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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몸으로 저항하고 규모로 버티는 스펙터클의 고향,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송경원 2023-08-02

“어떻게든 되더라.” 새로 팀에 합류한 그레이스(헤일리 앳웰)가 상식을 벗어난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묻자 벤지(사이먼 페그)는 농담처럼 답한다. 실은 그 농담 같은 진심이야말로 불가능한 작전을 수행해온 팀의 비결이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CG가 점령한 스크린에 저항해온 방식이다. 에단(톰 크루즈)은 달리는 기차에 침입하기 위한 작전을 짠다. 나름 정교한 작전을 짠다고 하지만 늘 그렇듯 계획은 틀어지고 결국 바이크를 탄 채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할 상황에 직면한다. 너무 위험해서 제일 먼저 찍었다고 하는 절벽의 활강 장면은 아찔하면서도 이상하다. 에단의 멋들어진 질주와 스피드 플라잉을 생생한 각도로 찍은 장면은 최근 CG가 잃어버린 중력의 존재감과 진짜 같은 생동감을 전한다.

문제는 이어지는 장면이다. 에단의 낙하와 활강을 멋지게 찍은 카메라는 정작 중요한 기차로의 돌진 과정을 건너뛴다. 그레이스가 위기에 빠진 절체절명의 순간, 에단은 마치 달리는 옆 차량에서 뛰어든 것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창문을 깨고 등장한다. 우리가 에단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걸 보지 못했다면 낙하산을 타고 활강해서 들어왔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갑자기 무게감이 사라져버린 이 장면은 매우 요란하지만 퍽 안전하다.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이어붙이는 열쇠는 결국 농담이다. 기차 안으로 내동댕이쳐진 에단이 우연히 적을 깔아뭉갠 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이 순간 코미디는 관객을 위한 서비스라기보다는 덜컹거리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최후의 카드이자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이하 <데드 레코닝>)의 모순과 한계에 대한 솔직한 고백처럼 다가온다.

톰 크루즈의 필연, 에단 헌트의 우연

영화 초반 미국정보국 수장 덴링어(케리 엘위스)는 에단 헌트의 존재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다.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미션을 전달한 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는 게’ 정보국이 할 일이냐는 덴링어의 질문은 상식적이다. 수단과 방법조차 보고받지 못한 채 유령 같은 요원의 결과만 기다리는 건 IMF가 에단 헌트를 활용하는 메커니즘이다. 동시에 이건 <데드 레코닝>의 연출 방식이자 아날로그 액션을 배치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토록 홍보에 열을 올린 톰 크루즈의 스턴트 액션은 절벽의 낙하와 활강에서 끝난다. 이후 낙하산에서 기차로의 도약 과정이 생략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그 활강의 끝을 목격하지 못한 셈이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절벽에서 뛰어내린 에단과 기차로 돌입에 성공한 에단은 거의 다른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다. 수십 차례 연습으로 해당 장면의 스턴트에 만전을 기했다는 톰 크루즈와 영화 속 만능 첩보원 에단 헌트가 분리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데드 레코닝>의 멤버들은 늘 진심을 농담에 실어 고백해왔다. 루터(빙 레임스)는 에단에게 “한번도 계획대로 된 적이 없다”며 제발 계획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한다. 기본적으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계획에서 벗어난 상황을 에단의 기지와 능력으로 기어이 수행해내는 과정을 담아왔다. 시리즈 초반만 해도 고난도의 미션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과정을 보여주며 말도 안되는 상황을 기어이 수행하는 에단의 능력을 감상하는 것이 쾌감의 주요한 작동원리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과정의 일부를 생략한 채 순전히 운으로 무마되는 상황을 반복 중이다. 외부에서 보면 에단은 어디에도 존재하지만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최고의 요원이다. 하지만 정작 내부에서 진행 과정을 들여다보면 적당히 짠 계획의 허술함을 애크러배틱 액션(이라고 쓰고 몸으로 때운다고 읽는 무모함)으로 무마하다가 결국 운에 맡겨버린 후 씩 웃으며 내뱉는다. “어떻게든 되더라고.” 에단 헌트가 여태 살아 있는 건 능력이라기보다 우연의 결과다. 그의 존재 자체가 혼돈이론의 산 증거라 해도 좋겠다.

에단 헌트의 행보는 엉망진창 편의적인 상황 투성이다. 하지만 그게 <데드 레코닝>에서 걸림돌이 된 적은 거의 없다. 사실 관객은 이 영화가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크게 따지지 않는다. 애초에 이 세계의 인과관계는 시작값과 결과값만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단 헌트, 아니 톰 크루즈는 하기로 한 이상 ‘어떻게든’ 성공한다. 계획의 실패는 있어도 미션의 실패는 없다. 과정을 즐기도록 디자인된 할리우드식 해피엔딩. 하지만 톰 크루즈가 이른바 아날로그 액션에 집착하면서 상황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시작은 두바이 빌딩에 오른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부터였던 것 같다. CG를 최대한 배제하고 실제 촬영을 통해 포착된 생생하고 육감적인 장면들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시그니처가 됐다. 어느덧 아날로그로 포착(혹은 포장)된 그 장면들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본질이자 주체로 자리 잡았다. 절벽 낙하는 에단 헌트에겐 작전 실패 끝에 나온 끔찍한 우연의 총합이다. 하지만 톰 크루즈에게 절벽 낙하와 스피드 플라잉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필연이다. 에단 헌트와 오퍼레이터 밴지의 헛발질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그 한 장면을 세팅하기 위한 일종의 상황극이자 변명인 셈이다.

‘진짜’ 액션이라는 거대한 환상을 활용하는 방식

<데드 레코닝>은 아날로그이기에 담길 수 있는 무게와 속도를 카메라에 포착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짠다. 절벽 위에 세트를 짓고 실제 기차를 제작한 뒤 벼랑에서 떨어뜨려 부수는 게 기본값이고, 그걸 최대한 잘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구성한 게 아닌지에 대한 의심. 목적과 수단의 역전. 때문에 기차에 돌입하는 과정을 생략할 순 있어도 절벽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포기할 순 없다. 완성된 장면에서 카메라는 뛰어내리는 데 성공한 톰 크루즈를 자랑스럽게 전시한 뒤 갑자기 기차에 난입하는 에단 헌트로 점프한다. 중간 과정이 왜 생략되었는지 상상 가능한 시나리오 중 제일 의심되는 건 그 과정을 아날로그로 재현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낙하 장면까지는 헬기와 드론, 카메라를 동원해 보여주는 게 가능했지만 실제 스피드 플라잉을 마친 에단 헌트가 달리는 기차로 정확히 돌입하는 순간을 아날로그 촬영으로 담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CG로 그려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할리우드를 점령한 디지털과 CG의 그림자로부터 필사적으로 달아나고자 발버둥 쳐왔다. 여기서 냉정히 응시해보자. 우리가 목격한 건 소위 말하는 ‘진짜’를 담은 액션인가. 필름과 아날로그는 진짜이고 CG와 디지털은 가짜인가. 그럴 리 없다. 애초에 여기 진짜는 없다. 그저 환상을 포장할 방식에 대한 선택이 있을 뿐이다.

<데드 레코닝>은 CG의 가벼운 이미지를 걷어내고 아날로그의 질량, 질감으로부터 비롯된 향수를 자극한다. 향수란 본질적으로 돌아가고 싶으나 돌아갈 수 없는 상태다. 영화의 육체성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필름카메라의 방식으로 되새기는 톰 크루즈의 모험은 그 도전이 거대하고 웅장할수록 역설적으로 캐릭터 에단 헌트를 허상처럼 분리시킨다. 그렇게 에단 헌트가 유령이 되어 스크린 위에 실체를 얻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톰 크루즈라는 불멸의 흔적을 목격한다. 여기 거대한 환상이 있다. 다만 환상의 실체가 아날로그의 미덕인지, 자본의 규모인지가 헷갈린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톰 크루즈의 육체에 투영된 아날로그 영화의 그림자일까. 아니면 거대한 규모와 자본의 스펙터클일까. <데드 레코닝>이 제공하는 아날로그의 그림자가 소중한 건 그게 절대적인 가치를 지녀서가 아니라 지금 시대에 귀하고 희귀한 무언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하면 지나친 폄하일까. 사라져가는 걸 복원(혹은 유지)하는데는 돈이 든다. <데드 레코닝>은 의도가 무엇이었건 저렴한 CG로 점철된 지금 시대를 거슬러, 제대로 된 아날로그를 추구하려면 이 정도의 자본과 규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증명한 셈이다.

에단 헌트는 우연에 우연이 겹쳐 내몰린 상황에서 자살하듯 점프한다. 정반대로 톰 크루즈는 노르웨이 절벽의 낙하 장면을 위해 세트를 짓고 수십 차례 연습하며 만전을 기한다. 하나로 겹친 존재가 갈라질 때, 에단 헌트와 톰 크루즈가 이중인화되었다는 사실이 스크린 위에 투명하게 드러날 때, 21세기 최고의 엔터테이닝이 아날로그의 끝자락에서 기어올라 쟁취한 거대한 환상의 실체가 슬쩍 얼굴을 내민다. 공교롭게도 이 간극은 AI와 맞대결을 벌이는 에단 헌트의 모습과도 닮았다. 모든 곳에 있지만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무섭도록 닮은 두 유령은 현실과 가상, 에테르와 디지털 세계에서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 본다. 어쩌면 에단 헌트가 모든 걸 운에 맡긴 채 그토록 무모하게 목숨을 내던지는 건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통제하는 AI(가 그린 미래의 이미지)의 대척점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극장 산업의 황혼에 톰 크루즈가 자신의 육체를 무기 삼아 끝까지 저항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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