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Report > 마스터스 토크
[Masters’ Talk] ‘풍경의 리듬, 여백의 호흡’ 사카모토 준지 x 봉준호, <오키쿠와 세계> 대담 현장을 가다 ①
남선우 사진 최성열 2024-03-08

종이 팔던 남자가 똥 푸는 남자와 동행하다 무사의 딸을 만난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서른 번째 영화 <오키쿠와 세계>는 이 삼각형 안에서 무르익는 청춘을 어여삐 품는다. 19세기 에도시대라는 무대 위 분뇨업자인 캐릭터들 덕에 암모니아 내음이 몇번이고 스크린을 뚫는 듯하지만, 결 고운 세 사람의 기운은 ‘처리’되길 거부하는 변의 행로에서 어떤 영화적 필연을 감지하게 한다. 우리의 흔적이 돌고 도는 땅에 기대를 품게 한다. 거기에 함박눈으로 응답하는 엔딩의 여운이 가시기 전, 20년 우정을 키워온 두 감독이 관객 앞에 마주 앉았다. <오키쿠와 세계> 한국 개봉을 맞아 서울을 찾은 사카모토 준지 감독과 봉준호 감독의 대담이 지난 2월25일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렸다. 사카모토 감독은 만원 객석을 향해 꾸벅 인사하며 어느새 큰 인물이 된 후배 감독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봉준호 감독은 ‘준지 형님’의 직업적 비밀을 캐고 싶다며 유쾌하게 대화를 주도했다. 상영 후 한 시간가량 이어진 두 거장의 문답에 더해 이날 깜짝 등장한 <오키쿠와 세계> 프로듀서 겸 미술감독 하라다 미쓰오의 목소리까지 옮긴다. 이 기록은 <씨네21>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고 들을 수 있다.

봉준호 아름다운 작품과 함께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초적인 궁금증부터 해결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로 진입하고 싶습니다. 공포영화를 보다 사지가 절단되거나 눈알이나 창자가 나오는 장면을 마주하면 끔찍하고 무섭잖아요? 그럴 때 마음의 보호막을 세웁니다. ‘특수효과를 잘했구나! 진짜 같은 분장이구나! 내가 아는 분이 하셨나?’ 하면서요. <오키쿠와 세계>에는 첫 장면부터 ‘응코’(대변)가 나옵니다. 카레였습니까? 어떤 것을 사용했는지 여쭈면서 일단 마음의 방어막을 좀 만들고 싶습니다.

사카모토 준지 제 똥도 좀 섞였습니다. (좌중 웃음) 실제로는 똥을 두 종류로 만들었습니다. 야스케(이케마쓰 소스케)와 츄지(간이치로)가 배에 실은 분뇨, 오키쿠(구로키 하루)의 공동주택 앞에 깔린 분뇨는 골판지를 물에 불리거나 식용유를 섞어서 그럴싸하게 보이게끔 했어요. 또 하나는 배우들이 머리에 뒤집어쓰는 용도였는데, 여차하면 배우의 입이나 눈에 들어갈 수 있기에 해롭지 않은 식재료를 발효시켜 만들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똥을 만든 거죠. 실제로 담가서 발효시켰기 때문에 냄새가 좀 났습니다. 촬영을 거듭할수록 똥의 퀄리티가 높아졌어요. 나중에는 그 소품 담당자를 ‘똥의 마에스트로’라 불렀습니다.

봉준호 어쨌든 우리가 화면에서 본 건 골판지와 식용유, 그리고 식재료였다는 사실에 잠깐 위안을 삼겠습니다. 감독님만의 거대한 미학적 의도가 있었겠지만 혹시 흑백을 택한 이유가 분뇨업자인 주인공들의 직업상 어쩔 수 없이 화면에 변이 시종일관 나와야 했기 때문이었나요? 이전에도 흑백영화를 찍으신 적이 있었던가요?

사카모토 준지 지금 봉준호 감독님이 말씀한 것처럼 많은 분들이 영화에 똥이 나오기 때문에 흑백을 선택한 거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실제로는 그 순서의 반대에 가깝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스탠더드 사이즈(1.33:1)의 흑백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기획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저예산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 <오키쿠와 세계>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독립영화 제작 방식으로 찍었기 때문에 주변의 간섭 없이 처음부터 자유롭게 흑백영화를 찍을 수 있었죠. 준비 과정에서 ‘똥의 마에스트로’가 한 작업을 보면서, 이 영화를 흑백으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키쿠와 세계>

봉준호 화면비가 정사각형에 가까운 1.33:1이죠? 오즈 야스지로 영화를 즐겨본 분들은 익숙하실 수도 있을 텐데, 여러 요소로 인해서 <오키쿠와 세계>만의 독특한 시적 정취와 아름다움이 가능해진 한편 1.33:1의 사이즈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각 챕터가 끝날 때마다 컬러 숏이 한번씩 나오잖아요? 서장(序章)에서 흑백 화면이 쭉 나오다가 고운 분홍색 옷을 입고 세수를 하는 해맑은 오키쿠의 얼굴이 나오고, 두 번째 챕터에서도 영화 전체에서 유일한 컬러 변이 기습적으로 나와서 감독님의 짓궂음을 느꼈습니다. 챕터가 나뉘면서 생성되는 리듬감이 있는데, 마지막 숏만 컬러로 한다는 깜찍한 발상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사카모토 준지 일단 이 영화는 15분짜리 단편영화를 찍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3년 전에 15분짜리 단편(<오키쿠와 세계> 속 제7장 ‘세계의 오키쿠’)을 먼저 찍었죠. 그렇게 파일럿처럼 영화를 만들어서 자금을 모으려고 했는데, 좀처럼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2년 전, 영화계와는 관계없는 쪽에서 자금을 출자해주셔서 90분짜리 영화가 될 수 있었습니다. 즉 <오키쿠와 세계>는 한 에피소드로 완결되는 단편으로부터 시작했기에 그것들을 모아서 이은 단편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단편으로 만들다보니 마지막 장면을 돋보이게 하고 싶어 컬러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에도시대를 무대로 한 순환형 경제를 보여주자는 기획 의도가 있었습니다. 똥을 사고팔고, 그 똥으로 거름을 만들고, 거름 덕에 잘 자란 식재료가 사람의 입에 들어갔다가 다시 배출되는 순환이 하나의 주제였죠. 전편을 흑백으로 찍을 경우 과거에 만든 시대극처럼 보일까봐 중간중간 컬러를 넣은 것도 있습니다. 순환형 사회라는 주제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어떤 메시지나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해요. 비단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이 깨달을 수 있도록 컬러 숏이라는 장치를 썼습니다. 실은 모든 장면을 흑백으로도 편집해봤는데, 과거 선배들이 만든 옛날 영화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원래 의도대로 컬러가 조금 들어간 상태의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낮은 곳에서 바라본 ‘세계’

<오키쿠와 세계>

봉준호 그래서인지 1800년대 에도시대 이야기인데도 인물들이 요즘 젊은이들 같아요. 마음결이 되게 곱고 여린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결국은 사랑 이야기인데요, 그런 현대적인 감수성을 컬러 숏들이 살려준 부분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왜 영화의 시간적 배경을 에도시대로 삼았나요? 아주 융성했던 시대라고 세계사 시간에 배운 기억은 나는데, 막상 영화 속 주인공들은 밑바닥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직업적으로도 그렇고, 영화에 가난한 이들이 화장실을 같이 쓰는 공동주택이 나오기도 하죠. 그럼에도 밑바닥에 있는 젊은이들이 하늘을 보면서 ‘세계’에 대해 얘기하며 영화가 끝나는데, 거기서 오는 묘하고 잔잔한 감동이 있었어요.

사카모토 준지 이 영화는 에도시대 말기를 무대로 하는데요, 그 시기는 쇄국정책이 끝나고 열강에 의해 나라의 문을 열어야만 했던 시대입니다. 다만 서민들은 세계가 변해가는 상황을 잘 인지하지 못한 채 일상을 보내고 있었겠죠. 서양에는 없던, 똥의 구매자가 있는 시절이기도 했고요. 보통 똥을 처리할 때는 돈을 내는 게 지금의 상식이지만, 그때는 오히려 똥을 처리하면서 돈을 벌 수 있었다는 특이성이 있었습니다. 자원이 부족한 일본에서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끝까지 사용한다’라는 문화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현대의 화장실에는 비데가 있기도 하고, 배설물이 자동으로 흘러내려가는 등 냄새나는 더러운 것을 가까이서 느낄 수 없는 환경이잖아요. 그런 차이가 두드러져 보이도록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선택했습니다.

봉준호 ‘응코’ 이야기는 초반 한두 질문 정도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영화 자체의 성격 때문인지 아무리 얘기해도 그 마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웃음) 그만큼 영화가 거리낌 없이, 변을 응시하듯이, 관객에게도 변을 보여주고 있고요. 그게 오히려 주인공들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싶어요. 주인공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손으로 변을 퍼서 담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의 청년들이니까요. 물론 비위가 약한 분들은 그런 장면을 견뎌내야 할 힘이 필요하겠지만요. 한편 오키쿠의 관점에서 보면, 초반에 이미 츄지에게 마음을 고백한 거 아니에요? 공동주택에 츄지와 야스케가 와서 주민들이 반기고, 두 남자가 변을 푸려고 하는데, 오키쿠가 외치잖아요. “제 똥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되게 절묘한 대사 같았어요. 앞서 다른 아저씨가 “여기 사람들이 먹는 게 형편없어서 똥이 이렇다”란 말을 해서,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서 나온 대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때부터 오키쿠에게 츄지에 대한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닌가요? 좋아하는 사람이 나의 변을 보는 게 되게 부끄러운 일이잖아요. 제가 이상한 해석을 한 건가요?

사카모토 준지 오키쿠의 대사나 행동을 보면, 아무리 몰락한 무사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서민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든지, 무사 출신 가문 특유의 부끄러움이 배어나오죠. 이런 부분이 유머러스하게 묘사되거나,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등 엉뚱한 상황으로 표현되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츄지에 대한 마음은 이미 앞 장면에서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서 있을 때부터 풍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쥴 앤 짐>

봉준호 오키쿠가 글을 쓰고, 츄지가 종이를 팔았기에 이미 만난 적 있는 사이인 거죠. 영화에서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비 내리는 변소 앞에서 처음 만나도록 세팅되어 있는데, 프랑수아 트뤼포의 <쥴 앤 짐>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두 남자와 한 여자라는 아름다운 트라이앵글의 원조 격 영화인데, 마찬가지로 흑백이고, 트뤼포 작품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작 중 하나죠. 혹시 <오키쿠와 세계>를 찍을 때 연상했거나 영감을 받은 다른 작품이 있나요?

사카모토 준지 알랭 들롱이 주연한 로베르 엔리코 감독의 영화 <대모험>처럼 과거에 본 남자 둘, 여자 하나가 나오는 영화들이 제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겠지만, 그것을 참고한다거나 염두에 두진 않았어요. 각본을 쓸 때 자연스럽게 이 세명의 관계가 나왔습니다.

봉준호 그 말씀에 참 공감이 가는 게, 오키쿠는 여태껏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캐릭터인 것 같습니다. 특유의 생명력 있는 뉘앙스라든가 여자로서 좋아하는 상대 앞에서 부끄러워하거나 수줍어하는 모습, 또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딸로서 상처받는 소심한 측면도 있죠. 그렇지만 주민들 앞에서 얘기할 때는 똑 부러지는 강단을 보여주잖아요. 그런 복합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구로키 하루 배우의 연기가 훌륭했어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립반윙클의 신부>에서 처음 본 것 같은데….

사카모토 준지 이와이 슌지 감독의 최근작 <키리에의 노래>에도 출연하셨어요.

봉준호 그렇죠. 최근 일본영화계에서 맹활약하는 분이세요. 오키쿠 캐스팅에 고민이 많으셨을 텐데요.

<오키쿠와 세계>

사카모토 준지 지금 이 시점에서 하라다 미쓰오 프로듀서를 소개해도 될까요? (객석을 가리키며) 하라다씨는 30년간 제 작품의 미술감독으로 함께해왔고, 이번 작품에는 미술감독이자 프로듀서로 참여했습니다. <오키쿠와 세계> 제작 초기에 사비를 털어 제작을 하셨죠. 봉준호 감독과도 작업한 인연이 있죠?

봉준호 네. 제가 2007년에 옴니버스영화 <도쿄!> 중 <흔들리는 도쿄>라는 작품을 도쿄에서 찍었어요. 그 작품의 미술도 하라다씨가 하셨습니다. 그 영화 속 히키코모리의 집을 하라다씨가 만든 거예요. 이번에 <오키쿠와 세계> 제작을 하셨다니 깜짝 놀랐죠.

사카모토 준지 하라다씨를 지금 소개드리는 이유는 구로키 하루를 포함해 다른 주연배우인 간이치로, 이케마쓰 소스케의 캐스팅이 하라다씨의 제안이었기 때문입니다.

봉준호 하라다씨, 무대로 올라오세요. 왜 그랬어요? (웃음)

하라다 미쓰오 구로키 하루와는 이전에도 여러 작품을 함께했어요. 이 기획 자체가 장편으로 완성될 수 있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에 출연료도 제대로 지불할 수 없는 형편이었죠. 저는 구로키 하루 배우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지만, 처음엔 출연 제의를 드리기도 죄송스러웠어요. 그래도 제안을 해봤는데, 그런 문제는 전혀 개의치 않으니 이 작품을 꼭 하고 싶다고 했어요. 구로키 하루 배우가 출연을 결정해주면서 이 프로젝트가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봉준호 그렇게 유명 배우들이 합류하면서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됐군요. 마침 하라다 미술감독님이 나오셨으니 여쭤보고 싶은데, 공동주택, 작은 부두, 들길 등 영화 속 공간들이 아름답잖아요. 예산이 녹록지 않은 만큼 기존에 있는 공간을 사용한 것 같은데, 어떻게 구성하신 건지 여쭤보고 싶어요. 한국으로 치면 용인의 한국민속촌 같은 곳에서 촬영하셨을까요?

하라다 미쓰오 저희가 따로 제작한 세트는 포스터에도 나온 화장실과 배, 이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촬영은 주로 교토의 세트장에서 했는데요, 거기에 에도시대 공동주택을 그대로 재현해둔 세트가 있어요. 우리 영화가 재활용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 새로운 재료를 일절 쓰지 않았어요. 이를테면 구로키 하루 배우가 입은 기모노도 100년 전 옷감을 사용해 제작했어요. 그런 식으로 고전적인 기모노를 썼고, 인물들이 사는 공간도 영구적으로 남아 있는 곳에 헌 재료, 새 재료를 더해 만들어나갔습니다. 분무기를 써서 나무의 디테일을 살린다거나 흑백의 필터까지 추가했기에 이 영화만의 세계가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