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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방콕국제영화제-이 영화제, 이상하다

제1회 방콕국제영화제, 할리우드 스타 틈바구니에서 관광산업 홍보에 열올려 방콕 시내는 이곳저곳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나 중심부 곳곳마다 걸려 있는 현 국왕, 라마 9세의 사진들은 이곳을 찾은 외국인들에게조차 엄격한 예의를 요구하는 듯 보였다. 룸피니공원을 지나 극장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서울을 연상시키는 교통혼잡을 헤쳐 나가야만 했으며, 머리 위로 달리는 지상철들과 개조된 택시들의 경적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미끄러져 달리는 오토바이들 틈에서 <왕과 나>(월터 랭의 영화 <왕과 나>에서 율 브린너가 맡은 역이 지금까지도 타이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라마 5세다)의 이국적 추억은 점차 방콕의 현재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렇게 자유로움과 엄격함이 뒤섞여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느낌을 지닌 그곳, 방콕에서 제1회 방콕국제영화제가 지난 1월10일부터 21일까지 열렸다.영화제인가 관광이벤트인가방콕국제영화제는 지난해까지 방콕의 영문 신문 <NATION>이 주최해오던 ‘방콕영화제’를 정부 산하 관광청이 인수, 타이영화협회와 공동 주최하여 ‘국제’영화제 행사로 확장시킨 것이다. 실제로는, 정부가 ‘주도’하는 영화제이기보다 모든 면에서 ‘주관’하고 있는 영화제인 셈이다. 따라서 관광청장이 직접 영화제의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베트남의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모한 아가쉬가 경쟁부문 골든 키나리(The Golden Kinaree Awards)의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총 150여편의 상영작들은 월드 시네마, 타이 시네마, 특별 스크리닝, 다큐멘터리/단편 에니메2003, 그리고 골든 키나리 어워드 등의 여섯개의 카테고리로 나뉘어져 상영되었는데, 주요 부분은 대략 이렇다.

개,폐막작을 상영한 스칼로 극장우선 월드 시네마 부문에는 개막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은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들 다수를 포함하여, 페데리코 펠리니의 , 프랑스와 트뤼포의 <컨피덴셜리 유어스>와 같은 고전영화들에서부터 브라이언 드 팔마의 최근작 <팜므 파탈>, 프랑수아 오종의 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폭넓은 영화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리고, 타이 시네마 부문에는 부산영화제를 통해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논지 니미부트르의 <낭낙> <잔다라>와 함께 타이영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하는 현재진행형의 영화들이 20여편 상영되었다.

특히 폐막작으로 상영된 무에타이 영화 <옹박>, 뮤지컬 양식을 차용하여 하층계급의 어두운 삶을 조명한 <몽락 트랜지스터> 등이 눈길을 끌었다. 또한, 경쟁부문 골든 키나리에는 타이의 전설을 소재로 한 영화 <메콩강 보름달 파티>와 프랑스의 자본으로 완성한 무에타이 영화 <레이지>가 선보였다. 이 밖에도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없는 남자>등 총 12편의 영화가 경쟁작으로 선정되어 있다.

한국영화들 중에는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월드 시네마에 초청되기도 했으며,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위원장은 넷팩 심사위원장의 자격으로 이번 영화제를 찾았다.이까지만 보면 여느 국제영화제와 별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방콕영화제는 이상한 점이 있다. 첫번째 돈을 너무 많이 쓴다. 예산이 60억원이다. 이건 매년 250편 안팎의 영화를 상영하는 부산국제영화제 예산의 두배에 가깝다. 게다가 부산영화제의 PPP 같은, 영화상영과는 별도의 대규모 프로그램도 없다. 그 돈을 다 어디에 쓰는 걸까.(그 이유는 조금 있다 밝혀진다.)

두번째, 해외 감독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아녜스 바르다가 개막식에 참석해서 상을 받기는 했지만, 보통의 대규모 국제영화제가 각국에서 온 감독들과 배우들을 관객들이 눈 앞에서 만날 수 있는 축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이건 이상한 일이다. 세번째, 해외 영화들은 타이 자막 없이 상영된다. 타이 관객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얘기다. 네째, 개막식이 영화제가 시작된지 7일만에 열린다.

이런저런 연유로 이 영화제, 참 이상하다.다양한 영화 소개하겠다

영화제 경쟁부문인 골든 키나리 수상을 위해 참석한 라마 왕조의 공주궁금증의 일단은 상영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스티븐 시걸과 장 클로드 반담, 제니퍼 틸리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이 영화제를 찾았다는 것으로 해소됐다. 이 배우들은 보통의 국제영화제와 가장 어울리기 힘들어보이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매우 비싼 배우들이다. 부르는 데는 수억원의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부대행사의 면면도 놀랍다.

영화제 초청으로 온 모리스 자르와 방콕심포니오케스트라의 공연, 라마 왕조의 공주가 동석한 패션쇼 참관, 제임스 무디의 재즈 공연, VIP에 한에서는 골프 회동. 그리고 영화제가 끝난 이후의 포스트 투어까지. 한마디로 영화제라기보다 고급 관광 코스에 가까운 것이다. 이 정도만으로 방콕영화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국제영화제라기보다 관광 이벤트에 가깝다. 그리고 이건 타이 관광청이 집행을 맡으면서 어느정도 예견된 결과이기도 하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관광청은 방콕영화제를 홍보하면서 아시아의 여러 매체들과 각국 영화제 관계자들에게 금 브로치 같은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이래저래 돈을 많이 낭비한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면 방콕영화제 관계자들은 섭섭할지 모른다. 실제로 방콕영화제 관계자들은 영화제 본연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사무총장 패트릭 드 보케이는 “무엇보다도 많고 다양한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 이번 영화제의 목적이라고 말하면서, 덧붙여 “아직까지 검열이 있는 타이에서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 투 마마> 같은 영화들을 상영할 수 있겠느냐”며 자부심을 피력했다. 그는 “우리는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방콕영화제의 한계를 어느정도 인정하면서도, “아시아에서 타이가 갖는 지리적 중요성”을 지적하며 이번 영화제를 통해 아시아의 인디펜던트영화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쯤에서 방콕국제영화제가 어울리기 힘든 두 가지 목적을 함께 지니고 이제 막 출발했음을 눈치챌 수 있다. 하나는 예술영화와 인디펜던트영화의 축제라는 영화제 고유의 역할과 또다른 하나는 방콕이라는 도시의 관광 및 비지니스 프로모션. 아직 이 양자는 완전히 따로 놀고 있는 느낌이긴 하지만, 연륜이 이 어설픈 봉합을 미끈한 조화로 탈바꿈시키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 길이 꽤 멀어보인다. 무엇보다 방콕인들에게부터 영화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대규모 국제적인 행사임에도 불과하고 현지 언론들의 반응은 다소 무관심하거나, 썰렁하다는 게 그 방증이다. 자국 관객을 돌아보길나름대로 유의미한 행사도 있었다.

우선, 1월18일 치러진 디지털영화워크숍의 주제는 한마디로 제작, 배급, 상영에 미치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전반적인 효용성이었다. 참석한 패널들은 디지털 기술이 사용된 할리우드영화의 클립을 보며, 또는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며 그 긍정적인 발전 양상을 재확인했다. 한편, 20일 있었던 영화파이낸싱워크숍에서는 미국과 유럽의 파이낸싱 성공사례를 살핀 뒤, 현재 아시아영화의 파이낸싱에 관한 성공적 출구를 모색했다.

해답이 나온 건 아니지만, 이런 토론의 경험이 아마 방콕영화제로선 큰 약이 될 것이다.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방콕국제영화제가 부산국제영화제를 모델로 삼거나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패트릭 드 보케이 사무총장은 “부산영화제처럼 아시아영화에 집중하기보다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제 최대의 인기작 중 하나인 <이 투 마마>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의 <과거가 없는 남자>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거머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조용한 미국인>의 마이클 케인영화제의 마지막 날, 작품상과 감독상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없는 남자>, 남우주연상은 <조용한 미국인>의 마이클 케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상을 받은 수상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영화제쪽은 이번 국제영화제의 주제가 “20세기의 위대한 감독들에게 존경을 바치는 한편, 새로운 시대의 인디펜던트 작가들에 대한 격려”라고 말했다.멋진 일반론은 사실 그다지 쓸모가 없다. 타이는 지금 산업적 융성에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같은 탁월한 감독을 배출하며 한국의 1990년대 후반처럼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자국 관객과 자국 영화인들이 중심이 되는 영화제를 만들만한 충분한 여건이 돼 있다는 얘기다. 제3자 입장에서 말하자면, 방콕영화제는 자국의 영화적 에너지를 집결하는 일이 영화제 성공의 제1 관건인 것 같다. 세계의 영화인들을 영접하고 맞이하는 일은 그 다음의 일이 될 것이다. 방콕국제영화제의 중심이 내년에는 조금 더 이동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