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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알아야 예방할 수 있다, 온라인 성범죄도 마찬가지”, ‘라방’ 최주연 감독
이우빈 사진 백종헌 2023-07-06

<라방>은 온라인 생방송에서 벌어지는 불법 사이버 성범죄를 다룬다. 평범해 보이는 청년 동주(박선호)가 주인공이다. 동주는 어느 날 자신의 여자 친구 수진(김희정)이 불법 성착취 온라인 생방송의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목격한다. 방송의 진행자는 젠틀맨(박성웅)이라 불리는 미지의 남성. 젠틀맨의 마수에서 수진을 구출하기 위해 동주는 고군분투한다. <라방>의 최주연 감독은 20년 넘게 배우 매니지먼트업에 종사한 영화계 베테랑이다. <날, 보러와요> <공모자들> 등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관객에게 현실 속 문제를 알리고자 첫 장편 연출작으로 이 소재를 선택했다.

- <라방>의 제작 계기는.

= 2018년, 유튜브에서 12분짜리 단편영화 <별풍선>을 우연히 보게 됐다. 온라인 라이브 방송을 이용한 성착취를 다룬 작품이었다. 이 소재를 장편으로 확대해야겠단 생각이 들어 <별풍선>의 감독을 만났지만, 본업에 집중하고 싶다며 장편 연출을 고사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꼭 장편영화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관객에게 불편하고 무겁게 느껴질 법한 소재인 만큼 남에게 선뜻 연출을 제안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직접 연출하기로 결심했다.

- 소재에 대한 자료 조사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 처음엔 상상을 기반으로 각본을 썼다. 그러다가 온라인에 게재된 국내외 관련 사건을 캐기 시작했고 다크 웹에서 벌어지는 온라인 성착취 실태까지 파악하게 됐다. 깊게 조사할수록 현실에 사이버 성범죄 피해자와 불법 촬영 피해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판단해 한때 제작을 중단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고 했던가. n번방을 비롯한 온라인 성범죄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가게 됐다. 나 역시 온라인 성범죄를 재차 공부하게 됐고 다시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 온라인 성범죄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한 지점이 있다면.

= 범죄 상황을 알리고 이것을 현실적으로 재현하기만 한다면 여타 다큐멘터리, 영화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본질적인 문제를 파헤치기로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실제 범죄 사례보다 심리학·종교학·철학적으로 인간의 죄를 다룬 책이나 작품을 많이 찾게 됐다.

- 어떤 작품을 많이 참고했나.

= 단테의 <신곡>을 많이 참고했다. 평범한 인간이 지옥, 연옥, 천국을 거치며 사랑에의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지 않나. <라방>의 주인공 동주도 마찬가지다. 젠틀맨이라는 인도자에 의해 수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깨우치는 인물이다. 서사 구조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죄에 관해 무지했던 동주가 죄의 문제를 경시하지 않고 제대로 배워가는 이야기를 <신곡>의 흐름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 동주는 방관자처럼 온라인 성범죄를 소비하던 인간이다. 이러한 인물을 어떻게 다루려 했나.

= 동주는 범죄자라기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굳이 따지자면 온라인 성범죄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이런 현상이 범죄라고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인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동주와 내가 다를 것 없다는 생각으로 동주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나 역시 <라방> 작업 전에는 온라인 성범죄에 무지한 편이었다. 다만 공부를 통해 관심을 가지고 피해자들에게 공감하면서 나 자신도 많이 달라졌다. 이런 변화의 과정을 동주 캐릭터를 통해 말하고 싶었다.

- 젠틀맨 캐릭터는 완벽한 악인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를 담고 싶었나.

=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이 이른바 ‘흑화’했을 때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마치 조커처럼 말이다. 원래는 선인에 가까웠으나 모종의 사건을 겪으면서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인물로 구현했다. 이렇게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색감으로도 표현하려 했다. 젠틀맨의 의상은 일반적으로 괴물, 부정의 뉘앙스가 있는 초록색과 희망, 긍정의 의미가 담긴 노란색을 섞어 골랐다. 방의 조명도 초록색과 붉은색을 강하게 대조해 젠틀맨의 성질을 가시화했다. 한편 동주에겐 파란색, 수진에겐 붉은색으로 상징적인 색감을 줬다.

- 젠틀맨이 진행하는 온라인 방송 내 댓글의 표현 수위가 강하다.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성희롱, 욕설이 드러난다.

= 그것도 많이 순화한 편이다. 영화 속 댓글들은 실제 뉴스, 온라인 성범죄 관련 영상물에 나오는 댓글을 그대로 가져왔다. 초고에서는 지금 영화 속 표현보다 전체적으로 수위가 과격했다. 다만 일부 관객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겠다는 고민 끝에 수위를 조절했다. 나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각본 작업을 하며 어려웠던 점이기도 하다. 범죄적인 표현을 계속 조사하고 마주하다 보니 피해자들에게 더 크게 몰입하게 됐고 감정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 그럼에도 실제 댓글의 수위가 줄 수 있는 불편함을 영화에 끌어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 어떤 문제든 알아야 예방할 수 있다. 온라인 성범죄도 마찬가지라고 느낀다. 실제 온라인 성범죄의 사례는 <라방> 속 사건보다 절대 덜하지 않다. 예를 들면 해외엔 여자 친구를 영하 40도인 방에 가두고 몇 시간 버티는지를 라이브로 송출한 사례도 있다. 결국 피해자는 사망했다. 정보통신 환경이 발달하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라이브 방송 플랫폼, 이용자도 많이 늘었다. 자연스레 이런 온라인 성범죄도 늘기 마련이다. 언제든 나, 내 가족, 주변인이 겪을 수 있는 범죄가 됐다. 그러니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기기 전에 우리 사회, 특히 <라방>의 관객이 용기를 내길 바란다. <라방>이 다룬 문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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