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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피기', 우리에게 복수극은 무엇이었나

우리에게 복수극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유구한 역사를 건너 복수극은 끊임없이 만들어져 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여전히 유효한 환상임을 시사하듯 복수극 안에는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이 담긴다. 복수극의 세계에서 피해와 가해는 선명히 구분되며, 가해자는 피해자에 의해 잘못에 합당한 벌을 뒤늦게 받는 것으로 끝맺는다. 권선징악의 단순한 클리셰가 반복되는 이유는 복수가 지닌 마력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복수가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일단락되더라도 복수가 끝나는 법은 없다. 복수의 칼날이 대상을 정확히 관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복수는 늘 불충분하거나 차고 넘친다. 이는 복수의 특징이기 전에 복수극의 특징이다. 복수가 손쉽게 완료될 수 있다면 서사는 진전될 수 없다. 복수극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복수를 지연시키고 상처를 대물림하면서 복수가 끝나지 않도록 만든다. 복수극의 생존 본능은 개인이 품은 복수의 욕망을 초과한다.

복수극은 복수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늘 어느 정도는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은 햄릿이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하기 위한 무수한 고뇌를 마주하게 하는 동시에 그 고뇌를 비웃듯 진행되고 마는 복수를 보여준다. 햄릿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삼촌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데, 복수의 칼끝은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 햄릿은 친구의 아버지이자 연인의 아버지를 오인 살해하면서 복수의 실행자에서 거꾸로 복수의 대상이 된다. 돌이킬 수 없는 복수의 칼은 많은 이를 죽이고 칼의 주인마저 찌른 뒤에야 멈춘다. <햄릿>은 이후에도 무수히 반복될 복수의 고유한 성질을 보여준다. 복수는 대상을 정확히 관통하기를 거부하고 이야기 안에서 영생하기를 원한다. 복수극 안에서 복수의 실행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는 복수와 함께 죽어야 한다. 우리는 종종 복수극에서 쾌감에 관해 묻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개입된 서사 안에서 쾌감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통쾌한 복수를 위해서는 복수극이 다른 장르로 이행하거나 타 장르와 뒤섞여야 한다. 이를테면 <킬 빌>은 감독의 스타일이 하나의 장르가 된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이자, 복수극의 틀을 지닌 액션영화다. 영화가 주는 쾌감은 복수가 아니라 액션 시퀀스 자체에서 온다. 영화는 몇개의 챕터로 분절되는데, 그것은 몇개의 단계를 의미한다. 챕터를 건너갈 때마다 주인공이 싸워야 할 대상의 능력치나 액션의 강도가 점점 높아진다. 복수의 과정은 게임의 레벨을 하나씩 클리어하는 과정의 흥분으로 치환된다. 여기에서 복수는 영화의 액션을 더 실감나게 즐기기 위한 작은 단초에 불과하다.

변신과 대리, 그리고 기획

<킬 빌>은 코마 상태에 빠졌던 환자가 액션 전사로 깨어나는 변신극이다. 이처럼 주인공이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이야기가 복수극 안에 내포된 경우가 종종 있다. 변신하는 존재의 기원에는 죽음에서 깨어난 존재인 귀신이 자리한다. 한맺힌 귀신들과 함께 복수극은 공포물에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해 왔다. 죽음을 부정할 수 없는 귀신 대신, 살아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뱀파이어나 초능력자(히어로)를 세워 주인공에게 비상한 능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1978)는 초능력을 지닌 10대 왕따 소녀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캐리(시시 스페이섹)는 시선과 사고로 사물을 조종하는 초능력을 숨기고 있다. 친구들은 캐리를 공개적으로 망신시키기 위해 그를 교내 파티로 유인해 최고의 커플로 무대 위에 세운다. 캐리가 행복해하는 절정의 순간에 미리 무대 천장에 설치된 양동이를 떨어뜨려 그 안에 있던 돼지 피가 캐리의 머리 위로 떨어지도록 맞춘다. 수모를 당한 캐리는 분노의 화신으로 변신해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을 태운다. 죽음의 행렬에서 캐리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캐리는 어머니와 함께 무너진 집에 깔려 죽는다.

토마스 알프레드손의 <렛 미 인>(2008)은 뱀파이어 소녀와 친구가 된 왕따 소년의 이야기다. 무리의 집단적 괴롭힘에 노출된 오스칼(카레 헤더브란트)이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영화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폐쇄적인 복수의 흐름을 끊기 위해 변신의 모티프를 주인공 가까이에 있는 다른 인물에게 부여한다.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는 오스칼이 위기에 빠진 순간 나타나 그를 괴롭히던 무리를 응징하고 소년을 구한다. 이엘리는 자신보다 강한 무리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칼의 환상이 만들어낸 존재처럼도 보인다. 영화는 복수의 잔혹함에 관한 질문을 타자와의 관계 맺기의 이야기로 대체한다.

피해자가 다른 무엇이 되거나 다른 존재와 우정을 맺어야 하는 이유는 그같은 환상을 통과하지 않고는 복수의 실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가능한 방법은 범죄나 살인 정도다. 최근에는 폭로를 이용한 명예 살인이 중요한 복수의 방식으로 등장했다. 폭로는 거기에 덧붙은 수많은 동조자에 의해 완수되는 복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복수극도 다른 방식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복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선회하며, 복수자에게는 기획자의 자세가 요구된다. 에머랄드 페넬 감독의 <프라미싱 영 우먼>(2021)은 피해자에 대한 감정이입이나 피해 사실에 관한 묘사 없이도 복수극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영화는 피해자가 죽은 이후의 시점에서 시작되며 피해자와 피해 사실은 플래시백으로도 등장하거나 묘사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친구 카산드라(캐리 멀리건)의 기이하기까지 한 복수 과정이다. 카산드라는 특정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속여 판 안으로 진입한 뒤, 판을 뒤집어버리는 방식으로 복수를 단행한다. 만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던 카산드라는 클럽에서 만난 남성의 손에 이끌려 그의 집까지 간 뒤, 그가 강간을 시도하려는 찰나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뭐 하는 거니?”라고 묻는다. 상대 남성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한다. 카산드라는 이처럼 간단한 방식으로 복수의 피해자에서 복수의 기획자로 점프한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복수의 방식에 있어서 응징의 행위보다 응징의 기획이 중요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영화였다. 복수에 있어 기획이 강조되는 양상은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도 포착된다. <더 글로리>는 피해와 가해의 시기를 청소년기로 한정하고, 청소년 배우와 성인 배우를 달리 캐스팅하면서 성장을 일종의 변신으로 그린다. 두명의 문동은(정지소, 송혜교)이 피해와 응징을 각각 나눠 맡으면서 타인의 복수를 대리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생성된다. 여기에는 동은이 복수를 위해서 선택한 직업이 선생이라는 사실도 주요하게 작용한다. 동은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학생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인 선생이 된다. 실제 선생은 가해자 부모의 등쌀에 밀려 피해자를 압박했지만, 동은은 처벌을 단행하는 제대로 된 선생이 되려 한다. 동은은 입학을 거부하는 학생들을 잡아다 놓아야 하기에 품이 많이 든다. 일대일로 찾아가 면담도 하고, 그나마 말이 통하는 학생을 이용해 다른 학생까지 말을 듣도록 물밑 작업도 해야 한다. 여기에 통쾌함의 자리는 없다. 동은이 다시 마주하는 인물들이 과연 그 시간과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인물인가 하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프라미싱 영 우먼>에서 카산드라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모습을 마주할 때도 비슷한 의문을 품게 된다. 카산드라는 강간당할 위험이 있는 상황에 스스로 들어간 뒤 정색하고 자세를 고쳐앉으며 경고자이자 일종의 교육자가 된다. 남성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대상이 통제를 벗어나는 것만으로 쉽게 당황한다.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이 한 일의 효과와 비슷하다. 동은은 가해자와 그 주변 인물 곁에 갑자기 나타난다. 그것만으로 가해자는 겁을 먹고 동은을 제압하려 한다. 가해자의 발목을 잡는 건 과거의 악행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타락이며 ‘망나니 칼춤’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것이다. 드라마는 개과천선이란 불가능하다고 부르짖는다. 성격도, 친구들 사이의 계급적 관계도 복사(Ctrl+c), 붙여넣기(Ctrl+v)하듯 과거와 현재가 동일하다. 몰락을 자초한 것은 그들이기에 동정도, 반성도 필요 없다. 동은이 한 것은 조력자의 도움으로 판을 짜고 거기에 가해자들을 배치한 것뿐이다. 문제는 그 판을 짜는 데 큰 힘이 든다는 것 정도다. 그 과정은 그야말로 험난한 노동이다.

다시 몸을 찾기 위하여

대략 살펴본 복수극의 흐름을 염두에 둘 때, <피기>가 점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사라(라우라 갈란)에게는 초능력도 없고, “돼지”라는 놀림을 벗어나기 위해 날씬하게 변신하는 과정이 묘사되지도 않으며, 자신의 복수를 대리한 사람과 관계를 맺기로 이행하지도 않는다. 복수의 판을 짜는 방식의 머리 쓰는 복수라는 최신의 흐름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영화는 짜인 복수의 방식을 거부하면서도 복수에 관해 생각하게 하며, 마침내 몸을 쓰는 복수로의 강렬한 회귀를 목격하게 한다.

카를로타 페레다 감독은 <피기> 이전에 동명의 단편을 만들었다. 역시 라우라 갈란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며, 장편의 일부를 뚝 잘라놓은 것 같은 특정 시퀀스가 단편 전체를 구성한다. 사라는 실외 수영장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돼지라는 놀림과 함께 옷을 빼앗긴 채 비키니 차림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수모를 당한다. 도로를 걷다가 차를 타고 지나가던 무리에게 성적 유린까지 당한 사라는 정체불명의 흰색 승합차 안에서 자신을 놀린 친구의 피투성이가 된 손과 살려 달라는 아우성을 본다. 단편은 여기에서 끝이다. 짧은 영화는 우리에게 딜레마를 제시한다. 제삼자에 의해 사라의 친구들을 향한 복수가 저절로 이뤄진 셈이니 통쾌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식의 단죄는 윤리적이지 않다고 비판해야 할까. 방금 도움을 요청한 친구는 무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최소한의 망설임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를 외면하는 것은 가혹하므로 어떻게든 친구를 구하면서 우정을 회복하는 서사가 필요하다고 해야 할까.

이에 관해 답하기 전에 생각해보고 싶은 측면은 단편을 장편화한다는 것이다. 감독은 단편을 장편화하면서 같은 배우에게 똑같은 상황을 연기하게 만든다. 배우가 시간 차를 두고 같은 상황을 두번 연기하는 것은 자기 패러디가 된다. 장면을 연기할 때 요구되는 것은 몰입만이 아니라 거리 두기다. 배우는 애쓰지 않아도 상황 내부에 있는 동시에 상황과 거리를 두게 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비슷한 거리 두기의 효과가 생성된다. 단편의 존재를 모르더라도 영화 속 상황 묘사 방식은 지나치게 간단하고 효율적이다. 좁은 화면비 역시 상황에 이입이나 몰입보다는 거리 두기를 요구한다.

영화는 배우에게 똑같은 시퀀스를 연기하게 만드는 한편, 단편에서는 생략해야 했던 상황을 덧붙이면서 피해의 상황을 극적인 방식으로 전환한다. 감독이 이 영화를 장편으로 만들어야 했던 이유를 꼽는다면 배우를 다시 길 위에 세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영화는 피해자가 걸어갔던 길 위에 주인공을 다시 세운다. 이 장면은 영화 메인 포스터의 강렬한 이미지로도 각인되어 있다. 피칠갑한 몸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당당하게 선 주인공의 모습은 전작에서 비키니를 입은 뒷모습이 주가 되었던 것과 대비된다.

그런데 메인 포스터의 강렬한 이미지는 예고편이 아니라 반전에 가깝다. 흡사 엄청난 살인마를 연상시키지만, 이미지에서 예상되는 방식의 살인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라의 몸과 옷에 묻는 피는 그의 몸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생리혈이기도 하다. 피칠갑된 몸이 의미하는 것도 피해와 가해 너머의 어디쯤이다. 사라는 친구들이 납치된 곳으로 몰래 숨어들어 손발이 결박된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데, 사라가 그곳에 간 이유는 이들을 구해 영웅이 되려는 심리도 아니고 친구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려는 가학적 취미도 아니다. 사라는 말하자면 자신이 빠진 자리에서 행해진 복수에 제동을 걸고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그곳에 도착한다.

복수는 나의 것

주인공에 의해 복수를 수행하되, 주인공이 죽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피기>는 복수의 주체에서 탈락한 자가 다시 주체의 자리를 되찾는 서사를 통해 복수하는 자가 복수로 인해 희생되지 않는 방법을 제시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사라 가까이에서, 사라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일어난 살인의 흔적을 암시한다. 사라가 몸을 담근 수영장 수면 아래에는 결박된 채 숨진 남자의 시체가 보이고, 사라가 지나간 길 뒤로는 반쯤 죽은 상태로 기어나온 피투성이 여자의 모습도 보인다. 이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사라의 욕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장치처럼 보인다. <렛 미 인>에서 오스칼이 수영장 물속에 처박힌 채 괴롭힘당할 때, 구원을 알리듯 하강하는 신체의 조각이 오스칼 자신의 환상처럼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렛 미 인>에서 소년은 자기 환상의 현현인 소녀와 친구가 되었다면, <피기>에서 사라는 살인마라는 환상의 존재에게 달려들어 그의 살점을 물어뜯는다. 마치 그것은 환상이 아니며 그에게 환상은 필요치 않음을 선언하기 위한 행위처럼 보인다. 사라에게 죽음은 환상이 아니라 일상이다. 죽음은 살해된 시체만이 아니라 부모가 일하는 정육점에 진열되거나 매달린 고깃덩어리나 내장에도 자리한다. 죽음은 잡히지 않는 환상이 아니라 물컹거리고 축축한 물성을 지닌 상존하는 일상이다. 사라가 추구하는 복수의 행방은 죽음과 살인에서 연상되는 극적인 과장보다 사소하고도 구체적인 지점으로 향한다.

클라우디아(이레네 페레이로)는 사라를 괴롭히는 무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눈빛을 통해 최소한의 갈등을 드러낸 인물이다. 사라와 클라우디아의 팔목에는 같은 디자인의 핑크색 팔찌가 지난 우정의 증표로 남아 있다. 사라와 살인마가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클라우디아의 한쪽 손목을 관통하는 에피소드는 영화가 어디를 향해온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관통한 손목에서는 사라와의 우정의 징표였던 팔찌가 피와 함께 떨어져 나온다. 사라는 손발이 결박된 채 죽을 위기에 놓인 클라우디아가 생존하도록 돕지만 그것이 곧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라의 행위에는 용서나 화해의 제스처 대신 복수든 용서든 내 손으로 실행하리라는 고집이 담겨 있다. 사라의 복수는 무엇보다 완벽한 절교를 위한 수행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살인의 잔혹한 무대는 오직 사라와 클라우디아가 어색하게 이어온 관계를 끝장내기 위한 배경으로 존재한다. <피기>가 복수극의 세계에서 구조한 것은 그 지독한 사소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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