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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본즈 앤 올’,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곳
김성찬 2022-12-21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서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신형철은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를 두고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가 살인마로 각성한다는 요지의 이야기는 영화 안팎에서 모두가 인정한 것처럼 성장담이며, ‘성장은 살인이다’라는 은유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디아가 타인에게 영향 받는 일을 타인이 지닌 걸 먹어 치운다고 표현한다. 유사한 맥락으로 <본즈 앤 올>을 본다면, 신형철의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사랑은 식인이다’라고. ‘성장은 살인이다’라는 은유 안에서 먹어 치운다는 표현이 비유라면 <본즈 앤 올>의 매런(테일러 러셀)과 리(티모시 샬라메)는 정말 사람을 먹어 치운다. 작품의 원작 소설도 성장담으로 볼 여지는 있다. 특히 소설에서 매런이 리를 먹어버리는 사건은 자립의 마침표를 찍는 일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영화는 성장이 아니라 사랑에 방점이 찍힌 게 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노을이 질 것 같은 푸른 초원에서 매런이 먹어버린 리는 다시 나타나 매런과 서로 껴안은 채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영화는 이 합일의 순간을 위해 달려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이상하다. 그들의 만남과 동행과 합일은 너무 손쉽고 매끄럽지 않은가. 정체를 숨기고 지내느라 매런과 리는 힘든 생활을 하지 않느냐고? 매런에게 집착하는 설리(마크 라일런스)가 시종 매런과 리에게 심각한 위해를 가하려 하지 않았냐고? 아니,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영화 초반 매런의 식인 행각이 문제가 돼 자주 거처를 옮겼던 것으로 보이는 매런과 그의 아빠는 매런이 또 사고를 일으키자 급히 도망친다. 더이상 견딜 수 없던 아빠는 매런에게 출생증명서와 함께 자기 심정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남겨두고 떠난다. 테이프 속 아빠의 목소리는 외화면에서 작동하는 내레이션으로서 영화 초반부 충격적 사건의 연유를 설명해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이때 플레이어로 테이프의 내용을 청취하는 매런의 모습은 자연스럽지 않다. 일반적이라면 궁금해서라도 앉은자리에서 모든 내용을 듣지 않을까. 그런데 영화는 아빠의 음성, 즉 설명을 한번에 다 제시하지 않는다. 최초에 아빠가 매런을 떠나는 결심을 전한 뒤 중단된 음성은 매런의 여정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그때까지 지나온 장면과 매런의 처지에 조응한다. 어찌 보면 이건 이상한 일이다. 매런이 아빠의 음성을 반복해 들을 수는 있겠지만 상황에 따라 이에 어울리는 내용을 딱 맞춰 재생했다는 건 인위적인 면이 있다. 물론 이 연출은 이야기의 흐름에 발맞춰 적당한 시기에 알맞은 정보를 전달하는, 흔히 활용하는 영화 문법이다. 또 이와 같은 배치가 부자연스러워 문제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작위적인 배정임에도 리듬감 있게 등퇴장을 하면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설명할 때 밀려드는 지루함을 방지해 영화만이 줄 수 있는 감흥의 효율을 달성한다. 시간차를 둔 카세트테이프 청취는 이 영화가 품은, 이음매 없이 깔끔히 봉합된 어떤 형질을 나타내는 지표라 할 법하다.

이런 매끄러움은 매런과 리의 동행에도 적용 가능하다. 이들 앞에 시련이 주어졌다고 말하기에는 이들의 활동은 제한이 없다. 매런과 리가 가는 길에 상당한 폭력과 살인이 존재했음에도 경찰을 포함한 공권력의 추적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이들과 설리의 식인 행위도 쉽게 벌어진다. 그저 으슥한 데 들어가 물어뜯고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과 몸을 휴지로 닦아내거나 물로 씻는다. 누군가에게 발각될 염려를 비치는 것에 비해 조심성은 한없이 부족하다. 달리 말하면 <본즈 앤 올>의 세계에서 식인은 끔찍한 일이 분명한데도 쉽게 수용이 가능한 습성이 된다. 작품은 식인 행위가 수반할 고충을 사소화하고, 매런과 리가 서로를 동지라 여기고 특별하다고 느끼게끔 하는 표식으로 기능하도록 해 이들의 만남과 동행을 수월한 일로 만든다.

설리의 존재도 사정이 비슷하다. 그는 죽은 사람의 살만 탐한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매런에게 수상한 집착을 보이며 끝내 매런과 리가 정착한 안전한 장소까지 찾아와 매런을 협박하고 살해하려 든다. 설리는 으레 그렇듯 주인공 앞에 놓인 해결해야 할 문제이거나 극복해야 할 위기 같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양식에 비추면 설리는 매런과 리의 사랑을 완성하는 구실로 삼았다는 게 더 타당하다. ‘사랑은 식인’이라는 은유가 성립하려면 매런이든 리든 둘 중 하나가 상대를, 아니면 둘 다 서로를 먹어야 한다. 따라서 서로를 해하지 않는 이들이 사랑을 완성할 수 있도록, 바꿔 말해 이들이 서로를 먹을 수 있게끔 유도해야 하고 그 방법이 바로 설리라는 인물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 역할을 할 존재는 매런과 리가 유일하게 공포를 느꼈던 대상을 떠올려보면 식인자밖에 없다. 그런데 미주리주의 숲속 캠핑장에서 만난 식인자는 쉽게 따돌렸고, 매런의 엄마는 정신병원에 구속돼 있는 데다 자기 손까지 먹어버린 상태다. 그렇다면 피해망상에 따른 이상행동을 벌이는 설리만이 매런과 리를 죽음에 가까운 지경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설리의 존재와 그의 매런을 향한 집착은 고난이나 위기를 가장했을 뿐 매런과 리의 사랑을 매끄럽게 완성할 수 있도록 예비한 새들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처럼 평이한 길을 걸어온 매런과 리이지만 이들의 모습이 드러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 이 영화가 주는 울림이다. 매런은 리를 뒤에서 껴안은 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옅게 산란한 분홍빛 하늘 아래 푸른 언덕에 앉은 이들의 모습은, 앞서 리는 죽어가고 그런 그를 먹던 매런을 떠올리면 꿈도 현실도 아닌 모호한 성질을 품은 채 작품과 분리돼 있으면서도 앞선 장면들에서 구축한 논리와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모순된 상태로 연결돼 있다. 이 장면이 난데없다면 장소가 지닌 위상 탓이 크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와 올리버(아미 해머)가 서 있는 시대와 장소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아 비현실적이거나 가공한 시공간 같았던 것과 유사하게, 빌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이 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원작 소설과 달리 <본즈 앤 올>도 카세트테이프를 듣던, 특정하기 애매한 시절로 설정돼 있다.

다른 점은 이번에는 장소를 굉장히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은 다수의 장으로 확연히 구분돼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많은 장소에서 다양한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만큼 국면 전환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또 이때마다 화면에는 버지니아주부터 마지막 네브래스카주까지의 지명이 뜨며 계속해서 장소를 주목하도록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 장면의 장소는 암묵적으로 그들이 도착해야 할 곳이라는 점을 지시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공간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영화 시작과 함께 제시하는, 학생들의 그림 몇점은 분홍의 노을과 녹음의 언덕을 다양하게 담는다. 영화는 결국 여기를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매런과 리를 이곳으로 데려다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들이 과연 이 장소에 다다랐는지는 의문이다. 이 장면에 앞서서 우리는 이미 리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따지자면 네브래스카주에서 보낸 행복한 한때를 다시 보여주면서 이들의 사랑을 강변하려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체가 사라진 회상에서 느끼는 정조는 사랑의 완성에 따른 안도가 아니라 슬픔이다. 매런과 리가 일반식을 안 하는 건 아니므로 식인 습성은 생존을 위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식인을 반복하는 건 먹지만 포만감은 느끼지 못하는 역설이 발생해서다. 정서적 허기를 식인 행위로 지연시키려는 안간힘. 사랑이 그렇지 않은가. 사랑할 때마다 인생의 허무는 잠시 뒤로 밀려난다. 매런과 리는 식인을 관두고 정상 생활을 원한다. 바꿔 말하면 서로의 지속하는 사랑을 바란다. 그러나 매런이 리를 먹어버리면서 사랑은 완성한 동시에 끝이 났다. 그러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제 그만 허기와 공허에서 벗어나려 했던 매런과 리의 염원에 반하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가슴이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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