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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질투,<질투는 나의 힘>

■ Story

대학원생 원상(박해일)은 어느 날 여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는다.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겼다는 것. 애인을 빼앗은 한윤식(문성근)은 문학잡지사 편집장이자 “인생의 마지막 목표는 로맨스”라고 주장하는 매력있는 유부남이다. 처음엔 호기심 반, 질투 반 윤식의 주위를 배회하던 원상은 엉겁결에 그의 잡지사에 입사하게 되고 그곳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는 연상의 여인 성연(배종옥)을 만나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성연 역시 며칠 만에 한윤식과 여관으로 향하고 만다. 자유분방한 성의식을 가진 성연은 한윤식과의 일회적인 관계에서도 즐거움을 느끼지만 원상의 순진한 구애에도 마음이 동한다. 한편 한윤식은 젊지만 별 야망도 꿈도 없어 보이는 원상을 편애하며 항상 주변에 두려 하고, 이상하게도 원상 역시 한윤식을 거부하지 않는다.

■ Review

“… 고양일 한 마리 들여놨어요. 발톱이 앙증맞죠? 봐요. 이렇게 신기하게 휘어져요. 파스텔같이. 힘없이 털이 빠지는 꼴이란…. 앗, 아파요. 할퀴었어요. 조심해야지.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야. ”(기형도 <雨中의 나이> 중) 살면서 질투란 감정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끊임없이 자기비하에 휩싸이게 만들고, 그로 인해 남을 괴롭히는 감정. 그러나 이 영화 속의 ‘질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질투의 습성과 다르다. 롤랑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말한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것의 반대 지점에서 원상은 질투를 시작한다. ‘유연하고, 순응적이고, 잔잔하고, 예측 불가능한’ 질투. 그래서 비로소 이 청년에게 질투는 그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나의 힘’이 된다.

첫 애인을 뺏고, 연정을 품은 두 번째 여자도 빼앗아가는 남자에 대해, 사회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자신보다 가진 게 많은 남자에 대해, 그 많은 것을 가지고도 자신마저 획득해버리려는 남자에 대해 이 청년이 대응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가. 1단계는 주변을 서성거리며 그를 관찰한다. 그리고 2단계는 은근슬쩍 그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연다. 3단계, “누나, 그 사람이랑 자지 마요. 나도 잘해요”라며 그의 주변부를 포섭하기 위해 앙탈을 부리거나, 그의 하찮은 심부름까지 도맡아 할 정도로 낮은 포복으로 접근한다. 4단계, 그 세계 속에 완전히 동화(同化)된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그리고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5단계 혹은 또 다른 1단계의 시작점에서 영화는 끝난다. 종잇장처럼 밋밋해 보였지만 “알고보면 무서운 놈”이란 원상은 그렇게 생명력 있는 캐릭터로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머릿속에 각인된다.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셔터맨> <Cat Womean& man> <있다> <느린 여름>들의 단편을 통해 기묘한 분위기와 섬세한 감정묘사로 주목받아온 여성감독 박찬옥의 데뷔작인 <질투는 나의 힘>은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의 수상에 이어 올해 로테르담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이미 세간에 알려지고 유명세를 탔다. 하여 이 영화는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영광스럽지만 무거운 타이틀과 함께 일견 복잡하고, 모호한 이야기처럼 비쳐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질투는 나의 힘>의 구조는 의외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좌우대칭을 보이는 영화는 이원상과 옛 애인 노내경이 이별하는 모습을 원상의 친구가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시작해, 이원상과 박성연이 헤어지는 것을 한윤식의 딸 미림이 내려다보는 것으로 마무리되면서 대구를 이룬다. 물론 그 가운데를 가르는 ‘접는 선’의 경계나 그 좌우 좌표가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불균형 속에 아슬아슬하고 기묘한 균형감을 형성하는 영화는 ‘0’에서 시작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다 결국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이미 사회화된 윤식도, 극중에서 프레임 아웃된 성연도, 배우 배종옥의 말대로 “소멸되거나 증발된 것이 아니라 특별히 다르지 않은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원상은 그 원점에서 소멸되지 않는다. 마치 ‘줄줄이 비엔나’처럼 한 매듭을 끝내고 다음 세계를 향해 다른 ‘질투’를 시작할는지 모른다. 이는 크게 보면 연작의 시작과도 같다.

그러나 단순한 구조와 평범한 사건들과는 달리 영화는 “서스펜스 추리극처럼“ 느껴질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술집에 앉아 ‘옛날 애인 불러내기’를 하던 신처럼 한윤식이 얼마 전 버린 여자가 원상의 옛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느냐, 마느냐 같은 드러나는 긴장을 비롯해 원상의 상투적이지 않은 선택은 늘 아슬아슬하게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 감독의 말대로 누구도 “통제하지 않고(못하고)” 누구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태도는 그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조련사도, 영양가 있는 음식을 권하는 사육사도 아니다. 마치 새벽 아침 동물원 입장권을 끊어서 우리 안 동물들의 일상을 하루종일 코를 박고 지켜보는 어느 예민하고 치밀한 동물애호가에 가깝다. 우리 안 동물들의 행동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순간순간 웃음을 유발하고, 행동의 원인은 쉽게 규명되지 않는다. 풍경은 충분히 비정하지만 그 거리감은 보는 이를 쉽게 할퀴어 상처를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든 인물들에 대한 호기심어린 시선은 늘 적절한 온도를 유지한다. 이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따뜻함을 잃지 않는 성연의 태도에 가깝다. 성연은 결핍과 획득의 생태계를 초월했거나 혹은 선택적으로 이탈한 사람이다.

영국 유학을 포기하고 윤식의 주변에 머무르는 원상의 마지막 결정은 보는 이에 따라 윤식을 향한 투항일 수도, 사회적 성숙일 수도, 혹은 역전을 위한 잠시의 움츠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원상은 자살하지 않고, 살해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다. <질투는 나의 힘>은 그 독을 뒷주머니에 구겨넣고, 기형도의 표현을 빌리면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를 서성대는 영화다.

:: <질투는 나의 힘>을 쓴 시인 기형도

너무 일찍 떠나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워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이었던 박찬옥 감독은 2001년 전주영화제에서 <오! 수정>의 첫 상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을 읽게 되었다. 감독은 그 시에서 “20대 후반, 자신을 인정할 수도, 아직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하는 시기, 결핍이 동력인, 누군가의 말대로 ‘질풍노도’의 상태에 있는 젊은 남자”의 인상을 떠올렸고 ‘그’는 이원상이라는 구체적인 캐릭터가 되어 영화 속에서 호흡을 시작했다. 그리고 시나리오 파운데이션 작업도 없이 막바로 대사와 지문이 들어가는 장편 데뷔작의 초고를 한달 만에 써내려갔다.

퀴퀴한 습기로 가득 찬 짙은 안개 속, 불길한 죽음의 그림자를 향해 가는 듯한 기형도 시의 분위기는 시인의 삶에도 스멀스멀 침투했다.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태어나 중앙일보 정치, 문화부 등에서 일하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공식 데뷔한 기형도는 불행히도 생전에는 크게 빛을 보지 못했던 시인이었다. 그러나 1989년 3월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숨진 채 발견되는 것으로 29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그해 5월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펴냄)이 출간되면서 강한 대중적 공감을 이루어냈다. 유고시집에 수록된 77편의 시를 포함해 새로 찾아낸 미발표시 20편, 소설 8편, 산문 4편 등 습작소설과 미완성 시들을 포함한 <기형도 전집>이 사후에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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