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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고 처절하게 재현해낸 예수의 수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고대의 언어와 현대의 분장술로 철저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재현해낸 예수의 수난 혹은 멜 깁슨의 열정

관사만 빼면 원제 그대로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당연한 말이지만) 예수의 옷차림(fashion)이 아니라 수난(Passion)을 다룬 영화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수난극은 오직 피 흘리는 피부밖에 걸칠 게 없었던 한 인간의 처절한 패션쇼이기도 하다. 예수는 인류 최악의 고문으로 온몸이 찢어질 때까지 아무 기적도 행하지 못한 채 줄곧 상처투성이 육체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유다가 예수를 유대인 제사장들에게 팔아넘기고, 예수는 신의 아들을 자처했다는 불경죄로 공격당하며, 로마 총독 빌라도는 유대 군중의 압력에 밀려 십자가형을 언도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사흘 뒤 부활하더라, 는 줄거리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이런 유의 사극엔 으레 따라붙는 내레이션이나 배경 설명이 전무한 <패션…>은 모든 인물과 내러티브를 관객이 다 안다는 전제 아래 출발한다. 관객은 마치 <패션…> 10부작의 최종회를 보듯, 겟세마네 동산에서 골고다 언덕으로 이어지는 예수 최후의 12시간을 2시간으로 압축 체험할 따름이다. 영화의 야심은 복음서의 마지막 몇 페이지를 온전히 온몸으로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요약된다.

이런 맥락에선 성서에 깔린 선악 이분법이 좀더 강화되는 것도 성서를 ‘해석’하기보다 성서의 ‘장면’에 120% 충실하려는 선의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진실’을 숙고하는 빌라도와 빨갱이 사냥하듯 예수를 족쳐대는 유대인들이 뚜렷이 대조되긴 하지만, 반유대주의의 근거가 된 문제의 마태복음 27장 25절(“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을 깨끗이 포기한 멜 깁슨 감독에게 중요한 건 예수 탄핵의 책임 소재가 아니다. 죽어라 채찍을 휘두르며 깔깔대는 로마군의 모습이 비정상적이라 해도, 가학의 과잉은 고통의 스펙터클로 점철된 피학의 과잉을 위해 기꺼이 남발된다. 영화의 포커스는 오직 성서가 노정한 방향에서 수난의 지옥도를 극대화하는 이미지에 맞춰지므로. 그 하드고어 이미지의 요체는, 맞으면 아프다는, 고통의 반작용밖에 허락되지 않은 육체 그 자체다.

실로 채찍 자국이 살 떨리는 낙서처럼 휘갈겨진 예수의 벗은 몸은 잔혹 묘사가 겨냥하는 연민과 숭고미를 전하기엔 부담스러울 만치 흉물스럽다. 폭력의 세밀화와 다를 바 없는 그 피범벅의 표면은 빌라도 말마따나 ‘이 사람을 보라!’고 시종일관 시위할 뿐이다. 예수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가해자 아니면 목격자란 점은 이때 고스란히 관객 몫으로 되돌아온다. 관객 역시 이 명백한 폭력의 목격자이자 죄지은 인류로서의 잠재적 가해자일 테니. 관객을 무기력하고 죄 많은 구경꾼으로 만드는 <패션…>은 그래서 다분히 도그마적이다. 가치판단도 풍부한 설득도 이미 젖혀놓은 문제인지라, 감동의 폭은 이 강제된 상황을 감내하는 신앙심의 크기에 달렸는지 모른다.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만들었다는 감독의 고백대로, <패션…>은 비신자들을 예술적 감동으로 사려 깊게 이끌기보다 신자들을 자학적으로 결집시키는 영화에 가깝다.

성서에는 충실한데 영화적으론 빈약해지는 딜레마도 여기서 비롯한다. 대사는 거의 성경 구절에 한정돼있고, 그보다 긴 침묵들은 비장하지만 상투적인 표정들로 때워진다. 역사적 고증에 치중했다지만 입체감 없는 캐릭터는 그간 재현돼온 성서 이미지의 스테레오 타입을 답습한다. 가학과 피학의 묘사 역시 동기나 심리를 공감시키는 과정보다 매일 7시간이나 걸렸다는 특수분장의 슬로모션과 클로즈업으로 넘쳐난다. 간간이 플래시백으로 삽입된 예수의 행적도 드라마를 부풀리기엔 역부족. 유다의 착란과 하느님의 눈물로 인한 지진 등에선 낯익은 특수효과까지 동원된다. 이런 안이한 할리우드 스타일은 결국 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논할 건 별로 없다는 증거와 같다. <잔다르크의 수난>도 <마태복음>도 <예수의 마지막 유혹>도 아닌 <패션…>의 사실주의란 건 영성 대신 말초성만으로 믿음을 강제하려는 무모하고 얄팍한 미학인 셈. 여기에 복음서의 묘사를 넘어서는 여자들의 모성과 헌신이 남성영웅을 둘러싸고 거의 신파적으로 섞여듦에 따라, <패션…>은 스타일과 감성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와 비슷한 ‘십자가 짊어지며’ 같은 영화가 돼버렸다.

그렇다고 단점만 두드러진 영화라 하긴 어렵다. 고대 아람어와 라틴어를 고집할 만큼 열정이 담긴 영화고, 그래서 투자자도 없이 자비로 만든 데다 종교 논쟁까지 휩싸인 수난의 영화며, 어찌됐든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하는 복음의 영화인 <패션…>은 누가 뭐래도 멜 깁슨의 인생의 영화다. 뿐만 아니라 많은 배역을 소화한 유럽 배우들은 연출의 한계 속에서도 호연을 선보이며, 무명의 짐 카비젤(예수)과 돌아온 모니카 벨루치(막달라 마리아)도 밋밋한 캐릭터에나마 온몸을 던진다. 영화에만 집중한다면 종교에 관계없이 눈여겨볼 구석은 많다. 특히 반유대주의와 기독교 자본주의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한국 관객에겐 그만큼 객관적인 감상 조건이 마련되는 고로, <패션…>이 왜 그토록 서구를 들끓게 하는지도 요모조모 곱씹어볼 일이다.

:: 예수를 다룬 영화들

영원한 슈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

예수가 스크린에 부활한 경우야 셀 수도 없지만 1세기의 예수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 중 영화사에 남는 건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그중 가장 선배격인 <왕중왕>(1927, 비디오 출시명 <예수 그리스도>)은 <삼손과 데릴라> <십계> 등으로 할리우드 종교극의 전형을 선보인 세실 B. 드밀 감독의 초기작. 화려한 창녀인 막달라 마리아가 애인 유다를 예수에 빼앗기자(?) 질투심에 예수를 찾아갔다 그 광휘에 사로잡혀 예수를 섬긴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흑백 무성영화답게 큰 제스처로 다소 코믹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예수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성인의 아우라를 내뿜는다. 리메이크된 <왕중왕>(1961)은 니콜라스 레이 감독에, 오슨 웰스가 내레이션을 맡고 제프리 헌터가 예수로 출연한다. 산상수훈 장면을 위해 81대의 카메라를 배치한 이 대작은 당시 종교 스펙터클의 결정판으로 꼽혔다. 파졸리니 감독의 <마태복음>(1964)은 마태복음을 충실히 담아내면서도 시네마베리테의 다큐 스타일로 민중을 체취하여 미학적 실천을 쇄신한 종교영화의 걸작이다. 파졸리니의 유물론적 관점은 예수를 영혼의 구원자이자 당대의 마르크시스트로 바라보게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가장 전형적인 영적 리얼리즘으로 빚어낸 <나자렛 예수>(1978)는 로버트 파웰(예수)과 올리비아 허시(마리아)가 인상적인, 대표적인 예수 전기영화다. <마태복음>의 영향이 느껴지는 <예수의 마지막 유혹>(1988)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 많은 원작을 옮긴 마틴 스코시즈의 역시나 말 많았던 영화. 문제의 라스트 30분은 예수(윌렘 데포)가 환상 속에서 천사의 탈을 쓴 사탄의 유혹에 빠져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정상적인 남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있다. 예수의 섹스신이라는 꼬투리는 영화도 보지 않은 종교계의 반발로 국내 개봉 때도 적잖은 소동을 야기했다. 이런 논란들 속에서도 예수는 영화를 통해 재림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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