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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맡겨진 소녀>
진영인 사진 백종헌 2023-05-16
클레어 키건 지음 / 허진 옮김 / 다산책방 펴냄

아일랜드의 어느 가난한 집 소녀가 어머니의 출산을 앞두고 여름 동안 먼 친척 킨셀라 부부의 집에 맡겨진다. 친척 집으로 가면서 소녀는 아주머니가 자신에게 팬케이크를 구워줄지, 아니면 밭에서 돌을 고르는 일을 시킬지 궁금하다. 낡은 집인지 새집인지, 화장실은 집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도 궁금하다. 드디어 만나게 된 아주머니는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주고, 욕조에 아낌없이 물을 채워 목욕시켜주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발가락이 길고 멋지다고 해준다. 아저씨는 소녀가 달리기하는 시간을 측정해주고, <빨강머리 앤>의 매튜 아저씨처럼 새 옷을 사준다. 누군가 소녀에게 무례하거나 대답하기 곤란한 말을 하면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소녀를 칭찬하며 보호해준다.

<맡겨진 소녀>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영화 <말없는 소녀>의 원작 소설이다. 카드 게임에서 소를 잃은 아버지와 집안일이며 육아에 시달리는 어머니 아래서 여유 없이 자란 소녀의 처지가 어떤지, 인생 처음으로 여유롭고 다정한 공간으로 가게 된 소녀의 마음이 어떤지 몇 마디 묘사와 대화만으로도 마음속 깊이 사무친다. 100페이지가 안되는 분량이지만 그 몇배의 이야기가 여백에 쓰여 있다. 우물 주변의 고요한 공기, 옷을 사고 나오는 길에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 간식을 실컷 사고도 남은 잔돈이 짤랑거리는 소리. 그렇지만 풍요로운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에도 죽음이 슬그머니 끼어든다. 1981년 단식투쟁을 하던 어느 공화주의자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가 전해지는가 하면, 동네 이웃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밭을 별안간 휘감는 거센 바람처럼 닥친다. 불편한 장례식에 이어지는 노골적 폭로 앞에, 소녀는 새로운 비밀을 품게 된다. 아무것도 숨긴 것이 없다고 믿었던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집에도 사실은 숨긴 일이 있었다는 비밀. 그렇게 훌쩍 자란 소녀는 달리기 속도가 더 빨라지고,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워 원래의 집으로 향한다. “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30쪽

“나는 물을 여섯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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