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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형식, 스타일, 관객 -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 부고를 계기로 돌아본 그의 영화예술, 영화학

20세기 영화 연구사의 중추였던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이 지난 2월29일 세상을 떠났다. 1947년생으로 팔순을 앞두고 있던 그는 작고 3일 전에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 대한 글을 썼을 만큼 영화에의 애정을 멈추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에 김지훈 중앙대학교 교수가 데이비드 보드웰의 2002년 내한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부터 그의 연구 업적 및 의의를 폭넓게 짚어주는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과거의 인물이 쌓은 시간을 발판 삼아 후대의 영화인은 한 계단을 더 올라간다

<미국 영화비평의 혁명가들>

2002년 11월12일 동국대학교 학술문화관은 한국영화학회가 초청한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의 특별 강연을 듣기 위한 청중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현장의 열기는 이 시기가 1990년대 후반부터 시네필 문화의 발달과 조응하여 본격적으로 성장한 국내 영화학이 적어도 규모와 영향력에 있어서 전성기였다는 점, 그리고 보드웰이 배우자 크리스틴 톰슨과 함께 쓴 개론서 <영화예술>이 국내 제도권 안팎에서 영화교육의 입문 교과서로 이미 폭넓게 수용왔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드웰의 이와 같은 영향력은 사실 북미 영화학에서 더욱 크게 절감할 수 있다. 지난 2월29일 그가 76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직후, 북미영화미디어학회(Society for Cinema and Media Studies)는 “영화이론 및 영화사에 대한 보드웰의 기여는 영화를 예술형식이자 스토리텔링 실천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했다”는 메시지를 발표했고, 그가 1973년부터 2004년까지 재직한 위스콘신대학은 “보드웰은 내게 미국의 앙드레 바쟁이자 ‘영화학’ 분야를 커다랗게 확장한 역사가이자 사상가였다”라는 영화감독 데이미언 셔젤의 말을 인용하며 그의 업적을 정리하고 기리는 부고문을 발표했다.

역사적 시학: 영화 형식, 스타일, 관객 디지털 시대 참여적 팬 문화와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에 친숙한 독자에게도 잘 알려진 <컨버전스 컬처>의 저자 헨리 젱킨스와의 2018년 인터뷰에서 보드웰은 자신의 연구가 답하고자 했던 질문을 다음의 세 영역으로 정리한다. 1) 영화 형식(특히 서사)의 역사와 창조적 원천 2) 영화 기법, 즉 스타일의 역사와 창조적 원천 3) 영화에 반응하는 관객의 활동을 지배하는 원칙이 그것이다. 이 세 영역을 통합하는 보드웰의 접근 방식이 역사적 시학(historical poetics)이다. 보드웰의 설명에 따르면 영화의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부터 러시아 형식주의에 이르는 문학비평 및 하인리히 뵐플린과 에른스트 곰브리치 등의 미술사 연구가 추구한 관심사와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으로서의 영화를 구성하고 그 영화의 미적 효과를 낳는 데 관여하는 재료와 기교에 주목한다. 이는 재료와 기교간의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원칙들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데, 원칙은 특정한 경험적 상황에서 출현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역사적 조망 또한 요구한다. 시학과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 규범(또는 규칙, 관습)이 있다. 1988년 출간한 <오즈와 영화의 시학>에서 보드웰은 규범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규범의 개념을 통해서 시학은 역사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지배적인 표준 및 관행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우리는 한편의 영화 또는 일군의 영화의 특별한 작동을 명시할 수 있다.”

<영화 스타일의 역사>

규범이 역사적인 이유는 그것이 특정한 제작 환경 내에서 특정 감독이 선택하거나 따르거나 혹은 초월하기도 하는 서사적 형태와 촬영, 조명 및 편집 스타일의 항목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범의 일부는 새로운 혁신을 받아들여 변경되지만 그 규범의 다른 것들은 초역사적으로 유지되기도 한다. 그래서 보드웰의 광범위한 연구에는 한편으로는 할리우드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이 예시하듯 산업, 기술, 제작 조건의 삼각대로 지지되는 규범적 시스템의 역사에 관한 탐구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규범에 반하거나 자신의 규범을 스타일과 서사로 실현한 예외적인 작가들(오즈 야스지로,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영화의 내레이션>(1985)에서 예술영화 내레이션을 대표하는 감독들 및 장뤼크 고다르와 로베르 브레송, 그리고 <빛으로 추적된 형상>(2005)에서 테오 앙겔로폴로스와 허우샤오시엔)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규범은 제작에 관여하는 제도적 행위자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규범은 비평가와 관객에게는 영화의 서사와 스타일을 해석하기 위한 도식(scheme)으로 작용한다. 이야기와 플롯의 구분에 대한 러시아 형식주의 서사학의 교훈과 관객의 활동에 대한 인지심리학적 접근을 결합하여 보드웰은 관객의 해석 행위를 도식에 근거한 문제 해결(problem-solving) 또는 구성주의적(constructivist) 행위로 규정한다, “해석자는 대부분의 일상적인 문제 해결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제도의 규범에 따라 문제를 구성한다. 그리고 적절한 비판적 추론을 도출할 수 있는 실용적인 전략을 사용한다.”(<의미 만들기>, 1989)

보드웰이 역사적 시학에 근거한 접근을 연구로 활발히 전환하기 시작한 1980년대는 북미에서도 영화학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영화 일반의 의미작용과 영화가 관객의 지각 및 심리를 결정하는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 유럽의 기호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론을 받아들여 인문학 내에 스스로를 제도화한 ‘제국의 시대’(이는 영화이론가 더들리 앤드루의 표현이다)였던 1970년대 이후, 북미 영화학은 관객에 대한 질문을 성별, 인종, 섹슈얼리티의 차원으로 구체화하는 문화연구 경향과 초기 영화의 특수성에 대한 재발견을 포함한 수정주의적 영화사 서술 등으로 다변화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에 참여하면서 보드웰이 노엘 캐럴과 함께 편집한 책 <포스트-이론: 영화학의 재구성>(1995)에서 제안한 포스트-이론(post-theory)은 우선적으로는 1970년대에 수립된 거대이론(Grand Theory)으로서의 장치이론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탈-이론’(de-Theory)이었다. 그러나 더 나아가 포스트-이론은 문화연구 지향의 영화연구 또한 기존의 이론을 영화 텍스트에 주입하여 영화의 의미를 해석하는 하향식 접근이라고 비판했다.

거대이론과 하향식 해석 대신 보드웰이 대안적으로 제안한 것은 중간-수준(middle-level)이라 부르는 연구 프로그램이었다. 그에 따르면 중간-수준 연구는 영화의 비평적 판단과 일반적 이론화 사이에서 이들 모두가 하지 못하는 과제의 해결을 추구한다. 중간-수준 프로그램은 한편의 영화 또는 동일 장르 또는 작가를 공유하는 영화들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비평의 과제를 공유하지만, 그런 과제를 넘어 특정 시기의 특정 영화들이 공유하는 서사 및 스타일의 전통과 그 내부의 일반적인 원칙(규범)을 추적함으로써 비평과 구별된다. 원칙을 식별하고 설명하는 것은 이론의 과제지만, 범용하게 적용되는 영화 일반의 존재론이나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에 대한 설명을 지향하는 거대이론과는 구별된다. “스타일의 역사에 대한 법칙이나 하나의 원칙에 따라 전개되는 거대 서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속성과 변화라는 장기적이고 중간-수준의 경향에 대한 설명을 제안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영화 스타일의 역사>, 1997)

할리우드의 안과 밖

<영화예술>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진 보드웰의 업적은 그가 크리스틴 톰슨, 재닛 스타이거와 공동으로 쓴 <고전 할리우드 영화>(1985) 이후 가장 최근 저작들까지 이어진 미국 영화제작 시스템의 역사적 변화와 연속성에 관한 연구다.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드웰이 제안한 ‘고전 할리우드 스타일’은 1917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의 스튜디오 영화제작을 지배한 통합적인 제작 관습 또는 규범을 말하는 개념으로, 촬영, 편집, 조명과 같은 기술적 장치 및 기법을 넘어 이들의 결합을 지배하는 영화적 시공간 구축과 서사적 논리의 체계, 그리고 이 체계들간의 관계를 포함한다. 장치 및 기법, 체계, 그리고 관계로 구성되는 스타일은 대중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영화를 효율적으로 대량생산하기 위한 제작 양식(mode of production)으로 통합되었고, 기술적, 미학적 혁신과 개선을 포용하면서도 일정 부분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보드웰에 따르면 규범으로서의 스타일은 “영화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고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는 물론 영화 기술의 범위와 기능, 관객의 활동에 대한 결정적인 가정들을 구성”(<고전 할리우드 영화>)하기 때문에 강력하고도 중요하다. 이같은 가정은 1970년대 이후부터 21세기에 이르는 할리우드영화의 기술적, 미학적 변화에 대한 보드웰의 견해에도 적용된다. 많은 평론가와 학자들이 기술적 스펙터클의 부상과 가속화된 편집, 복잡성 서사의 도입을 포스트-고전 할리우드의 징후로 지적했지만, 보드웰은 이와 같은 변화들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관객의 경험에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면서도 “고전 할리우드의 공간적 연속성 체계는 그대로 남아 있음”(<할리우드가 말하는 방법>, 2006)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오히려 말년에 들어 보드웰의 저작은 고전 할리우드영화의 서사가 1917년부터 등질적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와 모더니즘 소설, 추리소설의 영향을 통합하여 1940년대에 질적 혁신을 겪었고, 그와 같은 혁신이 후대의 소설(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및 영화(쿠엔틴 타란티노)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풍부한 역사적 사례와 함께 입증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할리우드의 재창안>(2017), <난해한 플롯>(2023)).

비록 할리우드를 중심에 놓고 그 이외의 영화적 전통과 스타일을 할리우드의 타자로 보는 서구 중심주의적 가정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역사적 시학의 기초”가 되는 “비교연구”에 대한 강조와 “영화언어의 규범과 컨벤션을 실험하는 감독”(“내한한 미국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 <씨네21> 378호, 2002년 11월)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보드웰은 할리우드 바깥의 국가 영화와 감독을 분석했다. 2002년 내한 무렵 허우샤오시엔, 홍상수,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의 영화에서 두드러진 정적인 롱테이크의 활용을 지칭하며 그가 고안한 아시아적 미니멀리즘(Asian minimalism)이라는 용어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홍콩영화의 역사 및 스타일에 대한 폭넓은 연구서인 <플래닛 홍콩>(제2판, 2011)에서 보드웰은 대중 엔터테인먼트의 목표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홍콩 영화산업의 기술적, 미학적 실험이 고속 및 저속 촬영, 역동적 편집, 비관습적 카메라앵글 등 무성영화와 192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가 시도한 기법들을 부활시키는 역설적 결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3판까지 출간된 <영화예술>과 4판까지 출간된 <영화사>를 개정하면서 보드웰과 톰슨은 디지털 시대의 기술적 혁신은 물론 비서구 영화들을 업데이트했다. <영화사> 4판(2019)의 한국 섹션에서 이들은 홍상수와 이창동 외에도 박찬욱과 봉준호의 영화들을 묶어 동시대 한국영화를 ‘예술영화와 장르의 크로스오버’로 규정했다.

영화 형식, 영화 스타일, 영화 관객의 삼위일체가 역사적으로 맺어온 다양한 관계를 탐구한 보드웰의 연구는 한국의 영화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걸쳐 이용관을 중심으로 한 당시 일군의 소장 영화학자들은 보드웰의 <고전 할리우드 영화> 및 <영화의 내레이션>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용관에 따르면 고전 할리우드 양식의 비판적 수용은 “어떤 창조적, 대안적 스타일도 허용하지 않는 우리의 제작 체계 및 영화 산업구조의 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할리우드영화의 고전적 스타일”, <영화연구> 7호, 1990년, 117쪽)한 것이었다. “고전 할리우드영화의 역사적, 미학적 중요성은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것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라는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게 하는 이 말은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드웰이 채택된 여러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스타일 분석은 문학적 해석과 예술비평에 머물러 있던 당시의 국내 영화학을 체계적인 방법론을 갖춘 과학으로 전환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거대하고도 상세한 사적 연구는 1980년대 영화운동 당시 선언적인 반제국주의적 비판의 대상이었던 할리우드 시스템의 미학적, 역사적, 제도적 실체와 가변성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영화의 내레이션>에서 예술영화 내레이션의 특징으로 제시된 감독의 자의식적인 스타일과 인과관계의 약화 등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혼종적으로 공존했던 이 시기의 영화를 이전의 충무로 영화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코리안 뉴웨이브’라는 개념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비평적, 분석적 도구가 되었다.

2002년 11월 동국대학교에서 내 피부에 와닿은 그 열기는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와 같은 지역적 수용의 다층적 맥락과 맞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고 기사를 마무리하는 바로 지금, 과거에 번역된 보드웰의 책 대부분은 현재 품절이거나 절판 상태다. 1990년대 중반부터 10여년간 페미니즘과 한국영화사 연구가 극복의 대상 중 하나로 설정했던 보드웰의 연구는 현재의 황폐화된 이론 및 비평의 지형에서는 어떤 식으로도 소환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은 필름 시대의 플랫베드(flatbed) 편집기를 넘어 DVD와 비디오 에세이로 역사적 시학의 연구 방법을 새로운 기술 및 플랫폼에 맞게 연장했고, 타계 전까지도 톰슨과 더불어 블로그 “영화예술에 대한 관찰”(Observations on Film Art)을 운영하며 새로운 영화에 대한 분석 및 비평을 꾸준히 수행한(초기 허우샤오시엔 영화에 대한 이 블로그의 가장 최근 포스팅은 2월26일에 올라왔다) 그의 말년을 고려할 때 유감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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