는 시간이다. 이 또한 속도와 스펙터클로 점철된 서부영화의 대척점에 있는 표현 양식이다. <퍼스트 카우>의 카메라는 하나의 장면이 끝난 뒤에도, 그 자리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다. <퍼스트 카우>의 창문은 이러한 느림의 양식을 시각화해서 보여준다. 장면 하나를 보자. 팩터 대장의 집에서 도망치다가 머리를 다친 쿠키는 한 원주민의 집에서 깨어난다. 정신이 든 쿠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본 것은 창가에서 주술 같은 동작을 하고 있는 나이 든 원주민의 모습이다. 창문 속에서 노인은 기체조를 하듯 천천히, 반복해서 손을 뻗는다. 무언가를 밀어내는 동작 같기도 하다. 이 장면은 영화의 서사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집의 주인들은 쿠키와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어떤 상호작용을 하지도 않는다. 사실상 이야기의 관점에서 무용해 보이는 이 장면은, 그러나 <퍼스트 카우>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느리고 신비스러운 시간의 힘을 조용히 펼쳐내 보인다. <퍼스트 카우>가 발굴하고 있는 것은 정복과 개척의 시간, 점령과 영역 다툼의 시간의 반대편에 있던, ‘티타임’(디저트의 시간)처럼 무용하고 정적인 시간이다. 이 장면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창문 밖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유유히, 느리게, 알 수 없게 흘러가는 삶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퍼스트 카우>의 창문에는 역사나 시대의 지배적인 알레고리로 환원되지 않는 느림이 있다.

이처럼 영화가 서부극의 관습과 단절된 소박한 정경들을 보여주고 있기에 킹 루의 대사들은 유난히 이질적으로 들린다. 위험을 애써 무릅쓰지 않는 쿠키와는 다르게, 킹 루는 아메리칸드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야망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난폭한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적어도 킹 루는 훨씬 동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킹 루는 쫓고 쫓기는 서부극의 규칙으로 움직인다. 이를테면 킹 루가 쿠키와 처음 만난 것도 같이 다니던 무리 중 한 사람을 죽인 뒤 도망치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옷을 벗거나 강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등 쫓기는 삶에 능숙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킹 루가 쿠키에게 “여기는 아직 역사가 도착하지 않았어. 우리 식대로 역사를 맞을 수 있어”라고 하거나, 빵을 팔아 수입이 생긴 뒤에도 “우리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라고 말할 때, 킹 루의 말 속에서 반복되는 ‘아직’이라는 시간관은 다소 묘하게 들린다. 킹 루는 시간으로부터 쫓기는 사람 같다. 그는 마치 곧 들이닥칠 문명의 풍파에 의해 최초와 처음의 효력이 사라지는 시점을 뻔히 내다볼 수 있다는 듯이 말한다. 다시 말해서, 킹 루의 문장들은 미래에서 과거를 재구성할 때 쓰는 말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퍼스트 카우>의 오프닝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영화는 킹 루와 쿠키가 살고 있는 19세기 서부가 아닌, 육중한 화물선이 강을 가로지르는 현대의 시간으로부터 출발한다. 강가를 산책하던 한 여자가 땅에서 유골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 땅을 파기 시작한다. 곧이어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으로, 비현실적으로 잘 보존된 두개의 유골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오프닝은 영화가 시작할 때 출현한 격언의 내용(“새에게는 새집, 거미에게는 거미집, 인간에게는 우정”) 때문에 ‘우정’의 기원에 대한 탐구처럼 보인다. 두개의 유골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킹 루와 쿠키가 나누는 우정의 이미지에 덧씌워지고, 영화의 끝에 다다라 두 사람이 나란히 눕는 장면에 이르면 해골의 기원에 대한 상상의 퍼즐이 맞춰지는 듯하다. 이 오프닝을 받아들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퍼스트 카우>가 한 여자의 상상 속에서 두 남자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고, 나란히 누워 있는 두 유골은 킹 루와 쿠키의 모습이라는 식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해 속에서 오프닝은 마치 영화의 진입을 위한 도구로서만 유효한 사족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퍼스트 카우>의 오프닝이 알려주는 것은 지나간 시대를 다루는 영화를 바라보는 하나의 태도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이미 종결된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와의 조우’라는 현재적 경험에 대한 영화라는 것이다. 지배적인 역사 담론에서 누락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마주하기 위해서 우리는 종종 익숙한 역사의 길이 아닌, 유난스러운 발굴과 발견의 통로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퍼스트 카우>의 오프닝은, 킹 루와 쿠키의 이야기가 전적으로 ‘지금’이라는 관점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우화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킹 루와 쿠키가 살던 시대는 영화를 통해 지금과 유리된 과거가 아닌, 지금의 우리가 끊임없이 되새기고 참작해야 할 최초이자 기원으로서 투사되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킹 루의 말처럼 “아직 시작되지 않은 역사”로 되돌아가며, 과잉된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퍼스트 카우>의 액자식 구성은 과거가 아닌, 과거와 공존하는 현재라는 뒤섞인 시간의 풍경을 보여주는 창문이 되는 것이다.

풍경을 ‘보지 못하는’ 창문

<퍼스트 카우>의 마지막 장면, 남쪽으로 가는 배의 선착장 근처에서 두 사람은 눕는다. 두 사람은 아마도 배를 타지 못했을 것이고, 남쪽으로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스파이의 아내>에서 사토코의 여정이 불발되는 장소 또한 선착장이다. 출발과 도착이 빈번하게 오가고, 그야말로 여정에의 상상으로 가장 충만한 장소에서 영화가 멈춤으로써 역설적으로 영화는 더욱 단단하게 닫혔다는 느낌을 준다. 단지 인물들이 나아가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영화 자체가 멈춘 것 같은 생경함을 자아낸다. 두 영화의 멈춤에 차이가 있다면 <스파이의 아내>쪽이 좀더 당혹스럽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사토코는 밀항을 위해 배를 타고 미리 숨겨둔 화물 상자에 몸을 숨긴다. 함선의 출발을 알리는 고동 소리가 울리고 ‘스파이’다운 모험이 시작될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순간 배에 경찰들이 들이닥쳐 사토코가 숨어 있는 화물 상자를 열어젖힌다. <퍼스트 카우>가 잠든 두 사람의 모습 한가운데에서 끝나면서 희미하게나마 상상의 공백을 남겨두었다면, <스파이의 아내>는 여정을 기대한 관객의 기대와 믿음을 보란 듯이 무너뜨리며 영화의 전개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닫힘은 미궁이 된다. 누가 사토코를 밀고한 것일까? 경찰이 미리 잠복해 있던 것일까? 우리의 예측과 기대가 어긋났을 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의심하게 되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스파이의 아내>에서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믿음과 의심, 비밀과 폭로 사이의 긴장이 어떤 사건의 ‘목격’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1940년대 일본의 제국주의 시대에, 관동군이 자행한 생체 실험을 목격한 사람이 영화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사토코의 남편 유사쿠는 사업차 만주에 갔다가 끔찍한 현장을 목격하고 중요한 증거자료를 입수한다. 유사쿠는 스스로를 코스모폴리탄이라 칭하며 제국주의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려 한다. 하지만 세계 시민으로서의 양심보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토코는 유사쿠와 갈등한다. 유사쿠는 사토코에게 말한다.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영화 또한 유사쿠가 만주에서 본 것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만주에서의 일은 유사쿠가 만주에서 촬영해온 필름을 통해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사토코는 유사쿠가 숨겨놓은 이 필름을 몰래 빼와서 보는데, 영상을 보는 그녀의 뒷모습만 보일 뿐 그녀의 반응은 알 수 없다. 영상을 본 뒤 사토코는 새롭게 결심한 듯 남편과 함께 증거를 들고 미국으로 가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녀가 영상을 보고 어떠한 사명감을 느끼게 된 것인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사토코는 여전히 유사쿠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사토코의 목격은 사토코를 변화시킨 것일까? 혹은 유사쿠의 말처럼 여전히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일까?

영화는 이를 모호한 상태로 남겨둔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스파이의 아내>는 보는 것이 믿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는, ‘불확정적인 상태’에 대한 영화다. 상반되는 두 마음 사이의 불확정적인 상태에 대한 영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보는 것이 믿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 헐거운 연결에 대한 영화다. 이러한 상태는 자신이 본 것의 의미를 알고, 이를 확실히 믿는 유사쿠의 선형적인 신념과 대비된다. 유사쿠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스파이를 다루는 장르영화나 첩보물을 떠올릴 때 기대하는 서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상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에 제국주의 국가의 내부에서 ‘매국노’의 운명을 쉬이 선택할 수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드러내는 것은 사토코의 이야기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스파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스파이가 될 수 없음, 즉 스파이의 ‘불가능성’에 빠뜨리는 시대적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토코가 일본을, 전쟁이라는 역사를, 시대를 빠져나갈 수 없는 이유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표현대로 “은밀한 내부자”(<씨네21> 1300호)로 남는 사토코의 실패는 시대의 한계와 비극성을 보여준다.

외부로 나갈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창문’이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창문은 의도적으로 가려져 있다. 사토코와 유사쿠의 집에는 큰 창문이 여러 개 있지만, 창문은 바깥의 풍경을 보여주는 대신 하얗게 빛난다. 두 사람이 기차를 타고 갈 때도 창문 바깥은 과도한 빛으로 가려져 있다. 물론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고는 하지만, 가로막혀 있는 창문은 <스파이의 아내>에서 묘한 효과로 이어진다. 영화 찍기가 취미인 유사쿠는 자신이 촬영한 영화의 상영을 위해 창문을 몇번이고 가린다. 실내를 어둡게 만들기 위해 창문을 가리고 문을 닫는 행위를 영화는 거의 생략하지 않고 보여준다. 그러므로 창문은 마치 ‘가려지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가리고 감추는 인물들의 몸짓 자체다. 흥미롭게도 이 동작 자체는 매우 스파이답게 보인다. 외부를 가리고 내부를 어둡게 만드는 것은 위장의 가장 주된 수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창문을 가리는 일련의 행위들은 영화를 본다는 것과 스파이의 행동 양식을 겹쳐지게 한다. 전쟁의 시대에, 진실을 ‘본다’는 것이 어떻게 비유될 수 있는지. 어떤 의미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지, 시대와 불화하는 개인의 ‘봄’에 대해서 영화는 은밀하고 과감한 질문을 던진다.

창문이 풍경을 보여주지 않을 때, 풍경이 나타나는 것은 ‘영화 속 영화’에서이기도 하다. 유사쿠가 촬영하는 필름, 즉 ‘영화 속 영화’는 사실상 <스파이의 아내>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비밀과 위장의 역학을 충실하게 응축하고 있다. 사토코는 유사쿠가 만든 영화에서도 몰래 잠입하는 스파이의 역할을 맡은 것처럼 보인다. 유사쿠는 가면을 쓴 사토코가 금고를 몰래 여는 장면을 촬영한다. 이는 이후 유사쿠가 숨겨놓은 기밀자료를 가져가기 위해 금고를 여는 (현실의) 사토코의 동작과 묘하게 겹쳐진다. 영화상에서 사토코가 어떻게 유사쿠의 금고 번호를 알고 있는지, 그 내막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사토코는 어떻게 번호를 알았을까? 이는 유사쿠와 사토코가 함께 영화를 촬영하는 장면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면 흥미롭다. 유사쿠는 사토코에게 묻늗다. “금고 번호는?” 사토코는 대답한다. “이미 외웠어요.” 추후에 사토코가 유사쿠의 금고를 쉽게 열어버릴 때, 이 대화는 일종의 예고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영화 속 영화’는 유사쿠와 사토코가 당면한 상황과 연결되고 섞이면서 현실 속으로 점점 침투해온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바로 이 ‘영화 속 영화’가 현실의 운명을 완전히 압도해버리는 순간이다. 유사쿠가 촬영한 ‘영화 속 영화’는 총 2개의 필름이다. 하나는 앞서 유사쿠가 취미로 촬영한 것으로 사토코와 함께 만든 극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만주에서 입수한 관동군의 만행을 촬영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필름은 동일한 풍경의 이미지로 시작된다. 풍경의 이미지는 영화의 역사에서 하나의 시퀀스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설정 숏’으로 쓰여왔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러한 영화의 오래된 관습을 이용해 절묘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밀항에 실패한 사토코는 경찰에게 잡혀 심문을 당하는데, 그녀의 소지품에서 필름이 나온다. 사토코는 그 필름이 관동군의 만행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경찰들에게 똑똑히 보라고 말한다. 필름이 재생되기 시작하고 처음 등장하는 것은 풍경 숏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이어지는 장면은 놀랍게도 사토코가 등장하는 극영화다. 제국주의의 이면을 폭로하는 진실의 이미지 대신 극영화의 배경음악인 통속적인 사랑의 멜로디가 속절없이 울려퍼진다. 유사쿠가 사토코와의 약속을 어기고, 필름을 바꿔놓은 것이다.

이때 풍경 이미지는 서로 다른 운명이 교차되는 장소가 된다. 풍경 이미지 다음에는 만주에서 촬영된 영상이 이어질 수도 있고, 사토코가 출연하는 극영화의 장면이 이어질 수도 있다. 상반되는 두 가지 운명으로 향할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불확정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풍경 이미지인 것이다. 결국에는 풍경 이미지 다음 만주의 영상이 아닌 극영화가 이어지면서 일본 경찰은 진실을 ‘보는 데에’ 실패하게 되고, 사토코는 유사쿠를 향한 ‘믿음’을 유실하게 된다. 물론 이 장면은 유사쿠가 사토코의 필름을 바꿔치기하여, 사토코가 검거되는 것을 막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상황 자체는 사토코가 폭로하려 했던 관동군의 비밀이 마치 그녀의 망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녀의 믿음을 보장해주는 장면은 스크린에 등장하지 않는다. 풍경은 보기와 믿기의 잠정적인 실패를 표상한다.

사토코의 운명 또한 실패한 풍경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 사토코는 코스모폴리탄으로서의 정의를 실현하지도, 바람직한 제국주의 시민으로서의 평안한 삶을 살지도 못한다. 사토코의 실성은 끝내 불확정적인 상태로 남은 것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결국 사토코는 정신병원에서 패전을 맞이한다. 사토코가 지내고 있는 정신병원의 창문은 바깥을 볼 수 없도록 엑스(x)자가 그려져 있으며, 병원 안에서는 검열된 신문만 읽을 수 있다. 외부의 진실은 여전히 가려져 있다. 어느 날 밤, 공습 경보가 울리고 병원은 순식간에 혼비백산이 된다. 폐허가 된 바깥을 향해 걸어나가는 사토코의 뒷모습은, 마치 스크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곳에는 더이상 진실의 희구가 무용해진, 더할 나위 없이 참혹하고 참담한 패전의 풍경이 있다. 영화는 이렇게 사토코가 완전한 실패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으로 풍경 하나를 덧붙인다. 해변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사토코 너머로 바다의 수평선이 보인다. 바다는 사토코가 미처 나가지 못한 외부이지만, 유사쿠가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의 장소이기도 하다. 세계가 망해버린 와중에도 인류는 언제나 멀리 내다볼 곳이 있다. 지금까지 영화가 집요하게 창문을 가려왔던 것은 바로 이 풍경과 마주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바쿠라우>

창문을 되찾기 위한 풍경의 여정

<퍼스트 카우>와 <스파이의 아내>는 모두 ‘나갈 수 없음’을 전제로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가르는 창문을 의미심장하게 보이게 만든다. 창문과 풍경의 어긋남은 시대의 재현에서 누락된, 감춰져 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것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 한편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동시대 혹은 근미래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어떨까? 앞선 두 영화가 지나간 시대를 상상했다면, <바쿠라우>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에서 감춰진 존재들을 위한 자리를 모색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바쿠라우’는 브라질의 한 외곽에 위치한 마을이자, 동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의 탄압과 차별을 투영하기 위해 영화가 상상해낸 장소이기도 하다. 알 수 없는 외부인의 위협으로부터 마을을 지켜내는 것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다. 의문의 세력은 마을의 급수차에 구멍을 내고, 심지어 마을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거나, 마을을 떠나려는 주민들을 가차없이 죽이기까지 한다. 주민들은 고립되고, 바쿠라우는 말 그대로 밀실과도 같은 공간이 된다.

고립된 상황에서 사실상 창문은 의미가 없어진다. <바쿠라우>에는 창문이 없다. 창문의 상실이 있다. 바쿠라우의 창문은 언제든지 총격이 쏟아질 수 있는 틈이자, 저격수들이 마을을 순찰하는 도구일 뿐이다. 집의 외벽에 뚫린 창문은 외부를 조망하는 통로이기보다는, 외부의 침입이 도사리고 있는 통로이다. 언제 어디서 총알이 빗발칠지 모른다. 마을 주민들은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창문마저 속인다. 자신의 존재감이 창문을 통해 드러나지 않도록, 더 철저히 숨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마을 주민들이 외부와 연결되거나 마을 바깥의 세계를 지각하는 것은 물리적인 창문이 아닌, 미디어(media)를 통해서다. 마을의 주민들은 스마트폰과 영상,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마을에 외부인이 침입해오면 이 사실은 주민들의 메신저를 통해 재빠르게 공유된다. 마을의 광장에는 커다란 전광판(스크린)이 있고, 마을의 주요한 행사는 바로 이 전광판에 비치는 사진과 영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영화 속 영화’가 창문을 대체했다면, <바쿠라우>에서는 뉴미디어가 창문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와 뉴미디어라는 두 매체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는 영화가 필름과 영사기라는 물질적인 조건을 필요로 하는 반면, 뉴미디어는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산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바쿠라우의 주민들의 생존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물론 주민들이 미디어를 일상처럼 활용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년 뒤’라는 근미래라는 시간적 배경에 걸맞은 설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바쿠라우의 바깥을 보자. 마을을 고립시키고, 마을을 몰살하려고 하는 저격수 집단은 영화에서 백인우월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원주민과 자신, 더 나아가서는 백인이 아닌 자와 백인 사이의 구획을 나누며 타자들을 노골적으로 혐오한다. ‘경계 짓기’는 바로 이들의 공격 논리이자 방식이다. 이 정체 모를 백인 집단은 서구적인 것, 미국적인 것과 대비되는 야만적인 것의 경계 속으로 바쿠라우 주민들을 몰아넣으며 이들을 몰살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뉴미디어의 산발적인 존재 방식, 언제 어디서든 접속되거나 차단됨으로써 경계를 흐리는 속성은 저격수 집단에 저항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경계지을 수 없음, 무차별적으로 산재함은 이들을 타자화하여 통제하려는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위협이 된다. 마찬가지로 <바쿠라우>에 장면과 장면 사이를 잇는 ‘디졸브’가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 또한 경계를 흐트러뜨리고자 하는 주민들의 전략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한편 영화에는 디졸브와 더불어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풍경 인서트들이 매우 빈번하게 삽입된다는 점이다. <퍼스트 카우>가 의도적으로 서부의 장대한 풍경을 생략했다면, <바쿠라우>는 이와 반대로 브라질 아마존의 광대한 자연의 풍경을 강조하며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풍경의 틈입은 그러나 영화상에서 어떠한 서사적 정보를 나타내지 않는다. 이는 단지 데드 타임(dead-time)으로서의 이미지인 것일까? 이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을 제안하고 싶다.

하나의 해석은 풍경 이미지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다. 자연의 운동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풍경의 이미지가 마을 공동체의 서사에 분주히 끼어듦으로써, 바쿠라우의 이야기는 고립된 마을의 내부에 한정되지 않고 외연을 넓힌다. 외지인들이 바쿠라우의 흔적을 없애려는 것과 반대로 풍경의 이미지는 바쿠라우를 어떠한 지질학적 준거 위로 끌어당기는 효과로 기능한다. 땅과 나무, 산맥과 강, 마을 주변을 애워싸고 있는 덤불들, 구체적인 자연의 풍광들이 바쿠라우라는 마을의 현존을 감각적으로 제시한다. 비록 이 마을은 영화가 축조한 가상의 도시이지만, 실제로 어딘가에 실존하는 풍경의 이미지들은 바쿠라우를 동시대 현실의 차원으로 데려온다는 것이다. 이 가상 도시의 이야기가 실은 브라질 사회의 단면에 대한 거칠고 또 정교한 환유라는 것을, 풍경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관점은 풍경을 장면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풍경 장면의 삽입은 서스펜스의 전개를 지연시킨다. 장면 하나를 보자. 마을 바깥에서 주민들이 연이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파코치는 현상수배를 당하고 마을의 외곽에 숨어 있던 룽가라는 인물을 만나러 간다. 룽가는 친구들의 시체를 본 뒤 다시 마을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갑자기 풍경이 이어진다. 빨갛게 지는 노을과, 파랗게 그을린 새벽의 풍경. 그리고 이 풍경은 디졸브를 통해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보고 있던 영상으로 이어진다. 영상은 파코치가 총을 들고 도심을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저격하고 있는 활약상을 모은 지라시 비디오다. 다시 한번 질문해보자. 왜 두 장면의 사이에 풍경이 필요했던 것일까? 겉보기에 풍경은 시간과 공간의 비약을 채워주는 휴지부인 것처럼 보인다. 낮에서 밤으로, 마을의 외곽에서 마을의 중심으로, 장면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위해서 풍경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풍경은 왜 주민들의 거친 반격을 보여주는 액션과 액션 사이에 틈입하며 서사의 속도를 늦추고 있는 것일까? 마을의 이름이자 영화의 제목인 ‘바쿠라우’의 뜻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바쿠라우는 한국어로는 쏙독새라고 알려진 새다. 이 새는 낮에는 보호색으로 몸을 감췄다가 밤에 사냥을 다니는 야행성 동물이다. 밤의 사냥을 위해서는 숨죽이고 정체를 숨기는 낮의 시간이 필수적이다. 풍경의 역할 또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이는 외부인이 마을에 찾아올 때마다 마을 전체가 텅 빈 것처럼 몸을 숨기고 매복하는 주민들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풍경은 무의미한 휴지부가 아닌, 다음 액션을 준비하기 위한 은닉과 위장의 시간이 된다.

<바쿠라우>는 동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액션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오히려 액션 없음-정지와 침묵의 순간을 통해서다. <바쿠라우>는 그 인상과는 별개로, 폭주하는 폭력과 쾌락의 정동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그것만이 <바쿠라우>의 전부가 아니다. 브라질 사회가 외면하는 어두운 단면을 폭로하고자 하는 혁명의 에너지는 폭력 자체에서 오지 않는다. 은닉과 전복을 통해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마을이 반격해올 때, 풍경처럼 무해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반격해올 때 주민들의 폭력은 그 진가를 더욱 강력하게 발휘한다. 영화의 끝에 가면 주민들을 괴롭혔던 저격수들의 정체가 밝혀진다. 바쿠라우를 골칫거리로 여겼던 인근 마을의 시장 토니가 저격수들에게 마을의 몰살을 사주한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토니를 쉽게 죽이지 않고, 독특한 징벌의 방식을 택한다. 벌거벗은 토니의 몸을 나귀에 묶어 덤불이 있는 산속으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토니는 온몸으로 풍경의 반격을 느끼며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바쿠라우가 창문을 되찾는다는 것은, 마을의 안위를 위협하는 불순한 외부인들의 제거를 의미할 테다. 더이상 숨을 필요도, 무장할 필요도 없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주거지를 회복하는 것. 창문을 갖는다는 것은, 마을이 더이상 외부와 단절되고 고립되지 않으며 단단한 마을의 울타리를 갖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민들은 숨을 참고 몸을 숨기며, 스스로 풍경이 되어야 한다. <바쿠라우>는 창문(집)을 회복하기 위한 풍경의 여정을 보여준다.

닫힌 영화 너머, 어긋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곳

창문과 풍경이 어긋난다는 것은 영화가 현실을 특수한 통로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대의 지배적인 담론으로부터 배제된 주변부적인 이야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영화가 무의식중에 택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세 영화가 닫힘의 감각을 자아낸다면, 이는 영화 안에 있는 사소한 어긋남을 유난스럽게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어떤 어긋남은 밀실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닫힘은 관객으로 하여금 사소하고 미묘한 지점들을 재확인하는 섬세한 바라봄을 가능케 한다. 영화가 현실과 한 발짝 어긋날 때, 우리의 기대를 배반할 때, 오히려 우리가 현실의 어떠한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지배적인 규칙을 재생산해왔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가 돌파해야만 하는 현실의 차별적 조건들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수 있게 만든다. 영화는 약간의 반격, 약간의 어긋남, 약간의 배반만으로 혁명을 꿈꿀 수 있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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